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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아! 지리산 - 지리산 둘레길 3코스 ①

천왕봉 일출 (사진 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천왕봉 일출을 보러 오시라
삼대째 내리 적선한 사람만 볼 수 있으니
아무나 오지 마시고
(중략)
 
행여 반야봉 저녁노을을 품으려면
여인의 둔부를 스치는 유장한 바람으로 오고
피아골의 단풍을 만나려면
먼저 온몸이 달아 오른 절정으로 오시라
(중략)
 
그래도 지리산에 오시려거든
세석평전의 철쭉꽃 길을 따라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온몸 불사르는 혁명의 이름으로 오시라
(하략)
천왕봉에서 바라본 운해(雲海) (사진 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
이원규의 시, <행여 지리산에 오시려거든>의 부분이다. 우리는 안치환이 곡을 붙여 부른 노래로 더 많이 기억하고 있는 바로 그 시다.
 
시가 말하듯, 이 땅에 사는 우리에게 지리산은 특별하다. 삼 대째 적선한 사람만이 볼 수 있다는 천왕봉 일출이며, 세석평전의 불타오르는 철쭉꽃 같이 붉은 생을 살다간 혁명의 그들이 흘린 피와 눈물과 땀이 녹아 있는 역사의 현장이기도 한 때문이다.
지리산 천왕봉 (사진 제공=국립공원관리공단)
# 아! 지리산 

지리산은 이름만 들어도 마음이 설레고 왠지 모를 가슴 먹먹함이 있다.
 
지리산 자락에서 유년 시절을 보낸 감회 때문인지, 아니면 지리산이 가지고 있는 우리나라 산의 대표성 때문인지, 또 아니면 그 산이 품고 있는 해방공간에서의 그 처절한 역사 때문인지는 알 수 없으나, 지리산은 그저 이름을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아득하고 가슴이 뛴다.
초록이 겨운 길을 따라 산으로 간다.
소싯적에는 나고 자란 곳이 지리산의 지척인 함양이었던지라 친구들과 어울려 소풍가듯 지리산을 오르내렸었다. 게다가 군복무조차 고향에서 ‘우리 동네 특공대’(방위)로 복무하였던지라, 당시 주요 업무였던 진지구축을 위해 지리산 세석평전을 오르내린 것도 여러 번. 철쭉꽃 가득한 어느 5월, 근동의 방위병들은 세석평전의 등성이를 파헤치고 또 파헤치며, 국토방위의 지엄함을 몸소 체험했던 것이다.
 
그 당시 군용텐트를 치고 일주일 남짓 세석평전에 머무르는 동안, 지리산의 5월은 낮에는 봄이요, 밤에는 겨울일 수도 있음을 뼈저리게 깨달았었다. 군용텐트 안에서 밝힌 촛불 하나가 난방이 된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 알았다.
한적한 도보길을 걷는다는 건 언제나 설레는 일이다.
그 이후 어느새 30여 년, 지금은 지리산 종주라는 소박한(?) 목표를 끌어안고 산다. 하지만 언제나 현실은 궁색한 핑계와 변명 앞에서 우물쭈물대고, 결론은 타협이다. 그 타협의 결과가 바로 지리산 둘레길이었다.
 
지리산 둘레길 22개 코스 중 선택한 코스는 지리산 둘레길 3코스.
 
이유는 일단 거리(약 20km)가 적당했고, 지리산 둘레길 중 가장 많이 알려진 코스라 지리산 둘레길에 과문한 나를 잘 인도해주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지안재 전경
# 지안재, 지리산으로 가는 길목 

함양에서 지리산으로 가는 길은 지안재를 넘어간다. 지안재는 여섯 굽이의 곡선이 주는 아름다움 때문에 많은 사진가들이 즐겨 찾는 곳이다. 산마루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지안재는 곧바로 가로질러 올라갈 수 없음을 아는 길이 스스로 먼 길을 택하여 돌고 돌아 제 가야 할 곳을 기어이 오르는 현명함과 지혜가 녹아 있는 길이다.
 
지안재를 지난 길은 오도(悟道)재를 넘고, 지리산 자락을 돌고 돌아 금계마을로 향한다.
지리산 둘레길은 다섯 고을을 환형으로 잇는 도보길이다.
지리산 둘레길은 말 그대로 지리산을 빙 둘러 이어진 도보길이다. 전체 길이는 274km로, 전북 남원 구간(46km), 구례 구간(77km), 그리고 경남 함양 구간(23km), 산청 구간(60km), 하동 구간(68km) 이렇게 다섯 고을을 환형으로 잇는 길이다. 원래 길이란 마을과 마을을 잇는 연결선인지라, 지리산 둘레길 역시 120여개의 마을을 품고 그들과 더불어 나아간다. 사람이 없으면 길도 없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나의 둘레길 답사 여행은 대부분 혼자만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이번 지리산 둘레길을 걷는 동안에는 동행이 있었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한결같은 모습으로 나를 지지해주고 응원해주는 고향친구가 그 주인공이다. 도반(道伴)이라면 도반일 수도 있는 좋은 친구다.
 
우리는 먼저 금계마을로 가서 차를 두고 택시를 타고 인월로 넘어가기로 했다.
지리산에 찾아온 변화가 평화를 헤치는 방향은 아니길 바래본다.
# 지리산 마을에 찾아온 변화
 
택시기사님은 유쾌했고, 이동하는 내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투박한 경상도 사투리 너머로 지리산 둘레길이 생기면서 이 지역에 찾아온 변화라든가 여러 이야기가 오고 갔다.
 
그 중에서도 특히 관심이 가는 이야기는 지리산 둘레길을 경험한 많은 외지인들이 이곳에다 땅을 구입하면서 이곳의 부동산 가격이 폭등을 했다는 것이다. 들으니 계곡이나 물가의 좋은 자리는 웬만한 중소도시의 부동산 가격 못지않다. 헐~ 오지라면 오지랄 수도 있는 이곳에도 부동산 광풍이 몰아닥친 것이다. 그 방향성의 옳고 그름을 논할 수는 없으나, 여하튼 변화는 이곳에도 들이닥치고 있었다. 다만 그 변화가 지리산의 평화를 헤치는 방향은 아니길 바래본다.
지리산 둘레길에서 만난 멍멍이들. 여행자를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의 시작점은 인월(引月)이다.
 
인월(引月)이란 이름에는 고려 말 왜적 퇴치를 위해 이곳을 찾은 이성계의 전설이 숨어 있다. 때는 고려 우왕 6년, 삼도 도원수였던 이성계는 왜구 퇴치를 위해 이곳 황산(荒山)에 머물며 북진하는 왜장 아지발도(阿只拔都)와 일전을 벌일 당시, 깜깜한 그믐의 날에 이성계의 염원이 하늘에 닿아 조명탄이 터지듯 달이 떴고, 그 달빛에 기대어 쏜 화살이 아지발도를 꿰뚫었다는 전설이 그것이다. 그래서 인월(引月)이다.
 
그 인월에서 나름 유명한 것 중 하나가 5일장(3일, 8일)이다. 아직도 시골장터의 풍취가 남아 있고, 그 옛날에는 접경지역의 경상도와 전라도의 주민들이 서로의 소식을 듣고, 가져온 농산물을 팔고, 또 필요한 생필품을 장만했던 장소이기도 하다. 인월장은 예전만은 못하지만, 지금도 나름 분주하다.
지리산 둘레길 3코스의 관문격인 중군 마을
인월을 떠난 길은 산길로 가는 관문격인 중군(中軍)마을을 지난다.
 
그래서인지 고려시대 당시 중군(中軍)이 머물면서 마을 이름도 중군으로 바뀌었다는 이 마을은 1948년 여순반란사건 당시 패퇴하던 반란군들이 지리산으로 들어가던 길목이었다고도 한다.
 
마을 담벼락에 쓰여 있는 ’지리산 둘레길 3코스‘라는 글귀에서 새삼 둘레길이 주민들의 삶 속에 녹아 있음을 조금은 엿보게 된다.
마을 담장에 코스 안내 그림이 그려져 있다.
# 가보지 못한 길을 걷는 설렘
 
마을을 지난 길은 드디어 둘레길로서의 면모를 갖추고 숲의 저편으로 나아간다. 숲이 깊어질수록 계곡도 더불어 깊어지고, 길은 물소리의 반주에 실려 저절로 흘러가는 듯 부드럽다.

길 위에 서면 길과 시간은 정비례의 법칙에 철저하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는다. 길 위에서는 투여된 시간만큼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두 발이 묵묵히 감당한 만큼이 걷는 이가 경험할 수 있는 최대한이다. 그러니 그냥 가보는 것 말고는 달리 방법도 없다. 무작정 가보는 것, 오늘 우리가 할 일이다.
걷는다는 건 나 자신의 생명성을 증명하는 일이기도 하다.
걸어가야 할 좋은 길과 만난다는 사실은 언제나 가슴이 뛰는 설렘이 있다.
 
가보지 못한 길에 대한 궁금증과 걷고 있는 나 자신의 생명성에 대한 자각만으로도 걷는 이유는 충분하다. 그래서 두 발은 나의 존재를 증명하는 주요한 수단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걷는 만큼만 존재하다‘고 하지 않던가.
 
5월의 햇살에 눈이 부시고, 아직은 선선한 바람이 성미 급한 땀을 식혀준다.
먼 길 위에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속도를 깨닫게 된다.
# 길 위에서 깨닫는 친구의 의미
 
나는 지금껏 홀로 걷는 여정을 좋아했었다.
 
굳이 혼자 걸은 이유를 찾자면, 동행을 만나지 못한 탓도 있겠지만 내 도보여행에 따르는 기록에 대한 욕심도 한 몫 했을 것이다. 답사기라는 여행의 결과물을 생산하고자 하는 바람이 있으니 사진을 찍는데 소요되는 시간이 필요하고, 한편으론 관찰자의 입장에서 주변의 사물이나 풍경을 조금 더 세밀히 바라보아야 하니 그것 역시 지체 요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산을 오르든 길을 걷든 보행의 속도가 서로 맞지 않을 때의 불편함 역시 무시하지 못할 요소 중 하나다. 짧은 거리의 산책 수준이라면 모를까 10~20km의 여정은 자기만의 속도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런데 나는 길 위에서 이런 저런 이유로 지체하는 경우가 많으니, 동행에게 민폐가 될 확률이 높았던 것이다.
걷는다는 건 자연과 교감을 하는 과정이기도 하다.
하지만 오래된 친구의 경우에는 조금 다르다. 40년 지기인 나의 친구는 나의 이기적인(?) 걷기도 이해해줄뿐더러, 굳이 배려라는 단어를 떠올리며 챙기지 않더라도 서로가 서운하지 않을 만큼의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으니, 그저 제작기 열심히 걷기만 하면 충분하기 때문이다.
 
서로의 길을 방해하지 않는다는 것은 굳이 상대방을 위해 애쓰지 않아도 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물론 내용이 아닌 형식이 그렇다는 말이다. 그러니 친구가 아니겠는가.
삶이란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블렌딩‘ 과정에서 만들어진다.
친구란 이미 수많은 화학반응을 거쳐 새로운 관계로 변화된 상태의 관계일 것이다. 화학반응이 화합, 분해, 치환 등의 복잡다단한 과정을 통해 새로운 물질로 만들어지듯, 친구라는 특별한 인간관계 역시 이런저런 사연 많은 과정을 겪은 연후에라야 형성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
 
흔히들 의미 있는 삶이란 다양한 친구들과 어울리는 ’블렌딩‘ 과정에서 만들어진다고 말한다. 지지고 볶고, 섞이면서, 커피가 그렇고, 칵테일이 그렇고, 세상의 모든 요리가 그러하듯 삶도 마찬가지라는 말이다. 그렇게 서로 어우러지고 또 어우러져 삶은 행복과 성취를 만들어내지 않던가. 인생에서 최고의 투자는 친구를 얻는 것이라던데, 나에게는 이 친구가 바로 그 친구다.
나의 길 위의 도반이자 친구
티베트 속담에 “앞에 놓인 삶에 미소 지어 보라. 미소의 절반은 당신의 얼굴에 나타나고, 그리고 나머지 절반은 친구들의 얼굴에 나타난다.”는 말이 있단다. 친구는 또 다른 나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친구의 얼굴을 자주 바라봐야 할 이유가 생겼다.
길가 가장자리에 금강초롱이 피었다.
# 들꽃은 어딜 가든 지천이다
 
봄날의 둘레길 걷기에는 여지없이 길을 밝히는 들꽃들의 화사함이 있어 반갑다. 무료하고 또 건조할 수도 있는 걷기의 여정에 조용하면서도 따스한 파스텔 톤의 색감은 시원한 바람만큼이나 반가운 청량제다. 멈춰 서서 물끄러미 바라볼 만한 대상이 있다는 것만으로 충분하다. 또 야생화 입장에서는 보자면, 누군가 무릎 꿇고 다가와 자신을 바라봐 주는 이가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름 뿌듯하지 않겠는가. 누군가의 관심을 받는다는 것은 대체로 즐거운 일이기 때문이다.
제비꽃이 궁금증이 많은 미어캣을 닮았다.
그런데 제비꽃의 모양이 예사롭지가 않다. 방울뱀 코스프레라도 하는 양 고개를 쳐든 자세가 자못 도발적이다. 어쩌면 잘 생긴(?) 여행자가 진짜 궁금해서 고개를 쑥~ 내밀었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사막에 사는 미어캣(meerkat)처럼 고개를 쑥 내민 채로 두리번대는 모습은 인상적이다.
 
제비꽃 옆, 길 가장자리의 흰병꽃나무는 가는 계절이 아쉬운지 왠지 모르게 힘이 없어 보인다. 하지만 햇살이 비치자, 언제 그랬냐는 듯 금방 도도해지는 모습이 살짝 건방져 보이기도 한다. 아마도 예쁜 것들만 걸린다는 만성 지병(?) 탓일 게다. 그런데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기도 한다. 빛날 때 뽐내야 하지 않겠는가. 가는 세월 아쉬워 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꽃들이 전하는 처세술의 지혜라면 지혜다.
흰병꽃나무가 햇빛에 눈이 부시다.
산중의 꽃들은 소리 없이 피었다가 소리 없이 진다.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더라도 그들은 왔다가 간다. 그저 제가 차지하고 있는 그 한 뼘도 되지 않는 땅에서 미소 한 번 던져주고 가는 것이다. 어쩌면 짧은 봄날에 흔적 없이 스러짐이 아쉬울 만도 하지만, 어차피 떠남에 무슨 흔적이 따로 있을 것인가. 그냥 바람과 함께 사라지면 될 일이다. 내가 한때 흠모했던 영화 속 비비안 리도 그렇게 가고 없다. 그것이 세상사의 이치다.
 
그래서일까. 길 한 켠, 양지 바른 언덕배기 위에서 한 철, 어느 한 때를 살다 스러지는 그들에게서 아름답지만 슬픈, 존재의 유한성에 대한 질문을 받는다. 답은, 글쎄... 다만 유한하기 때문에 열심히 살아야 한다는 명제가 떠오른다. 그냥 그렇다는 말이다.
계곡을 만나니 계곡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을 수가 없다.
산으로 향하는 길은 계곡을 벗 삼아 이어지는지라 계곡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마침 그것도 걸었다고 이마에 땀이 맺히고, 계곡을 만나니 계곡물에 손 한 번 담그지 않을 수가 없다. 졸졸졸~ 저 있음을 끊임없이 외치는지라 아는 체를 해주지 않을 도리도 없다.
 
길은 산으로 향하고 숲은 더욱 깊어진다.
길은 산으로 향하고 숲은 더욱 깊어진다.
@@ 교통정보

◈ 버스
서울(소요시간 4시간 32분)
서울 → 동서울종합터미널(02-446-8000) → 백무동시외버스정류소 →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
 
◈ 자동차
지리산둘레길 함양안내소(경남 함양군 마천면 금계길 5/ 055-964-8200) 주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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