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매매는커녕 문의 연락조차 오지 않았다. 부동산중개소에 물어봤더니 매기가 전혀 없다는 거다. 잊을 만하면 가끔 전화가 오기는 오는데 시세보다 훨씬 낮춰서 내놓을 생각 없느냐는 실망스런 내용들뿐이었다. 기다리다 파는 거 포기하고 전세 주고 전셋집으로 옮겼다.
그랬는데…요즘 박 씨는 수시로 부동산중개소에서 오는 전화와 문자 받는 재미로 살고 있다. 아파트 사겠다는 사람이 나타났다며 계약하자는 연락이 줄을 잇고 있어서다. 박 씨는 맘속에 정한 가격이 있어 좀 더 두고 보겠다며 일단 거절했다. 시간이 지나면서 사겠다는 가격은 점점 올랐다. 박 씨가 맘에 정한, 그 정도면 팔겠다는 가격이 이미 넘어갔는데도 아파트를 팔지 못했다. 앞으로도 한 참 더 오를 것 같았기 때문이다.
한술 더 떠 빚에 빚을 내서라도 인근의 노후 아파트를 그때 한 채 더 사둘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재건축이 기대되는 그 아파트는 낡은 30평인데도 자신의 새 50평 아파트보다 지금은 훨씬 더 가격이 높아져 버렸다. 박 씨는 뭔가 손해 보고 뒤처지고 있다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가 없었다.
한 친구가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이러다가 강남 지역 아파트값이 노무현 정부 때보다 더 오를 것 같지 않은가?" 문재인 정부가 강남 부동산 가격을 잡으려고 대책을 잇따라 내놓고 있지만 그럴수록 강남 지역은 더 과열되고 지방은 냉각되는 역설이 벌어지고 있는 것을 언급한 것이다. 노무현 정부 때의 이른바 '강남 불패론'이 다시 살아나고 있다는 건데 이 와중에 나만 기회를 놓치고 있는 것 아닌가 하는 묘한 공감대가 형성되는 분위기가 됐다. 평소 부동산에 대한 전문적 식견을 자랑하는 다른 친구는 나름 상황을 이렇게 규정했다.
"퇴직한 세대들이 융자받고 빚내서 강남 아파트 투자에 나섰다는데…서초 강남 지역을 향한 노바디(Nobody)들의 반란이야……"
은퇴를 앞둔 세대들이 직장을 그만둔 뒤 소득 감소에 대비해 부채를 정리하는 과정이 발생하고 이 과정에서 부동산 자산의 매각이 예상됐지만 한국은행 금융안정보고서에 따르면 5·60대의 부동산 구매는 오히려 더 증가한 것으로 나타났다. 은퇴를 앞두거나 이미 은퇴한 세대들을 대상으로 한 조사들을 보면 이들의 부동산과 주식 투자는 최근 2배로 늘었다는 통계도 있다.
이렇게 인생 2막을 위한 공격적 투자에 나선 은퇴세대를 지칭하는 '육식세대'라는 새로운 표현까지 등장했다. 일이나 재테크에 큰 의욕이 없는 일본 청년층을 '초식세대'라고 부르는 것을 빗댄 말이다. 은퇴 세대들이 보이고 있는 '투자의 육식성'을 들여다보면 이들이 과거 현직에 있을 때 겪은 고도의 경제 성장기 경험과 그에 따라 축적한 자본을 어느 정도 가지고 있다는 게 밑바탕으로 깔려있다. 가뜩이나 복잡한 강남 부동산 시장은 본격적인 은퇴 시기에 접어든 베이비부머 세대의 육식성 투자 경향과 맞물려 규제와 통제를 비켜 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