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미륵보살상이 국보로 승격된다는 소식에 20여 년 만에 다시 찾았습니다. 일주문과 천왕문, 비탈길 따라 다시 석문을 통과하자 불쑥 눈앞에 나타납니다. 높이 18.12m, 건물 6층 높이 국내 최대 석불입니다. 그런데 기억 속의 크기보다는 좀 작습니다. 너무 오랜 세월 고층 건물에 갇혀 살았나 봅니다.
이 미륵보살상엔 단골로 따라다니는 표현이 많습니다. '투박하다' '비례가 안 맞는다' '기이한 생김새''… 잘 봐줘도 그저 '토속적' '소박하다'는 정도죠. 한마디로 못났다는 얘기입니다. 하긴 200년 앞서 만들어진 통일신라시대 불상과 견줘 보면 꼭 견습공 작품처럼 엉성해 보입니다.
이런 평가를 사찰 측은 어떻게 받아들일까요? 혜광 주지스님의 이야기입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처음엔 2등신으로 보이더니, 머리 위 보관 부분을 빼니 그럭저럭 비율이 맞습니다. 투박하다고요? 물론 투박하죠.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듭니다. 불상이 투박하면 안 되나요? 꼭 잘 생겨야만 하나요?
많은 절, 많은 박물관에 가봤지만 솔직히 기억나는 불상이 몇 점 없습니다. 석굴암 석가모니불을 포함해 손으로 꼽을 정도입니다. 잘 아는 미륵 반가사유상만 해도 국보 78호, 83호를 나란히 놓으면 당장 헷갈립니다. 내가 본 불상이 어느 쪽이지?
그럼 왜 논산이었을까요? 논산은 백제 멸망의 아픔을 고스란히 간직한 땅입니다. 660년 계백의 5천 결사대가 이 일대 황산벌에서 비장한 최후를 맞았고, 백제를 다시 일으키려던 견훤 또한 왕건에게 무릎을 꿇었습니다. 백제 유민들의 정서를 너무 잘 알았던 왕건은 개태사라는 대규모 사찰을 지었고, 광종도 관촉사를 선택한 것입니다. (물론 <관촉사 사적비>에는 한 여인이 이곳에서 큰 돌이 솟아난 것을 발견하고 관아에 신고해 불상을 세웠다는 전설이 기록돼 있습니다만).
주인이 밖에 서 있기에 여느 절과는 달리 미륵전이 텅 비어 있습니다. 이곳에서 마을 쪽을 내려보노라면 당시 일꾼들이 얼마나 고생했을까 하는 아련한 생각이 듭니다. 보개 부분, 상반신, 하반신 이렇게 세 조각으로 만든 불상을 옮기는 데에 몇 년, 이를 절까지 올리는 데에 다시 몇 년이 걸렸을 겁니다. 불상이 너무 무거웠기에 겨울철 길에 물을 뿌려 얼린 뒤 미끄럼을 태워 날랐을 것이라는 추정도 있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건 이 불상이 원래 미륵보살이 아니라 관음보살이었다는 점입니다. 지금은 뜯겨나갔지만 화관에 관음보살의 스승인 아미타불이 새겨져 있었고, 오른손에 연꽃 가지를 들고 있는 것만 봐도 영락없는 관음보살입니다. 수인이라 부르는 손가락 모양 역시 '중생중품'을 하고 있습니다.
관촉사에 미륵보살상이 출현한 것을 전후해 인근 대조사를 비롯해 충남 논산과 홍성, 호남 지방, 경기도 남부에는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로 수많은 미륵보살상들이 세워집니다. 모양이 서로 비슷비슷한 것을 보면 관촉사 석상을 제작 표준으로 삼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지역 형편에 따라 바위에 새기기도 하고, 자그마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유행처럼 번져나갔습니다.
아, 그런데 시기가 문제였습니다. 56억 7천만 년이라는 상상할 수도 없는 세월을 기다려야 된다는 겁니다. 민초들은 빌고 또 빌었습니다. 제발 그 시기를 당겨달라고, 당장 내려오시라고. 이런 염원이 모이고 모여서 미륵불상이 만들어졌습니다. 관음보살조차 미륵보살로 여겼습니다. 못난 미륵보살의 얼굴은 바로 민초들이 마음속에 그려온 구세주의 얼굴이었습니다. 어떤가요? 아직도 관촉사 미륵보살이 못난이로 보이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