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嶺路崎山虛苦不窮)
벼랑길 오솔길로 겨우겨우 지나가네
(危橋側棧細相通)
차가운 바람은 솔숲을 흔드는데
(長風馬立松聲裏)
길손들 종일토록 돌길을 오가네
(盡日行人石氣中)
- 다산 정약용, <겨울날 서울 가는 길에 새재를 넘으며(冬日領內赴京 踰鳥嶺作)〉
다산이 넘던 그 겨울날에도 사람들은, 그 험준한, 그것도 하얗게 얼어버린 새재를 이러 저러한 이유로, 또 저마다의 사연 하나씩을 봇짐에 매단 채로 그렇게 오고가고 했나보다. 그렇게 새재는 사연만큼이나 많은 발걸음들이 모여 '길'이 되었나 보다.
그날은 비가 내렸다.
봄비치고는 제법 굵은 빗줄기가 이른 봄날의 대지를 적시고 있었다. '이 비를 맞고 어디를 간단 말이고...' 탄식이 절로 나오는 그런 날이었다. 길을 묻는 내게 관광안내소의 분들도 '날도 안 좋은데예~ 우짜꼬~' 하며 위로를 건네던 그날, <새재 넘어 소조령길 1코스>인 <문경새재 과거길>을 걸었다.
소조령길은 영남대로 960리(里) 중 문경시, 괴산군 연풍면, 충주시 수안보면과 살미면, 달천동을 잇는 36km 남짓의 길이다. 그 길은 <문경새재길>, <소조령길>, <장고개길>이라는 3개의 코스로 이루어져있다. 길의 이름들에서 알 수 있듯이 그 옛날의 사람들은 이 고갯길을 넘어서 충청도로, 경기도로, 또 한양으로 가고 왔던 것이다.
봄 마중을 나온 빗줄기 너머로 산야를 가로지르는 기다란 성벽이 아스라하다. 이름하야 '영남제일관문'인 주흘관(主屹關). 주흘관은 문경새재의 첫 번째 관문이다. 길은 이곳에서 시작된다.
주흘관으로 향하는 길 위 커다란 댓돌에 새겨진 문경새재길의 다른 이름은 <문경새재 과거길>. 그 옛날 문경새재야 말로 과거를 보러 한양으로 향하던 선비들이 가장 많이 이용하던 길이라는 나름의 자부심이 음각으로 새겨진 커다란 이름 속에 단단하게 박혀 있는 듯하다.
그 시절, 한양과 부산(동래)를 연결하는 영남대로의 중추로는 추풍령, 죽령과 함께 문경새재가 있었다. 그중 과거를 보러가는 선비들에게 가장 인기 있는 길이 문경새재였다고 한다.
그런데 그 이유가 재밌다. 죽령으로 가면 죽죽 미끄러지고, 추풍령을 넘어가면 추풍낙엽처럼 떨어진다는 속설 때문이었다니, 지금으로 치면 나름의 징크스였던 셈이다. 반면에 문경새재의 문경(聞慶)은 '경사스러운 소식을 듣는다'는 의미를 담고 있었으니, 한 톨의 희망마저도 아쉬운 그들에게 문경새재는 입신양명(立身揚名)의 희망길이었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전라도에서 과거를 보러가는 이들 중에도 일부는 굳이 먼 길을 돌아 문경새재를 넘어 한양으로 갔다고 하니 그 열정이 새삼 가상할 따름이다.
하지만, 세월이 바뀌어 문경새재를 넘어 과거를 보러가던 이들이 뜸해지고 말았으니, 이유는 조선 중후반기로 접어들면서 숙종 때의 갑술환국(1694)과 영조 때의 이인좌의 난(1728)으로 인해 영남지역 선비들의 중앙정치 참여 기회가 막혀버리고 말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오랜 기간 영남지방에서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갈 일도 드물었던 것이다.
숙종에 의해 장희빈이 사사된 갑술환국을 통해 남인들은 정권을 잃었고, 게다가 영조 때 일어났던 이인좌의 난에 영남남인들을 포함한 남인들이 가담한 것이 발각되어 영남지방 선비의 중앙 정계 진출은 사실상 막혀 버리고 말았던 것이다.
조흘관 너머의 산 위로 운무가 가득한 것이 심상치 않은 여정이 될 것임을 예고하고 있다. 성벽 아래를 지나는 개울의 물살이 거세다.
< 문경새재 과거길>은 이곳 조흘관을 기점으로 제1관문, 제2관문, 제3관문과, 조령산휴양림을 지나 충북 괴산군 영역인 고사리 마을까지 이어진다. 길은 널찍하고 또 완만하다. 그런 이유로 길은 아기자기한 맛은 덜 하지만 걷기에는 아무런 부담이 없다. 편안한 마음으로 소요하듯 걸으면 될 일이다. 마침 신작로 옆으로 '옛길'이란 이름을 달고 오솔길이 군데군데 더불어 이어져 있으니, 오래된 길이 주는 깊은 맛을 느끼고자 하는 이는 옛길을 걸어볼 일이다.
얼마 걷지 않아서부터 오가는 이가 거의 없는 산길임에도 산 가득 메아리치는 소음이 예사롭지가 않다. 부서지듯 와글대는 소리들... 이른 새벽부터 내린 봄비에 반색해 계곡을 우당탕쿵쾅 헤치며 내려오는 계곡물의 아우성이었다. 떨어지고 구르고, 또 서로가 부딪치며 부서지고 또 토해내는 소리들이 계곡을 지나 산을 휘감아 돌고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성미 급한 물줄기는 폭포가 되어 곤두박질치듯 산 아래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으니 그 소리가 홍두깨 두드리는 소리처럼 요란하다.
그러다 문득 드는 의문 하나! 그런데 문경새재의 '새재'는 무슨 뜻?
알아본즉슨, 새재의 어원이나 유래에 대해 여러 의견이 분분하다는 사실이다. 고갯길이 너무 높아 '새도 넘기 힘든 고개'라는 데서 유래했다고도 하고, 하늘재와 이화령 사이의 고갯길을 의미하는 '새(사이)재'에서 연유했다는 주장도 있고, 한편으로는 하늘재(*하늘재는 삼국시대 이래 백두대간을 넘는 최초의 길이었다.)를 대신하여 '새로' 만들어진 고개라는 뜻에서 '새재'가 되었다고도 한다. 무엇이 되었건, 중요한 것은 지금은 조령(鳥嶺)이라는 이름을 얻었으니 새처럼 훨훨 날아 고개를 넘으면 될 일이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빗줄기가 조금씩 가늘어지는 느낌이다. 하지만 이내 그칠 것 같지도 않다. 어쩔 수 없이 오늘의 길에는 물이 풍년임을 인정하여야 하나 보다. 하늘에서도 땅에서도 그렇다. 그렇게 나뭇가지며 메말라버린 지 오래인 나뭇잎 가득 매달려 있는 빗방울이 차라리 아련하다.
옛길로 접어든다. 잠시 계곡을 떠난 길은 제법 산길의 맛과 풍취를 지니고 있다. 이제야 제대로 걸을만한 길을 만난 느낌이다. 오래 된 길이 지니는 깊은 맛이 느껴진다고나 할까. 걷기가 극기의 수단이 아니라면 아기자기하면서도 어느 정도의 굴곡이 있는 길을 걷는 것이 걷는 이에게는 더욱 풍성한 느낌을 갖게 한다. 그런 길에는 더 많은 이야기가 숨어 있을 듯도 싶고, 마음은 더 편안하고 또 넉넉해진다.
물론 같은 풍경 앞에 서 있다 할지라도 모두가 같은 것을 보는 건 아니다. 누구에게는 아늑하고 고즈넉한 분위기가 누군가에게는 불편함이나 어려움이 될 수도 있지 않겠는가. 무엇을, 또 어떻게 볼 것인가 하는 문제에서도 보는 이의 관점에 따라 각자의 눈과 마음에 들어오는 풍경도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어떤 길이 딱히 좋은 길이라고 우기는 것도 아집이고 독선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내 경우에는 그렇다는 말이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옛길을 걷겠다는 의욕이 넘쳤는지 길이 산으로 가고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씩씩하게 걸었다. "그래! 길은 말이야 이 정도는 돼야 걸을만하지... 지금까지 걸은 길은 너무 밋밋했어." 나름 기대했던 길을 만난 양 비 맞은 뭣처럼 중얼대며 산으로 올라갔다. 사실 산이라기보다는 길이 이어져 있었으니 당연히 길을 따라 올라갔던 것이다. 그런데 "길 맞아?" 의문이 생긴다.
아! 그 통증이라니... 보는 눈이 있었더라면 그 창피도 예사롭지 않았겠지만, 다행이도 보는 눈이 없는 산중턱의 외딴 길이었던지라, 감당해야하는 건 삐끗한 허리와 정통으로 부딪힌 팔꿈치의 아픔이었다.
비비적대며 자세를 바로 하고는 카메라를 확인하고 몸을 살폈다. 다행스럽게도 허리가 시큰한 것과 팔꿈치가 까진 것을 빼고는 큰 문제가 없는 듯했다.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그래서 허세 쩔게(?) 크게 한번 웃어주고는, 다시 올라갔다. 오기 같은 것이 생겨났기 때문이다.
나 역시 새 기분과 헌 기분의 교대식이 필요했다.
정신을 차리자, 교귀정을 지척에 두고 큰 물줄기의 아우성이 요란하다. 무심코 지나치려고 해도 지나칠 수가 없다. 용추(龍湫)폭포다. 너른 반석은 억겁의 세월 동안 물살에 할퀴고 닳아 기어이 물살에게 길을 내주어, 물살은 서로의 어깨를 걸고 기합 소리도 요란하게 떨어져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나도 영웅(?)이 되고 싶었다. 그런 이유로 최소한(?) 엎어지고 자빠져도 가던 길은 마저 가야 했다. 아직도 길은 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