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생들이 입은 저고리는 짧게 올라오고 소매 폭이 좁습니다. 18세기 복장입니다. 가운데 여성이 머리에 쓰고 있는 것도 남바위입니다. 그림에는 잘 나타나지 않지만 여성들은 산호 구슬과 분홍색 술로 장식했다고 합니다.
목화는 삼베와는 달리 따뜻한 삼남 지방에서만 재배되는 까다로운 작물이었습니다. 조선에 들어와 세종과 성종이 목화를 이북 지방에까지 재배하도록 장려했지만 크게 성공한 것 같지는 않습니다.
<조선왕조실록> 성종 10년(1479년) 11월 19일 기록을 보면 대사간 박안성 등이 "평안도 백성들은 한 사람도 솜옷을 입은 이가 없는 실정"이라며 "병졸들을 강제로 내보내어 눈을 무릅쓰고 정벌케 나가게 하는 것은 온당치 않다"고 왕에게 고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또 중종 20년(1525년)에는 함경북도 병사 이기가 "길주 명천 경성 등 지역에 11월 8일부터 11일까지 4~5자씩이나 쌓이는 큰 눈이 내려 경성에서만 얼어 죽은 사람이 무려 1백여 명이나 되었다"는 내용의 장계를 올리기도 했습니다.
이런 일이 북쪽 지방에 국한된 이야기였을까요? 동사하는 일은 수도인 한양에서도 종종 벌어졌습니다. 연산군 4년(1498년) 기록을 보면 "숭례문 밖에서 얼어 죽은 사람이 있사오니 산판을 오르내리면 어찌 얼어 죽은 자가 없사오리까"라면서 밤 사냥을 중단해달라고 간하는 대목이 나옵니다.
170여 년 후인 현종 11년에도 관리들이 "한양 성 안에 도로에서 얼어 죽은 자가 많다"며 왕에게 고하니 "의지할 데가 없어 얼어 죽게 된 자에게는 유의나 옷감을 지급하라"고 지시하기도 합니다. 실록 곳곳에는 영화 '남한산성'에서 나오듯이 "수직하는 병사나 죄수들이 얼어 죽지 않도록 빈 가마니를 지급하라"는 왕의 지시가 실려 있습니다.
▲ 나주 샛골나이 (무형문화재 제28호)
다시 의문이 듭니다. 당시 솜옷 가격은 어느 정도였을까요? 평민들도 감당할 만한 가격이었을까요?
풍속화가 그렇듯이 실록을 비롯한 대부분 기록들도 관리나 양반들 시각에서 쓴 것이어서 서민들의 삶을 직접 묘사한 부분은 찾기가 어렵습니다. 겨우 찾아낸 자료를 통해 추론해 보죠.
전북 고창 출신의 18세기 학자 황윤석(1729~1791)은 자신이 10살부터 63살 죽을 때까지 보고, 듣고, 경험한 것을 <이재난고>라는 일기로 남겼는데요. 여기에 무명 옷감 사이에 솜을 넣어서 누빈, 오늘날 패딩에 해당하는 '누비 솜옷' 가격이 나옵니다. 양반이 입던 고급 누비솜옷은 상평통보 4냥, 평민이 입던 속칭 'B급 누비솜옷'은 2냥을 주고 샀다고 기록돼 있습니다.
'B급 누비 솜옷 2냥'의 가치는 오늘날 원화로 얼마나 될까요? 쌀값을 매개로 추정해 봅니다.
당시 조선 정부가 정한 쌀 가격은 1섬(약 144kg)에 5냥이었습니다. 지난해 3월 우리 통계청이 발표한 20kg짜리 쌀 현지 가격은 3만 2천 원입니다. 1섬 가격으로 환산하면 23만 400원인 거죠. 당시와 오늘날 쌀 가치가 같다고 가정할 경우, 쌀 1섬=5냥=23만 400원인 셈입니다. 즉 상평통보 1냥은 원화로 4만 6천 80원 정도인 겁니다.
이렇듯 서민들이 'B급 누비 솜옷' 1벌을 사려면 2냥, 오늘날 원화로 9만 2천 160원이라는 적지 않은 돈이 필요했습니다. <이재난고>에서 머슴의 한달 월급이 7냥 정도라 했으니, 8일 하고도 반나절을 죽어라 일해야 겨우 살 수 있었습니다. 하루하루 끼니를 걱정해야 할 평민들로선 막사서 입기에는 많이 비쌌다는 얘기입니다. 그래서 어찌 어찌해서 솜옷 한 벌을 구해도 다 해질 때까지 기워가며 버티거나 자식, 형제들에게 물려 주는 일이 다반사였습니다.
뭔가 낭만스러워 보이던 조선 시대의 겨울 환상이 깨지나요? 그 어느 때보다 혹독한 겨울입니다. 속옷에 티셔츠 몇 겹, 다시 종아리까지 내려오는 두툼한 롱패딩으로 무장해도 매서운 바람을 막아 내기가 어렵습니다. "배 부르고 등 따시면 최고"라고 했던 조선 서민들의 고통을 생각해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