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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핵심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재판거래'다.

임찬종 기자 cjyim@sbs.co.kr

작성 2018.05.28 08:00 수정 2018.07.06 09:28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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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부당거래 포스터 (사진=네이버 영화)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의 출발점은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 보도였다. 지난해 4월 경향신문은 이탄희 판사가 들은 충격적 이야기를 세상에 알렸다. 대법원 법원행정처에서 국회 등을 상대하는 요직인 기획조정실 심의관으로 발령받은 이 판사가 행정처 공용컴퓨터 안에 판사들의 성향을 분류한 파일이 있다는 이야기를 고위간부로부터 들은 것이다. 이 사실이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법행정권 남용 사건에는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라는 이름표가 붙었다.

그 후 대법원이 무려 3번이나 조사 기구를 구성해 조사에 나설 때마다 초점은 늘 사법부 블랙리스트가 존재하는지 여부에 맞춰졌다. 그때마다 조사단은 블랙리스트라고 명확하게 규정할 만한 실체는 없다는 결론을 발표했다. 일부 언론도 이에 따라 조사 결과가 나올 때마다 "블랙리스트는 없었다"라는 제목의 기사를 보도하곤 했다. 가장 최근 발표된 3차 조사 결과도 크게 다르지 않았다.

@ 안철상 /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특별조사단장 겸 법원행정처장
(지난 5월 25일 특별조사단 3차 조사 결과 발표 후 기자들과 질의응답 中)

- 기자: "조사 결과 어떻게 평가하시나요?"
= 안 단장: "(전략) 이른바 블랙리스트 때문에 조사가 시작됐는데 특정 법관들에 대해 성향이나 동향 파악한 문서 발견되긴 함. 하지만 조직적 체계적으로 리스트라 하는 것은 발견하지 못했고 동향 성향 파악한 다음에 이에 대해 불이익을 가한 사례는 발견하지 못했습니다. (중략) 특정 사안에 대한 판사들의 동향을 파악한 문서는 발견됐지만 블랙리스트라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사태의 핵심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다. '재판 거래' 의혹이 핵심이었다. 특히 이번 3차 조사 결과 보고서엔 그 점이 더 명확하게 드러난다. 상고법원이라는 법원 조직의 이익이 달린 사안을 관철하기 위해 사법부가 통합진보당 재판, 통상임금 재판, KTX 승무원 재판 등을 통해 이만큼 노력했다고 청와대를 설득하고 흥정하려 했던 일, 심지어 통합진보당 지방의원 퇴출을 위한 소송을 기획까지 한 일 등은 행정처가 사법부의 본질인 재판을 정권과 거래하는 물건으로 취급했다는 증거다.

물론 대법원이 판사들을 뒷조사하고, 성향을 분류했다는 것 또한 작은 문제는 아니다. 그러나 판사에 대한 사찰은 어쩌면 수단이었을 뿐이다. 본질은 사법부의 존재 이유인 재판을 흥정과 거래의 대상으로 전락시켰단 점이다. 3차 조사를 맡았던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도 192쪽에 이르는 조사 보고서의 '총평' 부분에서 재판 거래 의혹이 사법부의 존재의 근거를 스스로 무너뜨린 것이라고 지적했다.

"상고심의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여야 한다는 미명 하에 판결을 거래나 흥정의 수단으로 삼으려고 한 흔적들이 발견되었음 (중략) 이번 사태는 주권자인 국민이 법관에게 공정한 재판을 할 것을 기대하며 사법부에게 부여한 '재판의 독립', '법관의 독립'이라는 헌법적 장치를 사법부 자신이 부인하려고 하였다는 점에서 스스로 그 존재의 근거를 붕괴시킨 것이라고 할 것임"

- 사법행정권 남용의혹 관련 특별조사단 조사보고서 183쪽 中

실제로 사법부 블랙리스트 의혹이라는 제목의 보도에 대해 그동안 냉소 섞인 시선이 없지는 않았다. '직원의 성향을 파악해서 분류하는 일쯤이야 일반 회사에서 흔하게 벌어지는 것 아니냐', '신분과 퇴직 후 소득이 보장된 판사들에게 얼마간의 인사상의 불이익이 가해졌다고 한들 그것이 그렇게까지 큰 문제라고 볼 수 있느냐', '판사는 마음에 들지 않으면 퇴직하고 변호사를 하면 되지 않느냐' 같은 반응이 없었다고 말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반응에 동의하진 않는다. 그러나 판사에 대한 위협과 사찰이 아무리 중대한 사안이라고 하더라도, 사법부의 존재 이유인 재판 자체의 공정성을 무너뜨린 재판거래 의혹만큼 본질적이진 않다는 점에는 동의한다. 나아가 일반 국민들에게도 재판 거래 의혹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살고 있는 판사들에 대한 문제가 아니라, 국민 각자의 인생이 걸려있는 문제란 점에서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양승태 사법부 법원행정처의 재판 거래 의혹이 얼마나 무참한 것인지 감이 오지 않는다면 법원행정처가 청와대를 상대로 거래의 대상으로 내놓으려고 했던 KTX 승무원에 대한 재판이 어떤 비극을 낳았는지 살펴보길 바란다.

"(KTX) 승무원들이 재판에서 진 것이다. 돌아갈 직장이 사라졌다. 승무원들을 벼랑으로 내모는 문제가 따로 있었다. 바로 돈이었다. 1·2심 소송에서 이긴 KTX 여승무원들은 과거 4년간 고용된 것으로 인정돼 코레일로부터 임금과 소송 비용을 받았다. 1인당 8천 640만 원. 재판에 졌으니 이 돈을 토해내야 한다. 10년 가까이 길바닥에서 보낸 사람들에게는 상상할 수도 없이 큰돈이었다. 결혼한 승무원들은 이혼해야 하는지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나누곤 했다.

몸을 던진 박 씨는 빚이 아이에게 상속된다는 점을 미안하게 생각했다고 한다. 판결이 나고 20일 동안 박 씨는 돈 걱정을 하다가 결국은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박 씨의 동료 승무원은 "그 친구는 누구에게 피해 주는 걸 못 참는 성격이었다. 아이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까 걱정을 많이 했다"라고 말했다. 김승하 KTX 승무지부 지부장은 "해고 노동자들에게 돈을 내놓으라는 것은 죽으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 그야말로 사람 죽이는 판결이었다. 비열한 사람들의 비정한 시대다"라고 말했다."

- 빚만 남기고 떠나서 미안하다, 아가 中 / 주진우 기자 / 시사인 / 2015년 7월 14일

"사법부가 VIP와 BH의 원활한 국정운영을 왜 뒷받침하며 왜 돌출 판결을 막기 위해 BH와 사전 교감을 하는가. 그 자체로 쇼킹하지만 뒷받침 사례로 버젓이 들어 있는 KTX 승무원 판결에 무릎이 꺾인다. 원고 중 한 명인 해고 승무원은 판결 직후 절망감과 빚 부담에 발을 동동 구르다가 아파트에서 몸을 던졌다. 그 때 세 살이던 고인의 딸아이는 이제 여섯 살이 됐다. 어린이집에 다니면서 엄마를 찾는다고 했다."

- 시사인 전혜원 기자 페이스북 글 中 / 2018년 5월 26일

그들이 흥정의 대상으로 삼으려 했던 재판 하나하나는 바로 이런 문제들이었다. 그럼에도 조사를 받은 사람 중 그 누구도 수사의뢰되거나 형사고발되지 않았다. 양승태 전 대법원장은 아예 조사를 거부했다고 한다. 과연 그들이 저 아이 앞에서도 떳떳할 수 있을까. 특별조사단은 보고서 말미에 "국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는 사법부로 거듭날 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고백했지만, 법원이 밝은 미래를 그리기 전에 밝혀야 할 진실은 아직도 너무나 많다.

** 이 취재파일에 첨부된 사진에 대해 얼마간의 설명이 필요하겠다. 많은 사람들이 알다시피 이 사진은 영화 '부당거래'의 포스터다. '부당거래'는 청와대가 관심을 표명한 사건을 해결하는 과정에서 부패한 검사와 경찰관의 권력남용을 묘사한 영화다. 영화에 등장하는 거래는 대부분 부당하다. 그러나 이 영화에 등장하는 부당한 거래는 재판 자체를 거래하려고 한 시도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서 이 영화 포스터를 이 글을 소개하는 사진으로 골랐다.

(사진=네이버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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