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전두환회고록 1권 p.394
● 차량 돌진·방송국 방화 → 20사단 증파 지시?
전두환회고록에 따르면, 1980년 5월 18일 이희성 계엄사령관은 향토사단인 31사단과 이미 파견돼 있던 7여단 2개 대대 병력만으로는 소요 진압이 어렵다고 판단해, 특전사 11여단 병력도 광주로 출동하도록 명령합니다. 그러다 5월 20일에는 시위 군중의 수가 10만을 넘어가고, 차량 돌진으로 계엄군이 숨진 데다, 방송국 방화까지 일어나 20사단 증파를 지시했다는 게 회고록에 실린 내용입니다.
20일 밤 광주 시민이 탔던 차량이 돌진해 계엄군 사망자가 발생한 것은 사실이고, 시민이 방송국을 방화한 것도 사실입니다. 그런데 회고록에는 이런 사건들이 '원인'이고 그 '결과'로 이희성 계엄사령관이 20사단 증파를 지시한 것처럼 서술되어 있습니다. 계엄군이 20사단 증파를 결정한 것은 도를 넘어선 시위 때문이라는 취지입니다. 20사단 증파가 정당해 보이도록 썼습니다.
전두환 씨는 두 사안이 원인과 결과인 것처럼 주장하고 있고, 5·18재단 측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하고 있습니다. 법원은 전두환회고록에 대한 출판·배포 금지 가처분 사건에서 이 쟁점도 다루고 있습니다.
● 전두환 씨의 근거 "계엄사령관이 그렇게 말했다"
전두환 씨 측이 제시한 근거는, 1995년 검찰의 5·18 관련 사건 수사에서 이희성 前 계엄사령관이 그렇게 말했다는 겁니다.
문: 5.20의 광주 상황은 어떠했으며 그에 대해 어떤 조치를 취했는가요.
답: 시위 군중의 수가 10만을 넘어가고 차량시위로 인해 군 병력이 위협을 받게 되었으며 방송국 등에 방화를 하는 등 시위가 극심해지고 다른 지역에는 시위가 없어 20사단을 증파하도록 하였습니다.
문: 당시 서울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20사단을 증파한 이유는 무엇인가요.
답: 위에서 진술한 바와 같이 가용병력이 20사단밖에 없었습니다."
- 이희성에 대한 피의자 신문조서(1995)
이희성 씨는 위와 같이 진술했지만, 검찰은 1995년 수사 결과를 발표할 당시 차량 돌진과 방송국 방화, 20사단 증파 지시의 선후 관계를 구체적으로 명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전두환 씨는 이희성 前 계엄사령관의 진술을 근거로 차량 돌진과 방송국 방화를 '원인', 20사단 증파 지시를 '결과'인 것처럼 썼습니다. 전두환 씨 측은 회고록의 해당 내용에 대해 "글의 내용은 원 진술자(이희성)의 진술을 토대로 작성한 글로서 모두 진실에 부합하는 내용"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 '5월 20일 밤' 관련 문건을 뒤져 보니…
① 시위대 차량 돌진 및 계엄군 사망 시각
- 5월 20일 밤엔 시위대 차량에 계엄군과 경찰이 숨졌습니다. 전두환회고록은 '계엄군'이 숨지면서 20사단 증파를 지시했다고 했는데, 계엄군이 사고를 당한 시각에 대한 기록은 이렇습니다. 1995년 당시 계엄군 정찰중대장에 대한 검찰 진술조서를 보면 "22:00경 11톤 트럭 1대가 … 전복되는 바람에 그 자리에 있던 대대장 운전병 정관철 중사가 차에 깔려 압사한 일이 있었습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계엄군이 숨진 시간은 밤 10시입니다.
- 5·18 역사를 기록한 '죽음을 넘어 시대의 어둠을 넘어' 단행본에도 계엄군 사고 얘기가 나오는데, " 밤 10시가 약간 지난 시각, 5·18 기간 중 최초로 사망한 계엄군이었다"라고 되어 있습니다. 검찰 진술조서에 남아있는 시간과 비슷합니다.
- 계엄군 말고 경찰관이 숨진 시간도 확인했습니다. 전남지방경찰청의 지난해 5·18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5월 20일 시위대 버스 1대가 노동청 앞 저지선을 뚫고 진입해 함평경찰서 경찰 4명이 숨졌다고 되어 있습니다. 발생 시간은 밤 9시입니다. 출처는 80년 당시 전남경찰국의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상황' 문건입니다. (참고로 이 사건 당시 운전자는 군법회의를 거쳐 1981년 사형이 확정됐지만, 1998년 재심 법원에서 헌정질서 파괴 범죄에 저항한 정당한 행위로 인정돼 무죄가 선고됐습니다.)
② MBC 방화 시각
- 1995년 검찰의 5·18 관련 사건 수사 결과에 따르면, MBC가 불길에 휩싸인 시각은 밤 9시45분입니다. "19:45경 문화방송국 앞에 모인 5천여 명의 시위대는 방송사에 저녁 8시 뉴스 시간에 광주 상황을 보도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보도가 되지 아니하자, 20:30경 방송국 건물에 화염병을 던졌고, 방송사 직원들은 셔터를 내리고 소화기로 진화하고, 31사단 96연대 1대대 소속 경계 병력도 소화탄을 던지면서 진화를 계속하였으나, 21:45경 문화방송국 건물은 화염에 휩싸이기 시작하였고, 경계 병력은 후문을 통해 전남도청으로 철수하였음."
- '1980년대 민주화운동'(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 1987)에 따르면, MBC 방화 시각이 명시돼 있지는 않지만 밤 9시 이후인 것을 알 수 있습니다. "9시경 MBC도 방송을 중단하고 모든 사원 퇴근시킴. MBC 주위 경비를 맡고 있던 31사단 계엄병력 철수. 시민들 올라가 방송 시도했으나 이미 기계는 작동 않음. 시위대의 분노는 극에 달해 MBC 방화. 폭음, 불기둥이 하늘로 치솟음."
- 1980년 당시 전남도경이 작성한 '치안질서 회복을 위한 경찰의 조치'에 따르면, MBC 방화 시각은 밤 9시 40분입니다. 전남도경이 작성한 다른 자료 '집단사태 발생 및 조치사항' 문건에도 밤 9시 40분으로 되어 있습니다.
- 1980년 당시 제20사단 '전투상보'에 따르면 1개 연대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밤 8시, 사단 병력 투입 지시를 접수한 시각이 밤 8시30분으로 기록돼 있습니다.
- 1980년 당시 20사단 사단장이었던 故 박준병 씨는 1988년 민정당 사무총장 당시 '신동아'와 인터뷰를 합니다. 그의 증언입니다. "사태 초기에는 잘 몰랐어요. 그런데 5월20일 저녁 친구와 부대 밖에서 만나 식사를 하고 있는데, 부관이 부대로 빨리 돌아와 육본으로 전화하라는 연락이 왔다고 합디다. 8시40분경 부대에서 참모차장께 전화를 했더니 즉시 1개 연대를 광주로 보내 CAC(전투교육사령부) 사령관의 작전통제를 받으라고 하더군요." 군이 20사단 투입을 결정한 시간은 밤 8시 40분 이전이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밤 8시~8시40분 20사단, 병력 투입 지시 접수
밤 9시~9시20분 시위대 차량에 경찰관 사망
밤 9시~9시45분 MBC 방화
밤 10시 시위대 차량에 계엄군 사망
두 사건과 무관하게 군은 20사단 증파를 결정했습니다. 전두환 씨 측은 진압 작전에 계엄군을 투입한 것도 경찰이 요청해서 그런 것이라고 회고록에서 주장하고 있는데, 경찰에 책임을 미룬 것처럼, 20사단 증파도 시위대에 일부 책임을 돌리고 싶어 하는 것 같습니다.
전두환 씨는 회고록에서 계엄사령부가 20사단 병력의 광주 출동을 명령한 시간은 밤 10시 30분이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당시 20사단장이었던 박준병 씨도 밤 8시 40분 전에 20사단을 투입하라고 연락받았다고 했으니까, 앞뒤가 맞지 않습니다. 취재진은 계엄사가 밤 10시 30분에 20사단 출동을 명령했다는 문건은 확인하지 못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근거는 전두환 씨 측이 제시해야 합니다.
(자료조사: 서도영)
※ 본 기획물은 한국언론학회-SNU 팩트체크 센터의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