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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판사동일체(判事同一體)

[취재파일] 판사동일체(判事同一體)
지난달 25일 대법원이 발표한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의 보고서’는 앞선 두 차례의 조사 결과와 비교해 봤을 때 못지않게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었다. 내용의 방대함과 위중함으로 보건대 금요일 늦은 밤 황급히 '내던지듯' 공개할 만한 문건은 결코 아니었다.

개인적으로 가장 의아했던 대목은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에 대한 것도 아니었다. 동료판사 사찰 등 위법한 내용을 담은 문건들에 대해 일관되게 ‘지시를 받아 작성한 것’이라고 진술하는 행정처 심의관들이었다. 개인의 자의적 권한 행사가 불가능했다고 전제하는 것 같아 ‘판사동일체(判事同一體)’ 원칙이라도 주장하는 것인지 혼란스러웠다. 처장, 차장, 실국장, 총괄심의관, 심의관으로 이어지는 업무 지시와 실행, 보고의 구조는 마치 대법원장을 정점으로 하는 별동대를 보는 듯했다. 밖으로는 사법부 독립을 외치던 때에, 안으로는 상명하복을 철칙 삼아 부당한 지시를 이행하고 있었다.

그들의 일사불란함은 최소한의 옳고 그름을 구분하지 않았다. '내부', '대외비’라며 겹겹이 보안을 유지했던 문건들 중엔 사법부의 근간을 흔드는 것이라 할 만한 내용도 있었다. '해산된 통합진보당의 지역구 지방의원직을 상실시키는 행정소송을 법원이 지방단체장으로 하여금 제기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보고서 158쪽)'했다거나 박정희 정권 시절 긴급조치 피해자들의 손배소 사건에서 국가의 책임을 인정한 판사를 두고 '잘못된 재판결과는 사법부의 신뢰에 악영향을 줄 수 있(보고서 151쪽)'다며 징계를 추진하려 했다는 대목은 두 눈을 의심케 한다. 후자의 경우 대법원 판례와 다르다는 이유로 행정처가 하급심 판결에 개입하려 했던 것이었다. 법원 자체적으로 법관의 독립을 침해하는 방안을 궁리하고 있었다니...
사법부 재판이용
그럼에도 보고서에 따르면, 특별조사단은 이번 사태의 주요 원인을 임종헌 개인의 일탈에 초점을 맞춘 듯하다.

행정처 고위 간부의 장기간 근무로 인한 폐단
- ... 임종헌 차장은 행정처에서 사법행정을 담당하면서 남다른 열정과 강한 추진력으로 근무하여 온 것으로 알려져 있음. 그러나 오랫동안 사법행정 업무에만 종사함으로써 일선 재판현장에서 근무하는 법관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재판의 사법행정에 대한 우위'라는 원칙, 즉 사법행정은 재판을 지원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는 사실을 점점 잊어버리고 어느 순간 사법행정상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재판을 수단으로 삼거나 법관의 동향을 파악할 수도 있으며 특정 연구회의 활동을 통제할 수도 있다고 생각하게 된 것으로 보임. (보고서 181쪽)


'일선 재판현장에서 근무하는 법관이라면 누구나 공감할 재판의 사법행정에 대한 우위'라니? 임 전 차장의 지시를 그대로 이행했던 판사들은 얼마 전까지 일선 법원에서 근무하던 사람들이 아니었나? 이외에도 부당한 지시를 저항 없이 따른 그들을 오히려 두둔하려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대목도 확인된다.

... 이처럼 사법부의 관료화가 심화되면서 오히려 사법부 내부, 즉 법관의 인사권을 갖고 있는 사법 상층부로부터의 개별 법관의 독립이 크게 도전받게 되는 상황이 전개됨. (보고서 179쪽)

언론도 의무 없는 일을 지시한 것으로 드러난 임종헌 전 차장이나, 행정처 구조의 정점에 있는 양승태 전 원장 외엔 거의 언급하지 않고 있다. 법조계 일각에선 해당 문건 작성 판사들에게도 직권남용 혐의 적용이 가능하단 의견이 나온다. 하지만, 입증이 어려워 '끽해야 내부 징계'란 전망도 적지 않다. 임종헌 차장 등을 직권남용으로 처벌해선 안 된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도 '행정처 판사들이 의사에 반해 지시를 이행한 건 아니었다‘는 점을 근거로 드는 것으로 봐선, 문건 작성 판사들이 '불가항력적'인 상황에 놓여 있었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많은 것 같지도 않다.

문제의 행정처 판사들 대부분 지금은 일선 법원으로 돌아가 재판 업무를 하고 있다. 기자들이나 알음알음 누군지 알지, 보고서엔 그들의 실명이 기재되어 있지 않다. '임종헌 차장이 선호하는 문서 스타일, 예컨대 공격적이고 전략적인 문구, 정세 분석과 정무적 판단, 극단적인 방안까지 포함하는 다양한 시각에서의 대응방안 검토, 로드맵의 예시 등을 보고서에 넣으려 노력하느라 평소 생각했던 헌법적 가치나 원칙을 무시하거나 외면했(보고서 182쪽)’던 해당 판사들이 심리하는 재판을 국민들은 앞으로도 정의요, 최선의 결과라 의심 없이 믿어야 한다. 이번 사태의 피해자가 다름 아닌 국민들인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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