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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브수다] 이솜과 '소공녀'가 만난 건 축복이다

[스브수다] 이솜과 '소공녀'가 만난 건 축복이다
"난 집이 없는 게 아니라 여행 중인 거야"

영화 '소공녀'(감독 전고운, 제작 광화문시네마)에서 이솜은 단 한 벌의 의상을 입었다. 갈색 롱코트 안에는 헤링본 재킷을, 청색 남방을, 와인색 목폴라 니트를 껴입었다. 170cm의 큰 키에 늘씬한 몸매를 자랑하는 배우이기에 의도한 레이어드 패션으로 보이지만, 이는 실용성과 보온성을 염두에 둔 미소의 생존형 겨울 의상이었다.

미소는 가난하지만, 품위를 잃지 않는 여성이다. 이 품위는 자신을 사랑하고 아끼는 당당한 태도에서 비롯된다. 돈이 없어도 담배와 위스키라는 취향을 포기하지 않는다. 

좋은 직장을 얻기 위해, 번듯한 집을 구하기 위해 아등바등 사는 20~30대 청춘들에게 미소의 삶은 '패배자'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인생을 주체적으로 사는 용기'만으로도 미소의 청춘은 아름답다. 

자칫 현실에 발을 떼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캐릭터는 이솜이라는 배우와 만나 관객의 가슴을 파고들었다. 이솜이 가진 도회적이고 세련된 외모와 엉뚱하고 속을 알 수 없는 매력이 미소의 엣지, 유니크함과 데칼코마니를 이뤘다. 이렇게 절묘한 캐스팅이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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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솜은 영화 '소공녀'를 찍을 때 직접 운전대를 잡고 촬영장을 출, 퇴근했다. 정우성, 이정재가 이끄는 대형 엔터테인먼트 아티스트 컴퍼니 소속인 이솜은 소속사에게 "혼자 다니겠다"고 선언했다.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한 번쯤 해보고 싶었어요"  

촬영 때 착용한 단벌 의상을 그대로 입고 출, 퇴근을 반복했다. 이솜은 미소를 흉내 내지 않고, 하나 되기 위해 한 달을 그렇게 보냈다. '소공녀' 속 이솜은 그 자체로 미소였다.

'소공녀'는 집만 없을 뿐, 일도 사랑도 자신만의 방식으로 살아가는 사랑스러운 현대판 소공녀 ‘미소’의 도시 하루살이를 담은 영화.

영화를 제작한 광화문 시네마는 충무로의 영화창작집단이다. 영화제작사라는 딱딱한 표현 대신 영화 동아리 개념으로 이해해도 좋다. 7명의 창립멤버가 각기 다른 방식으로 영화에 참여해 결과물을 만들어낸다. 저예산의 독창적인 영화가 특징이다.

'1999, 면회'로 첫발을 뗀 광화문 시네마는 '족구왕', '범죄의 여왕'을 거쳐 '소공녀'까지 4편의 영화를 제작했다. 이 영화들의 연결고리는 엔딩 크레딧에 등장하는 쿠키 영상이다. 다음 영화에 대한 예고편 성격을 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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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시네마의 전작인 '범죄의 여왕'(감독 이요섭)에 출연한 게 인연이 됐어요. 개봉 당시 쿠키 영상을 보고 '소공녀'의 존재를 알게 됐어요. 막연히 '이 영화, 재밌겠다'고 생각했어요. 30대 중반의 여배우를 찾고 있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이요섭 감독을 통해 시나리오를 받았어요. 읽고는 바로 미소에 매료됐죠."

이솜은 광화문 시네마의 팬을 자처해왔다. '소공녀' 시나리오를 잃었을 때 주저함이 없었던 것은 팬심도 크게 작용했다. 여기에 "광화문 시네마 작품이 아니었다면 그렇게 이미지가 확실하게 그려졌을까 싶어요. 특유의 유니크함이 글에서도 느껴졌어요. 캐릭터도 어떻게 그려지겠다는 추측이 가능했죠."라고 덧붙였다.

미소는 N포 세대로 불리는 청춘의 독특한 단면을 보여준다. 일용직 가사 도우미를 하며 번 일당 4만 5천 원으로 방세를 내고, 담배를 피우고, 위스키를 사 마시고, 남자친구와 데이트를 한다. 정규직 직장을 얻지 않아도, 집을 사지 않다고 충분히 행복하다고 여긴 그녀의 삶을 위협한 사건은 '담뱃값 인상'이었다. 미소는 담배와 위스키를 포기할 수 없어 짐을 싸 거리로 나선다.

"미소의 상황과 선택이 공감이 많이 됐어요. 저와 제 친구, 친언니도 다 거쳐 간 고민이니까요. 상황의 유사성보다는 미소가 하게 되는 선택들에 대한 공감이 컸던 것 같아요."

이솜은 미소라는 캐릭터가 가진 비현실성을 알기에 감독과 이야기하면서 관객들이 느낄 거리감을 좁혀나가고자 했다. 이솜은 "미소가 집을 나와 친구들의 집을 전전하잖아요. 민폐로 보이면 어쩌나 가장 큰 고민을 했어요. 다행히 감독님과 많은 대화를 나누며 불안 요소들을 없애나갈 수 있었어요."라고 말했다.

미소가 찾는 친구들은 현실과 가장 맞닿아있는 삶을 살고 있지만 감독의 연출도, 배우의 연기도 그들의 삶을 재단하지 않는다. 미소에게 미소가 선택한 삶이 있듯, 그들에게는 그들이 선택한 각자의 삶이 있다고만 이야기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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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솜에게 삶에서 포기할 수 없는 세 가지가 있다면 무엇일까.

"매일 내려 마시는 아메리카노? 그날의 커피는 소중하니까요. 그리고 영화관 가는 거요. 나머지 하나는 산책입니다."

이솜은 또래의 여느 배우보다 영화를 많이 본다. 취향에서도 깊이와 넓이가 느껴진다. 최근에 본 영화에 관해 묻자 '패터슨', '셰이프 오브 워터', '플로리다 프로젝트', '리틀 포레스트' 등을 꼽았다.

"영화를 보는 행위가 제겐 휴식이고 즐거움이에요. 영화를 볼 때 공간을 중시하는 편이에요. 이 영화는 반드시 이 극장에서 봐야 한다는 주의에요. 블록버스터 영화들은 멀티플렉스 극장을 찾지만, 예술영화들은 꼭 아트나인, 씨네큐브를 찾아가서 봐요."

'소공녀'는 보고 난 직후보다 보고 난 이후의 여운이 깊은 영화다. 미소의 삶은 현재 대한민국 사회를 사는 20대 청춘들의 현실적 삶과는 다소 거리가 있어 보이지만, 신기하게도 각자의 20대를 떠올리게 하는 위력을 발휘한다. 이솜에게도 그랬다.

"저의 20대를 떠올려보면 일을 하고 있었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들과의 관계에 대해 많은 고민을 했던 것 같아요. 어린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어른들과 어울릴 일이 많았어요. 그래서 인간관계를 편하게 즐기진 못한 거 같아요. 지금도 마찬가지예요. 다만 마음적으론 조금 여유를 갖게 됐죠. 특히 '소공녀'를 하고 나서는 조금 더 여유로워진 것 같아요. 미소가 제게 그런 위로를 줬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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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솜은 2008년 케이블 TV 모델 선발 프로그램으로 데뷔해 패션계의 톱 모델로 성장했다. 2010년 영화 '맛있는 인생'을 통해 연기자로 변신했다. 

배우로서 주목받기 시작한 작품은 2014년 정우성과 호흡을 맞춘 영화 '마담 뺑덕'이었다. 이 작품에서 순수와 퇴폐를 오가는 팜므파탈 '뺑덕'으로 분해 신인답지 않은 연기력을 뽐냈다. 

이솜은 도시적인 세련미와 당당함 그리고 보헤미안 같은 자유로운 매력의 소유자다. 연기자 데뷔 후 맡은 역할 역시 하나같이 주체적인 여성이었다. 

"대본이 재미있고, 캐릭터가 좋으면 끌리는 것 같아요. 다양한 것을 많이 시도해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어요. 주체적인 캐릭터를 일부러 골라서 맡았다기보다는 그런 캐릭터가 멋있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매력 있어요."

인터뷰 말미, 영화에서 마침표를 찍지 않은 미소의 미래에 관해 물었다. 이솜은 미소를 삶을 응원하고 지지하는 애정 어린 답변을 내놓았다.

"그 친구가 그대로 있었으면 좋겠어요. 비록 (육체적으론)삶을 힘들게 할지라도 그녀에겐 취향과 자존을 지키는 것, 그게 가장 중요한 거니까요."

<사진 = 아티스트 컴퍼니 제공>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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