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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농업혁명의 역설, 다랑이논 -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다 ②

[라이프] 농업혁명의 역설, 다랑이논 - 지리산 둘레길 3코스를 걷다 ②
▲ 바래봉의 철쭉 (사진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 박종권)

● ‘쫒기는’ 나, ‘머무르는’ 나

길과 시간은 언제나 동행하지만, 어느 순간에는 시간이 멈춰버린 듯 길도 걸음도 멈출 때가 있다. 숲이 울창한 길을 걸을 때이다.

숲속에서는 모든 것이 멈추어버린 듯 그저 아득하고, 몸과 마음은 침잠한다. 그렇게 사방이 푸른 벽으로 둘러싸인 고요의 강에 풍덩 빠져버릴 때, 나는 나와 더욱 가까워진다. 강박과 무언가를 하여야 하는 ‘쫒기는’ 내가 아닌, 여유와 내면이 평화로워지는 ‘머무르는’ 나와 만날 수 있는 기회가 되기 때문이다.

어느 짧은 순간의 숲길 체험에서 길어내는 작은 깨달음이 비록 삶을 변화시키지는 못하지만, 불현듯 나를 향해 달려드는, 그래서 나의 마음에 흔적 하나쯤은 남기고 가는 이러한 소소한 작은 변화와 기회는 언제나 소중하다.
머무르고 싶은 욕망은 떠나야 하는 당위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고 만다.
하지만, 길은 머무름을 허락하지 않는다. 길은 그저 ‘지나는’ 통로인지라, 또 나아가야 한다. 잠시 머무를 수는 있지만, 지속적인 머무름은 길이 제공할 수 있는 범위를 벗어난다. 기억을 다듬어 체화하는 일은 각자의 몫이다.

그렇게 머무르고 싶은 욕망은 떠나야 하는 당위 앞에서 언제나 무너지고 말지만, 머무르고 싶은 그 순간만큼은, 특별하다.
수성대 계곡
얼마나 더 갔을까. 계곡을 가로지는 다리가 보이고, 계곡은 제 철을 만나기라도 한 양 요란스럽다. 계곡의 바위들을 덮고 있는 이끼들이 의외로 고색창연하다. 숱하게 많은 사람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었건만 그들은 다행스럽게도 손을 타지 않았나보다.

이곳의 이름은 수성대(守城臺). 이곳에 지킬 성이 어디에 있다고 이름이 수성(守城)인지는 모르겠으나, 여하튼 수성대다.
막걸리 한 잔, 2,000원. 갈증이 저 멀리 달아난다.
그런데 이곳에 웬 간이 천막과 평상? 무심코 바라본 기둥에 푯말 하나가 붙어 있다. ‘식혜, 막걸리 한 잔, 2,000원‘. 아! 무인판매대였다.

그럼 식혜와 막걸리는 어디? 식혜와 막걸리는 평상 옆 대야 안에 담겨 있었다. 대야 안으로 계곡물을 흐르게 하여 나름 냉장 상태를 유지하게 한 그 아이디어가 차라리 놀라웠다.

막걸리 한잔에 입은 둘. 마셨다기보다 시음을 했다. 시음 결과는 굿! 가다보면 또 이런 무인판매대가 또 있을지 모르지만, 만약에 없다면, 일찍 만난 것이 아쉬울 정도였다. 막걸리도, 안주인 김치도...
길은 숲속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루소, '나는 걷지 않고는 사색할 수 없다'

이제는 본격적인 숲길이다. 고요만이 가득하다. 가도 가도 끝없이 이어져 있을 것만 같은 구절양장의 오솔길이 반갑고 걷는 이를 여유롭게 한다. 길은 산등성이를 타고 지나는지라 길 다른 쪽은 낭떠러지다.

길은 숲을 뚫고 들어온 빛살에 눈이 부시다.
길은 숲을 뚫고 들어온 빛살에 눈이 부시다.
문득 이 길 위에서 ‘나는 걷지 않고는 사색할 수 없다’는 말을 남겼다는 루소(Jean-Jacques Rousseau, 1712~1778)를 떠올린다.

이렇듯 숲이 지붕을 이룬 오솔길을 걷노라면, 루소가 말한 사색은 아닐지 몰라도, 마음이 가라앉고 무언가 생각이 떠오를 것만 같은 가라앉는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사는 게 별거냐며 허세를 부리게도 되고, 알 수 없는 편안함과 행복감이 밀려들기도 한다. 그냥 이렇게 살아도 될 것 같은 안도감도 들고, 또 한 뼘쯤은 마음이 넓어지는 것 같은 착각(?)을 할 때도 있다.

아마도 걷기가 주는 선물이 아닐까 싶다. 새삼 ‘누구나 자연의 아름다움에 눈뜨고 자유를 가장 보편적인 동경의 대상으로 여겨야 한다‘는 루소의 말을 다시금 곱씹어보게 된다.
배너미재의 모습
● 배너미재를 넘다

고갯마루에 서자, 이정표는 여기가 배너미재임을 알려준다. 이름만 보자면 이곳이 배가 넘나들던 고개란 뜻인데, 이 산중에 무슨 배가 있다고 이런 이름을 달고 있더란 말인가.

전설에 따르면, 아주 옛날 먼 옛날에는 이 근방(운봉)이 큰 호수였단다. 그 호수를 떠다니던 배가 이 고개를 넘어갔다는 것인데, 글쎄... 이 ‘전설 따라 삼천리’가 전하는 의미 말고 다른 의미가 있었던 건 아니었을지... 그러려니 하기에는 워낙 느닷없는 이름이라 궁금증이 인다.
바래봉의 철쭉(사진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_고기하)
이 배너미재를 따라 산줄기를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바래봉(1165m)에 이르게 된다. 지금쯤 이면 바래봉에는 철쭉이 마치 불이라도 난 듯 산등성이 이곳저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을 것이다.
긴 세월의 거친 풍상에도 견디고 살아남은 자의 당당함이 엿보인다.
배너미재 고갯마루에는 나무 한그루가 속을 텅텅 비운 채로 서 있다. ‘텅 빈 충만’을 꿈꾸는 나무 철학도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 위세는 나름 대단하다. 꿋꿋하게 하늘을 향해 우뚝 솟은 모습이 긴 세월의 거친 풍상에도 견디고 살아남은 자의 당당함이 엿보인다. 오랜 세월을 살아냈다는 것은, 비록 몸은 부실해도 그 안에 담겨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임을 증명하는 듯하다.
장항마을의 소나무당산
● 당산나무와 당산제

배너미재를 넘자 길은 마을로 향한다. 장성이씨의 집성촌이라는 장항(獐項)마을이다. 마을을 감싸 안으며 흐르는 산줄기가 노루의 목을 닮았다고 해서 노루목이란 이름을 가지고 있는 마을이다. 노루목을 한자로 표기한 것이 장항(獐項)이다.

그런데 길옆의 철쭉을 배경 삼은 낙락장송의 위세가 예사롭지 않다. 장항마을의 소나무당산이다. 마을을 지켜 주는 신령이 깃들어 있다고 생각하여 제사를 지내는 나무이니, 마을의 수호신인 셈이다. 마을에서는 지금도 당산제를 지낸다고 한다. 특히 이 소나무는 장항 마을의 조상들이 이곳에 터를 잡은 400여 년 전에 심은 나무라 하니 장항마을의 수호신이면서 산증인이기도 하다.
저 멀리 장항마을이 보인다.
당산제(堂山祭)는 마을의 조상신이나 수호신에게 지내는 제사를 말하는데, 마을의 평안과 풍요 등을 기원하기 위해서 행해졌던 토테미즘 성격의 전통의례다. 보통 음력 정월대보름과 정초에 지내지만, 추수가 끝난 10월 보름에 치르기도 한다고 한다.

예로부터 당산제는 제사와 굿이라는 의례적 성격이 강했지만, 그 이면에는 마을 공동체의 단합과 유대관계를 돈독하게 하는 축제의 역할도 담당했다고 한다. 당산제가 보통 한 해의 농사를 시작하는 즈음에 열리는지라, 당시 농업에 영향을 미치던 자연의 절대적인 힘을 고려할 때 자연에 대한 겸손과 기원이 표면적인 이유였지만, 마을 사람들 간의 상호간의 위로와 격려 역시 중요했던 것이다.

두레와 품앗이라는 공동체적 질서와 협력 안에서 유지되던 당시 농업 환경에서 당산제는 수호신에 대한 의례적 성격과 더불어 공동체 구성원 간의 단합을 도모하는 회합의 기회이기도 했던 것이다.
모내기를 앞둔 장항마을의 논에 물이 그득하다.
하지만, 언제부턴가 몇몇 지역에서는 당산제가 우상숭배라는 이유로 마을 주민 간의 새로운 갈등 요인이 된다고 하니 뜨악할 따름이다. 실제 여러 마을에서는 종교적인 이유로 당산제가 사라진지 오래라고 한다. 그들에게 당산제는 전통문화유산이 아니라, 다만 미개한 우상숭배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나 보다. 수천 년간 지속되어온 전통의례마저도 그저 문화로 이해주지 못하는 그들의 협량한 대응이 아쉬울 따름이다. 어쩌면 이 아쉬움마저도 나의 과문함 때문일지도 모를 일이다.
과수원에는 사과꽃이 한창이었다.
마을의 논에는 모내기를 준비하는 일손들이 분주하다. 논에는 그득하니 물이 고이고, 머지않아 모내기가 한창일 것이다.

마을을 빠져 나오자 과수원에는 하얀 사과꽃이 탐스럽다.
어디로 갈까?
어디로 가야 하나? 삼거리의 이정표가 분주하다. 우리가 가야 할 길은 금계 방향이다.

주말이라 그런지 단체로 오신 산행객들이 더러 보인다. 열을 지어 오르는 그들도, 우리도 가야 할 길이 바쁜지라, 그저 묵묵히 걸을 뿐이다. 특히 산길에서는 다들 말수가 줄어든다. 숨쉬기만도 바쁜 탓이다.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다시 길은 숲을 향해 나아간다.
백 년은 족히 살아냈음직한 커다란 나무가 맨몸으로 서 있다.
●  묵답, 떠나가는 농촌의 아픈 풍경

이야~ 길 좋다. 소나무향이 잔잔하게 흐르는 길에서 탄성이 저절로 난다. 오르막이 있으면 내리막이 있다더니 빈 말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듯 길은 오르락 내리락을 반복하고, 우리는 이게 무슨 대수냐며 길이 인도하는 대로 발걸음을 재촉한다.

갑자기 나타나는 고사목. 벼락을 맞았을라나... 백 년은 족히 살아냈음직한 커다란 나무가 맨몸으로 서 있다. 그 구구절절한 사연이야 알 순 없지만, 그 처지에 비해 과도하게(?) 나무는 꼿꼿하다. 이대로라도 아직은 수십 년은 거뜬하다는 듯 의연하기까지 하다. 어쩌면 이 길 위에서 죽음으로써 불멸의 수호신이 되고픈 나무의 마지막 염원이 그를 이렇게 꿋꿋하게 서 있게 하는 건 아닐런지... 그렇게 믿고, 건승을 기원한다.
다랑이논의 흔적은 석축으로만 남아있다.
산길을 벗어난 길은 느긋하게 평지로 이어진다.

울창한 전나무 숲길을 지나다 만나는 느닷없는 석축들. 이 산중에 웬 석축이람? 여기가 성터였나? 성곽이라고 하기에는 규모가 작고, 그럼에도 적지 않은 품이 들어간 노력의 흔적이 역력하다.

문득 다랑이논의 석축을 많이 닮았다는 생각을 하는데... 아니나 다를까, 안내판은 이곳이 묵답이라고 설명한다. 묵은 논(畓)으로, 오랫동안 방치되어 제 기능을 상실한 논을 말한다. 그렇게 농부의 손길에서 벗어난 논은 아무도 모르게 원래 자신의 모습이었을 숲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묵답이 숲으로 돌아가고 있다.
그 옛날, 넓지도 않은 천수답(天水畓)을 개간한 농부는 이 손바닥만한 농지 한 자락을 얻기 위해 수천, 수만 번의 삽질과 괭이질을 했을 것이다. 그 피눈물 나는 노고의 흔적들이 석축으로만 남아 있으니, 그저 애잔하고 또 애잔하다.

세상의 만물들이 언젠가는 자연으로 돌아가는 것이야 거역할 수 없는 진리인 것은 모르는 바 아니나, 그래도 떠나가는 마지막 모습을 바라본다는 것은 언제나 마음 아픈 일이다. 비탈진 산허리를 깎아 논으로 만든 어느 가난한 사람들의 초인적인 노력들이 묵답이란 이름으로 떠나가고 있음이 못내 아쉬울 따름이다.

이 다랑이논마저도 그들에게는 생존을 위한 생명줄이었으며, 자식이었으며, 또 자신의 팔다리와도 별반 다르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길은 물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징검다리로 이어져 있다.
●  배려, 올챙이의 쉼터를 만들다

어지러운 심사를 다잡으며, 또 어디론가 흘러가는 길을 애써 따라잡는다.

그런데 아뿔싸! 계곡을 넘어온 물들이 길의 허리를 끊어놓고 만다. 양순한 길은 물의 침범에 그야말로 속수무책이다. 어쩌면 저항보다는 공존을 택한 길 나름의 이유가 있을 것이다. 다행인 것은 친절한 누군가의 노력이 징검다리로 놓여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니 걷는 이에게는 별반 방해가 되진 않는다. 북미(北美) 회담이 그렇듯, 공존의 현장에는 절제된 누군가의 중재를 위한 숨은 조력이 반드시 필요한 법인가 보다.

걸으며 무심코 바라본 물속에 오글오글 몰려있는 수많은 검은 점들. 그 점들이 꿈틀대더니 갑작스런 인적에 흩어져 간다. 오호라~ 올챙이였다.
물웅덩이의 올챙이들
수천 마리의 올챙이가 길가의 작은 개울에서 개구리로 승천할 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랬다. 공존을 위한 누군가의 노력이 올챙이라는 생명의 보금자리까지도 덤으로 마련해 주었던 것이다. 삶은, 나아가 세상의 모든 일은 보이지 않는 누군가의 공덕과 노력 위에서 존재하는 것임을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런데, 이 엄청난 수의 올챙이들이 개구리가 되는 날에는? 아! 이 산은 그 소란스러움을 어떻게 감당할는지... 이리 뛰고 저리 뛰는 수천 마리의 개구리라... 아마도 스펙타클, 그 자체일 것이다. 이를 어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리산이 아니던가.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아득하다.
●  산에서 사는 사람들

올챙이들과의 짧은 만남을 뒤로 할 즈음, 친구는 저 혼자 발길을 재촉한다. 멀리서 걸어가고 있는 친구의 모습이 아득하다. 나의 지체를 아는지 모르는지 그저 제 갈 길만 서두를 뿐이다. 나는 그런 친구를 따라잡느라 그저 부산스럽다. 에고 에고 같이 가자~ 이 친구야!

친구 딴에는 내 걷는 능력을 인정해준답시고 내가 멈춰 서서 사진을 찍든, 뭘 하든 상관없이 그저 제 갈 길을 가는 것이다. 나는 나름 인정(?)을 받았으니 투덜댈 수도 없이 또 쫒아가야만 했던 것이다. 가끔씩은 거리가 너무 멀어져 뛰어야 하는 순간도 더러 있었으니, 아이고~ 그저 숨만 헉헉댈 뿐이다.
막걸리와 묵무침으로 피로와 허기를 지우다.
그렇게 헉헉대며 걷는 와중에 저 멀리 주막이 보인다. 주막 입구 가득 쌓아놓은 빈 막걸리병들이 호객꾼이다. 갈증이 밀려올 즈음 손을 뻗으면 닿을 수 있는 거리에 있는 막걸리라... 유혹은 강하고 우리의 인내란 가벼웠으니... 어쩔 수가 없는 노릇이다.

주막의 주모는 당연히 이 지역 분일 것으로 생각했으나, 아니었다. 수도권 지역에서 사시다가 몇 년 전 이주했다고 한다. 여기서 지내실만 하시냐는 물음에 ‘어디건 사는 건 마찬가지지요’ 한다. 다만 지리산 둘레길이 개통된 이래 최근 들어 도보꾼들이 줄어드는 것 같아 아쉽단다. 전보다 손님이 줄었다는 말일게다. 걸어 볼 사람은 웬만하면 다 걸었기 때문일까? 길 위에서의 더 많은 방랑객을 기대해 본다.

막걸리 한 잔에도 몸이 노곤해지는 느낌이다. 어쩔겨? 주저앉을 수 없으면 또 가는 것이다. 가즈아~
도보꾼은 걷고, 농부는 일한다.
길은 마을로 내려간다. 마을이 머지않은 들에는 밭일을 하는 아주머니의 일손이 분주하다. 아무 것도 자라고 있지 않은 것 같은 밭에서 무얼 하시나? 유심히 들여다본 밭에는 앙증맞은 아이의 손 마냥 고사리가 꼬무락대며 자라고 있다. 걷는 동안 생각 외로 고사리가 자라고 있는 밭들을 여럿 만날 수 있었다. 어느새 고사리마저도 유용한 농작물이 되었던 것이다.

새삼 길 위에는 농부도, 주막의 주모도, 카페의 바리스타도, 민박집의 할머니도 계셨으니, 길이야말로 또 다른 공동체라는 생각이, 문득 든다.
다랑이논의 성벽 같은 석축이 보인다.
●  다랑이논, 고단한 삶의 증거

상황마을을 지나자, 길은 다시 오르막이다. 저어기 산마루가 등구(登龜)재다.

그런데 길만 오르막이 아니다. 모내기를 준비하는 논들이 계단처럼 차례로 산으로 올라간다. 다랑이논이다. 승천(昇天)하는 논들의 행렬에 보는 것만으로도 숨이 차다. 마을 촌부의 표현을 빌리자면, ‘징헌(징글징글한)’ 노동의 결과가 파노라마처럼 펼쳐져 있었던 것이다.

다랑이논은 기계의 힘이라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그 옛날, 오로지 인간의 손에 의해서만 만들어진 천지개벽의 현장이다. 저 논들은 얼마나 고단한 노동을 잡아먹고 저 자리에 저렇게 자리하고 있단 말인가. 오면서 만났던 묵답은 그 예고편이었던 것이다.
다랑이논은 징글징글한 노동의 결과이다.
(전략)
나는 굳이 알려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사람들이 빈 산골짜기로 올라와서
비탈에 하나씩 둘씩 돌을 쌓고 땅을 고르고
마침내 씨앗을 뿌려 질긴 목숨을 끌어갔음을 본다
참으로 사람이야말로 꽃피는 짐승
가슴 가득히 불덩이를 안고
피와 땀을 뒤섞이게 하는
그것이 눈물겨워 나도 고개 숙인다
(후략)

노동의 삶에 깃든 당당함과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꺾일 줄 모르는 불굴의 의지로 사랑과 희망을 노래했던 이성부 시인의 시집 <지리산>(창비, 2001)에 수록된 시 <피아골 다랑이논>의 부분이다.
다랑이논은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터전이었다.
지리산에는 피아골뿐만이 아니라 어느 곳이든 다랑이논이 넘쳐난다. 아니 이 땅의 수많은 산야에는 지리산과 마찬가지로 다랑이논이 없는 곳이 없다. 시인의 표현대로, 산촌마을에서는 다랑이논이 ‘피와 땀을 뒤섞어’ 만든 생존을 위한 최소한이기 때문이다. 이 땅에는 그러한 생존의 몸부림들이 차고 넘치지 않았던가.

고작 몇 평 남짓한 다랑이논 하나를 일구기 위해 농부는 여러 달 동안 돌과 흙을 수천 번을 져 날라야 했다고 한다. 비탈을 허물어 돌을 캐내고, 그 돌들로 축대를 쌓고, 땅을 평평하게 만든 다음, 바닥에는 자갈을 깔고, 다시 그 위에 찰진 흙을 채워 물을 가둘 수 있게 하고, 그 위에 다시 흙을 돋워 작물이 뿌리박고 서 있을 터를 닦아야 한다. 거기에다 다시 논 가장자리를 둘러 수로까지 만들어야 작은 경작지 하나가 만들어졌던 것이다.
고작 몇 평의 땅을 일구기 위해 농부는 수번 번의 삽질과 곡괭이질을 해야 했다.
송기숙의 소설 <녹두장군>은, 벼랑 끝 30평짜리 다랑이논을 개간하는데 아버지와 아들 두 사람이 죽도록 파고, 지고, 날라도 2년은 족히 걸려야 가능한 일이라고 알려준다. 우공이산(愚公移山)의 끈기와 노력 없이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2년여의 노력 끝에 만든 그 논에서 나오는 소출은 얼마나 될까?

논밭의 넓이를 나타내는 단위로 ‘마지기’라는 개념이 있다. 보통 한 말의 씨앗을 뿌릴 수 있는 논밭의 넓이가 한 마지기다. 통상적으로 논 한 마지기는 200평 남짓이니, 한 마지기의 땅을 얻기 위해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세월 동안의 징글징글한 노동을 감수해야 가능한 것은 불문가지다.
적은 소출일망정, 그마저도 하늘이 도와줘야 가능한 일이었다.
논 한 마지기에서 기대되는 쌀의 생산량은 현대의 기술(농기계, 농약, 비료, 원활한 농수공급 등)으로 농사를 지어도 잘해야 4가마(가마당 80kg) 남짓이라고 한다. 30평이면 연간 50kg도 되지 않는 쌀을 생산한다는 말이다. 과거에는 이보다도 턱없이 적었을 것이다.

결국 해마다 반 가마도 되지 않는 쌀을 얻기 위해 이 땅의 선조들은 우공이산(愚公移山)의 그 고통스러운 일들을 해낸 것이다. 천수답(天水沓)의 운명이 그렇듯, 그마저도 날씨를 관장하는 하늘이 적절하게 도와줄 때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제주의 돌담 역시 거친 노동의 증거이다.
얼마 전 제주도의 길을 걸으며, 수없이 만나는 제주도의 돌담들을 보면서도 비슷한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수만 km에 달하는 제주도의 돌담 역시 다랑이논과 비슷한 이유로 생겨난 것이기 때문이다.

제주도 돌담의 상당 부분은 밭을 에둘러 있는 것이다. 그 돌들이 어디에서 왔겠는가? 그 역시도 징글징글한 노동의 결과였던 것이다. 화산섬의 그 거친 돌밭을 개간할 때 나온 돌들이 돌담이 되어 그 피눈물 나는 노동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돌담과 지리산의 다랑이논의 연원은 다 같이 우리네 선조들의 고통과 아픔이자, 생존을 위한 자연과의 분투 과정이었으며, 그 증거였던 것이다.
제주의 돌담이 켜켜이 이어져 있다.
다랑이논과 관련한 이름 중에는 흔히 말하는 웃픈(?) 이름도 여러 가지다.

대표적인 이름이 ‘삿갓배미’다. 어느 농부가 자신의 다랑이논 개수를 세는데 아무리 세어 봐도 한 개가 부족하더란다. 그런데 이리저리 아무리 찾아도 없던 다랑이논 하나가 논두렁에 벗어놓은 삿갓을 드니 거기에 떡하니 있더라는 서글픈 이야기가 삿갓배미의 유래다. 그리고 ‘공중배미’라는 말도 있는데, 석축이 마치 높은 벼랑의 모양이라 뒤에서 보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공중배미다.

공중배미라는 이름을 탄생하게 한 다랑이논의 석축을 보면, 대체로 직각에 가깝다. 왜 그랬을까? 보기에도 아슬아슬한데 굳이 위험한 직각으로 석축을 쌓은 까닭이 무엇이란 말인가.
직각 석축은 농지를 넓히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비스듬히 석축을 올렸을 때는 안정적이고 튼튼하지만, 그 기울기만큼 농지가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위험하고 난이도도 높지만, 아래의 논과 위의 논을 침범하지 않으면서도 농지를 최대한으로 넓힐 수 있는 방법이 바로 직각 석축이었던 것이다.

쌀 한 톨이라도 더 얻기 위한 우리네 조상들의 분투는 그야말로 눈물겨운 것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들은 다랑이논의 구석구석에 배어 있다.
논이 공중에 떠 있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붙여진 이름이 공중배미다.
●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

새삼 유발 하라리가 그의 책 <사피엔스>에서 언급했던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라는 지적을 떠올리게 된다.

“한때 학자들은 농업혁명이 인간성을 향한 위대한 도약이라고 생각했다.(......) 사람들은 너무나 똑똑해져서 자연의 비밀을 파악하고 양을 길들이며 밀을 재배할 수 있게 되었으며, 그게 가능해지자(......) 인간은 수렵채집인의 삶을 기꺼이 포기하고 농부의 삶을 즐기기 위해 정착한 것이다. (하지만) 이 이야기는 환상이다.(......) 농업혁명은 안락한 새 시대를 열지 못했다. 농부들은 대체로 수렵채집인들보다 더욱 힘들고 불만스럽게 살았다.(......) 농업혁명은 역사상 최대의 사기였다.”
 
밭과 밭 사이 돌담이 가없이 이어지고 있다.
유발 하라리가 농업혁명이 사기라고 말하는 이유는, 약 1만 년 전의 농업혁명이 더 나은 식사를 보장하지도, 경제적 안정을 제공하지도 않았으며, 인간 사이의 폭력에 대한 안전망을 제공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그 대신, 농업혁명을 선택한 인간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감당하기 힘들만큼의 고된 노동과 이주의 제한, 지배층과 피지배층의 분화, 공동체 생활로 인한 전염병의 위험성 등이었다.

사냥과 채집을 하면서 상당히 편안하게 살고 있던 인간들은 어느 순간 밀(아시아권에서는 쌀)을 재배하는 데 점점 더 많은 시간을 투자하게 되고, 그로부터 채 2천년도 지나지 않아 인간들은 하루 종일 밀을 돌보는 것 외에는 거의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고 만 것이다.

유발 하라리에 따르면, ‘인간이 밀을 길들인 것이 아니라, 밀이 인간을 길들이는’ 상황으로 내몰리게 되었던 것이다. 밀이 인간을 풍요롭게 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역설적이게도 밀은 인간에게 덫이 되고 말았다.
못자리에서 모내기할 모들이 자라고 있다.
인간은 밀 경작지를 중심으로 영구 정착촌에 머물게 됨에 따라, 방랑하는 삶을 포기한 여성은 매년 아이를 낳을 수 있게 되었고, 이로 인한 인구 증가는 농부들의 어깨에 더욱 무거운 짐으로 얹히게 되었다. 게다가‘일을 더 열심히 하면 생활이 더 나아지겠지.’하는 바람이나 계획도 신기루에 지나지 않았던 것이다.

공동체 생활의 여파로 소위 엘리트 지배계층이 생기면서 그들을 먹여 살리는 것 역시 순전히 농부들의 몫으로 돌아오는 역설적이고도 모순적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이 산야에서 농부들은 논밭을 일구며 그들의 삶을 이어오고 있다.
슬프게도 부지런한 농부들은 그렇게 힘들여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원하던 경제적인 안정을 얻기는커녕, 도리어 모든 곳에서 등장하는 지배자와 엘리트로 인해 그들의 삶은 거의 나아지지 않았던 것이다. 지배 귀족 엘리트들은 농부가 생산한 잉여농산물로 먹고 살면서도 농부에게는 겨우 연명할 것 밖에는 남겨두지 않았으니, 농부 입장에서는 당연히 사기라면 사기고, 덫이라면 덫이었던 것이다.

농업혁명 이후 모든 인간의 역사에서 90%의 농부는 직접 생산하지 않는 10%의 지배자와 엘리트에게 희생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운명에 처해지고 만 것이다. 농업혁명의 역설이다.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논 (사진제공=남해군청)
새삼 지리산의 다랑이논을 보며, 이 땅에서 생존이라는 과제를 떠안은 채, 그 과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군분투한 많은 분들의 노고에 고개가 저절로 숙여진다. 이 간난신고(艱難辛苦)의 산물 중 일부인 남해 가천마을의 다랑이논은 문화유산(대한민국의 명승 제15호)이 되었으니, 선조들의 피와 땀의 결실을 조금 더 오래 보존할 수 있게 된 것만도 다행이라면 다행이다.

앞서 묵답의 사례에서 보듯, 다랑이논은 지속적으로 농경 행위가 유지될 때에만 보존될 수 있는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피아골 다랑이논이 국보가 되어야 한다는 이성부 시인의 말이 아니라도, 우리네 선조들이, 또 지금 이 땅의 우리네 이웃들이 살아왔고 살아가는 증거인 다랑이논은 앞으로도 오랫동안 지금의 이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가는 누군가의 삶을 증명해야 할 필요는 충분해 보인다.
유네스코 문화유산인 필리핀 코르디에라스 산맥 일대의 계단식 논
다랑이논은 쌀을 얻기 위해 자연에 도전했던 인간과 그 도전을 수용한 자연간의 절묘한 타협의 결과물이다. 오늘날에 이르러서는 그 타협의 결과를 잇는 지점들이 기하학적 아름다움으로 연결되어 있어 세계문화유산이 되기도 한다. 필리핀 코르디에라스 산맥 일대의 계단식 논은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다. 남해의 가천마을 다랑이논과 더불어 지리산의 많은 다랑이논들도 문화유산으로 오래토록 보존되기를 희망해 본다.
등구재 쉼터
●  등구재, 경상도와 전라도의 연결점 

등구재 쉼터가 보인다. 계속 이어지는 오르막인지라, 숨이 가빠지고 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른다.

등구(登龜)재는 경상도와 전라도를 잇는 고개인데, 생각보다는 야트막하다. 전라도와 경상도라는 지난 몇 십 년 동안 만들어진 정치적 색깔에 비하면 경상도와 전라도를 가르는 경계는 흐릿하고 그렇게 굳건하지도 않았던 것이다.

저 고개만 넘으면 내 고향 함양 땅이다. 어여 가자~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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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라이프] 아! 지리산 - 지리산 둘레길 3코스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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