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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전통가곡과 만난 바로크 오페라…"'고향'이란 무엇인가요"

한국 전통가곡과 만난 바로크 오페라…"'고향'이란 무엇인가요"
3월 30일 오후 10시 봄바다를 바라보는 통영국제음악당에는 낯선 시청각 자극들이 넘쳐났습니다.

런웨이(패션쇼에서 모델이 걷는 길)처럼 길고 좁게 연출된 무대를 가운데에 두고 한쪽 끝에는 눈을 검게 화장하고 검은 옷을 입은 서양악기 앙상블이, 그 반대쪽 끝에는 한복과 두루마기를 곱게 차려입은 한국 전통악기 연주자들이 마주 앉았습니다.

그 사이에는 자갈들이 가득 깔려 연주자들이 이를 밟고 움직일 때마다 음악에 거친 소리를 더했습니다.

이날 개막한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세계 초연된 음악극 '귀향'은 이토록 이질적이고 거리가 멀어 보이는 두 음악 장르, 즉 바로크 오페라와 한국 전통가곡의 조우를 시도하며 통영의 밤을 새로운 색채로 물들였습니다.

음악극 '귀향'은 몬테베르디의 오페라 '율리시스의 귀향'(1640)에 한국 전통가곡들을 덧입힌 작품입니다.

2013년 바로크 오페라에 패션쇼 무대를 접목한 '세멜레 워크'로 센세이션을 일으켰던 오페라 연출가 루트거 엥겔스가 5년 만에 통영에서 선보이는 신작으로도 관심을 모았습니다.

트로이 전쟁 10년과 그 이후 또 다른 10년이 지나고서야 고향으로 돌아온 율리시스의 여정, 그를 애타게 기다리는 페넬로페 왕비가 겪는 고통스러운 외로움을 이야기하는 기본 구조는 몬테베르디의 원작을 따랐습니다.

공연은 서양과 동양 앙상블이 마주 앉은 첫 모습만큼이나 파격과 새로움의 연속이었습니다.

초반부에 각기 다른 두 마을처럼 서로를 바라보며 각자의 노래를 하던 두 앙상블은 공연이 진행될수록 묘하게 겹쳐지기도, 서로의 음악을 바꿔 연주하기도, 완전히 다른 장르의 음악을 함께 연주하기도 했습니다.

소프라노 안나 라지에예프스카(페넬로페 역)가 남편을 그리워하며 "돌아와요, 오 돌아와 줘요, 율리시스"를 애타게 외치면, 전통가곡 이수자 박민희는 황진이의 시에 선율을 붙인 가곡 '동짓달'을 노래하며 "동짓달 기나긴 밤의 한 허리를 베어 님 오신 날 굽이굽이 펴겠다"고 다짐합니다.

바로크 시대 거트현(양의 창자를 꼬아 만든 현) 악기 소리는 해금, 거문고 선율과 오묘하게 어울렸습니다.

완전히 다른 색깔과 소재의 재료들을 콜라주(서로 상관없는 재료들을 함께 붙이는 예술표현의 기법)했지만 사랑하는 이의 부재, 그에 대한 갈망이라는 일관된 정서가 펼쳐졌습니다.

이날 공연 전 만난 연출가 엥겔스는 "17세기 쓰인 유럽 바로크 오페라와 한국 전통가곡은 다른 장소에서 각기 만들어졌지만 상당히 닮은 부분이 많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느린 선율로 인간의 깊은 정서를 표현하는 부분, 한음을 길게 뽑아 쓰는 기술, 부재한 연인을 기다리고 그리워하는 가사 내용 등이 상당히 유사하다"고 설명했습니다.

결국 그의 의도는 "관객들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싶다"는 것입니다.

"옛날 오페라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닌 현대적이고 새로운 맥락에서 충격과 신선함을 주고 싶다"고 이야기했습니다.

또한 이번 작품은 독일 베를린에 묻혔다가 23년 만에 고향 통영으로 돌아온 세계적인 작곡가 윤이상(1917~1995)의 여정과도 교차하는 측면이 있습니다.

트로이 전쟁 10년과 이후 10년, 총 20년의 고난 끝에 율리시스가 돌아오지만, 페넬로페는 남편을 알아보지 못합니다.

20년 전 작별인사를 나눈 남자와 너무도 달라졌기 때문입니다.

"통영에 돌아와 바다에 낚싯줄 던져놓고 온종일 통영 경관에 젖어 고향 냄새를 맡는 게 평생 꿈"이라던 윤이상도 '귀향'했지만, 이날 열린 추모식을 앞두고 음악당 주변에서는 유해 이장에 반대하는 시민 단체의 시위도 동시에 벌어졌습니다.

엥겔스는 "이번 작품이 윤이상의 여정을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이번 극에 윤이상의 삶을 투영시켜볼 수는 있다"며 "'고향'과 '귀향'의 의미, 나아가 '정체성'의 의미를 묻고 싶었다"고 설명했습니다.

그는 "20년 만에 만난 페넬로페와 율리시스가 예전 상태로 돌아가는 것은 불가능해 보이기도 하지만 이질적인 음악들은 만나고 새로운 '고향'과 '정체성'을 만들어낸다"며 "윤이상의 귀향도 단순히 유해가 돌아온 것이 아니라 보다 정신적이고 상징적인 개념으로 이해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사진=통영국제음악재단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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