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스브수다] '버닝' 유아인의 찬란한 순간

[스브수다] '버닝' 유아인의 찬란한 순간
"청춘은 인생의 어떤 시기가 아니고, 마음의 어떤 상태다." 

미국의 시인 사무엘 울만은 청춘을 시간이 아닌 상태라고 정의했다. 그 관점에서 비춰봤을 때 영화 '버닝'(감독 이창동, 제작 파인하우스필름)에 등장하는 세 젊은이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청춘의 생동하는 이미지는 아니다. 종수(유아인)는 무기력하고, 벤(스티븐 연)은 영악하며, 해미(전종서)는 목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다.

이창동 감독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살아가는 세 젊은이를 통해 원인 모를 분노와 패배감에 젖어있는 이 시대 청춘의 모습을 관찰하고 묘사했다.

유통회사 알바생 종수를 연기한 유아인은 캐릭터를 연기한 게 아니라 그 캐릭터가 됐다. 오늘날 유아인의 스타덤은 '베테랑'이나 '사도'같은 분출하는 연기를 통해 생성된 것이다. 그러나 '버닝'의 유아인은 우리네 삶,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대다수의 젊은이들의 인생에 가까운 리얼리즘 연기를 추구했다. 

과거 인터뷰에서 유아인은 "배우란 불덩이를 안고 사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어떤 작품 안에서도 그것을 완전히 해소하지 못한다. 늘 잔여물 때문에 속상해한다. 배우의 에너지라는 게 빠졌다 채우는 충전지 같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아직도 내 안의 화가 안 풀리고 있다. 그 화는 앵그리가 아니라 에너지다"라고 부연한 바 있다.

어쩌면 유아인에게 '버닝'이라는 영화와 종수라는 캐릭터는 제 안의 잔여물조차도 완전히 해소한 작업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만큼 유아인은 모든 것은 쏟아부어 캐릭터에 다가갔다. 

특히 캐릭터를 규정짓고 이야기를 한정시키는 인위성을 배제한 이창동 감독의 연출은 유아인으로 하여금 연기의 자연스러움을 극대화할 수 있도록 했다.

'버닝'을 통해 오랫동안 추구했던 본연의 연기로 돌아갔다는 유아인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이미지
Q. 데뷔 15년만에 칸영화제에 참석한 소감이 궁금하다.

A. 생각보다는 담담하더라. 물론 기분은 좋았다. 무엇보다 애착 가는 작품과 함께 레드카펫 밟을 수 있어 좋다. 이런 순간을 좀 더 즐기고 싶은데 요즘 이런 것을 잘 못 즐긴다. 영화 외적인 사심이나 욕심이 사라진 것 같다. 백날 연기에 대한 진정성, 사명감, 소명의식 이야기해도 외적인 욕심이나 사심이 있었다. 물론 그것들도 즐길 만한 것이지만, 이제는 어느 정도 비워진 것 같다.

Q. 그동안의 어떤 작품보다 유아인 본인에 가까운 모습처럼 보였다.

A. 다양한 영화에서 많은 캐릭터를 연기했지만 이토록 청춘의 내면에 깊숙이 머물면서 관찰하는 영화는 없었다. 어떤 단상이 될만한 것이야 있었지만 이만큼 인물을 집요하게 파고든 영화는 처음이다. 대사도 별로 없다. 외부를 향한 표현이 아닌 어떤 내면을 가지느냐가 중요했고, 그것을 연기로 담아내야 했다. 그러다 보니 종수의 내면을 통해 유아인의 내면을 담아낸 것처럼 보였을 수 있을 것 같다.

Q. 내면의 분노를 표현하는 연기가 쉽지는 않았을 것 같다.

A. 억지로 만들어냈다면 힘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가공된 감정으로 임할 수 있는 현장이 아니었다. 이창동 감독님도 "강박 느끼지 마", "그냥 있으면 돼", "그냥 존재해"라고 디렉팅 하셨다. 즉, 만들어낸 효과가 아니라 자연스럽게 가져가야 하는 모호함과 불명확함이 있었다. 인물의 단순한 희로애락이 아닌 내면이 폭발과 급변화를 통해 이 영화 전체의 색깔을 만들어낸게 아닌가 싶다. 그 미스터리가 장르적인 쾌감을 주는 것을 떠나 이 세계에 대한 궁금증, 세상에 대한 미스터리를 담아내길 바랐다.  
이미지
Q. 종수라는 인물을 어떻게 이해했나? 

A. 이해하려고 하지 않았다. 이 시대상에 가까운 현실적인 인물로 그리기 위해 내 기억이나 경험에 기반하지도 않았다. 평소 형, 누나들과는 친하게 지내는 반면 동생들은 어려워하는 편인데 이번 영화를 준비하면서 동생들을 만나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그러면서도 이 시대에 청춘을 표현함에 있어서 교만떨지 말자고 다짐했다. 단순히 내 향수에 취해서 '내 청춘은 이랬어'라는 '꼰대'스러운 방식의 접근이 아닌 할 수 있는 만큼 들여다 보려고 했다. 근데 그럴수록 "요즘 애들 모르겠어"가 되더라. 나를 보고도 "쟤 모르겠어"하지 않는 것처럼. 저마다의 온도 차이가 있다. 그런 부분을 느낌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연기를 하다보면 내가 모르는 것을 연기해야 할 때가 많은데 이번 영화를 통해 배운게 많다. 그러나 이번 영화는 세상에 대한 해석이 아닌 오늘날 청춘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

Q. 청춘에 대한 느낌을 표현하려고 했다는 말이 인상적이다.

A. 잘 만들어지고 가공된 감정이 아닌 종수가 느낀 감정을 관객도 함께 느끼게 함으로써 공감을 나누고 싶었다. 관객이 종수의 세상에 들어가 그 공기를 느끼게 하는게 내 역할이었다. 요즘의 영화 양식과는 다른 방식이다. 잘 짜진 스토리와 설계된 플롯 안에서 영화적 기교나 질서로 만들어내는게 아니라 보는 순간 만큼은 판단을 보류하게 하고 그 시간에만 집중하게 하는 연기를 하고자 했다. 

Q. 벤(스티븐 연)이라는 인물이 처음에는 악인이라고 생각하기 쉽지만 표면적으로 그는 그 어떤 악행도 저지르지 않는다. 어쩌면 벤을 바라보는 종수의 시선과 그 시선의 오해로부터 극단적 행위가 발생하는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A. 영화가 제공하는 정보만 보면 벤은 잘못한게 하나도 없다. 관객은 우리가 보는 방식으로 벤을 판단하고 몰아간다. 해미는 대놓고 "사라지고 싶다"와 같은 자신에 관한 수많은 정보를 제공하는데 대부분의 사람은 외면한다. 이 불명확성을 어떻게 갖고 놀 것인가를 생각해봐야 한다. '버닝'은 기존 질서에 입각해 고정된 시각으로 영화를 감상하는 것에 대해 반기를 드는 영화다. 그런 지점에서 '영화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하지 않나 싶다. 관객이 극장에 앉아 두 시간을 소비하는건 굉장히 큰 노력이 필요한 것이라 영화를 만드는 대부분의 사람들이 메시지를 주거나 권선징악을 보여주려고 한다. 그러나 그런 영화가 넘쳐나도 세상은 착해지지 않는다. '버닝'은 세상에 대한 느낌을 전달하는 방식. 영화적 기능, 윤리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는 영화기도 하다. 
이미지
Q. 종수의 행위들이 그가 쓰는 소설상의 픽션일 수 있다는 관객들의 반응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나?

A. 엔딩 뿐만 아니라 많은 장면에서 그렇게 느낄 수 있다고 생가한다. 우리는 수수께끼를 던졌고,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관객이 찾았으면 한다. 우리 영화는 좀 다른 방식으로 수수께끼를 던진다. 종수가 뭘 썼는지에 대해 말하는 것도 관객의 생각을 가두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Q. 그래서 이 영화가 보기에 따라서 상당히 모호할 수 있다,

A. 물론 모호함이라는게 편하지는 않다. 대부분은 판단하고 정의내리고 싶어한다. 그러나 이것도 정답, 저것도 정답이 될 수 있다. 감독님도 '버닝'을 통해 '네가 판단을 해? 세상의 옳고 그름이 어디있어?' 이런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정답에 중독된 세상이다. 그런데 그 정답이 좋은 결과를 내놓지 않았다. 이제 그 정답에 대해 의구심을 품을 만한 시대라고 생각하신 것 같다. 영화라는게 세상에 큰 파장을 일으키지만, 과연 영화가 세상을 좋게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있으셨을 것 같다. 이창동 감독님은 굉장히 윤리적인 사람이니까.

Q. 유아인은 연기의 스펙트럼이 상당히 넓은 배우다. 상업적인 배우인 동시에 자신의 주관도 확실한 배우다.

A. 전자의 경우는 노력할 필요는 없지만, 후자의 경우는 노력이 필요하다.

Q. 종수의 다층적인 연기는 계산된건가?

A. 계산된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다. 배우로서는 무용같은 추상적 표현일 수도 있다. 직접적이지 않아도 '이 인물은 어떤 인물이야'하는, 인간상을 보여주는 움임직도 크게 가져가고 싶었다.

Q. 지금 칸영화제 현지 반응이 좋아 수상에 대한 기대도 내심을 있을 것 같다.

A.  나 역시 세속적이고 세상을 향한 야심이 있는 사람인데 왜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싶은 마음이 없겠냐. 하지만 지금은 사심이나 욕심을 굉장히 많이 비웠다. 다만 '버닝'팀의 일원으로서 이창동 감독님이 앞선 영화제에서 받은 상보다 더 큰 상을 받았으면 하는 마음은 있다. 내가 원하는 것은 칸영화제라는 이 영화의 장에서 '버닝'이라는 작품이 관객에게 진정성 있게 알려지길 바란다. 상이란게 어떤 가치를 드러내고 증명하는 것이라면 난 이 영화에 자신이 있다. 더불어 칸에서 주목받고 수상하는 것이 관객들에게 널리 알려지는 한 방편이 된다면 그것도 바라는 바다.

Q. 세속적 욕심을 비우게 됐다고 했는데 그렇게 된 계기가 있나?

A. 그런 게임은 많이 한 것 같다. 물론 우리가 사는 세상은 자본주의 세계이고, 제게도 그런 욕망이 있지만 자연스럽게 즐기면서 가져가고 싶다. 일 때문에 불안해하고 싶지 않다. 내가 주인공이 아니면 나서기 싫고 그러면서 조명받고 싶은 욕심도 어느 정도 내려놓았다. 

물론 여전히 내면에서는 싸운다. 예전에는 이 욕망 사이드가 제 안에서 승리하는 순간이 많았는데 지금은 기를 못펴고 있다. 물론 그것은 표현적인 것이고, 내적 성장은 평생 가져가야 한다고 생각한다. 실질적으로 내 나이에 너무 큰 성취를 이뤘고, 대한민국에서 과분한 영광를 누렸다. 이제는 세상에 필요한 배우가 되고 싶다.      

(SBS funE 김지혜 기자)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