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기를 내서 내부를 엿봅니다. 벽면을 죽 둘러가며 무신도들이 걸려 있습니다. 정면에 9점, 좌우에 3점씩입니다. 나중에 <한국민속신앙사전>을 찾아보니 현재 21점이 전해진다고 합니다, 이성계를 그린 아태조(我太祖), 무학대사, 최영 장군, 나옹선사처럼 무속에서 신으로 떠받드는 고려 말, 조선 초 인물들입니다. 모두 국가민속문화재로 지정된 어엿한 문화재들입니다.
호랑이를 올라타고 앉아 오른손에 깃털 부채를 든 노인 그림이 눈에 들어옵니다. 딱 봐도 산신령입니다. 도교적인 분위기를 풍기지만 누구나 아는 ‘금도끼 은도끼’ 설화에 나오는 산신령과 많이 닮았습니다.
대표적인 여산신은 정견모주(正見母主) 입니다. 가야산을 지킨다는 산신으로, <동국여지승람>은 “정견모주가 대가야의 시조 아진아고왕과 금관가야의 시조 김수로왕을 낳았다”는 전설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합천 해인사의 국사단에는 지금도 정견모주를 모신 산신도가 걸려 있습니다. 신비한 분위기를 자아내는 후덕한 인상입니다.
고려 왕조 역시 전국 명산에 제단을 만들어 치성을 드렸습니다. 특히 시조인 왕건이 여산신인 평나산 성모의 후손이라고 기록한 것 등을 보면 여산신 숭배가 이 때까지도 이어진 것으로 추정됩니다.
재미있는 사실은 단군이나 석탈해처럼 남성이 산신이 된 경우도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사후에 벌어진 일이고, 여산신은 애초부터 산신이었다는 점입니다. 아마 원시 모계 사회의 풍습이 강하게 남아 있었기 때문일 것입니다. 각 왕조들이 한결같이 자신의 모계가 산신이라고 주장한 것은 이런 민초들의 여산신 신앙을 정권의 정통성 강화에 이용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렇다면 그 많던 여산신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요? 남아 있는 산신도는 거의 다 조선 후기 작품이기 때문에 이를 분석해 그 시기를 밝혀내긴 어렵습니다. 민속학자들은 대체로 가부장적인 유교의 확산과 관련이 있다고 설명합니다. 남성 중심의 가치관이 지배하면서 많은 여산신들이 사라지거나 할아버지로 대체됐다는 이야기입니다.
구체적인 시기에 관해서는 의견이 엇갈립니다. <한국민속신앙사전>에는 “고려로 오면서 산신의 성은 대부분 남성으로 바뀐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산신이 남성으로 바뀌면서 개성 덕물산, 나주 금성산에서는 산신에게 처녀를 바치는 풍습까지 생겨났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조선 중. 후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좀 더 많은 것 같습니다. 조선 초기만 해도 여성의 지위가 그리 낮지 않았다는 점이 주요 근거입니다. 국립민속박물관 김창호 학예사는 “조선 중기에 ‘음사’라고 핍박을 받던 무속이 사찰 안에 ‘산신각’의 형태로 불교와 융합하게 된다”면서 “산신의 신격이 바뀌었다면 그 시기쯤으로 추정된다”고 말했습니다.
지은 죄가 많아서 그런가요? 저는 최근까지도 인왕산 국사당이든, 사찰의 산신각이든, 천왕문이든 뭔가 요란한 그림이나 조각상을 모셔둔 장소를 갈 때면 좀 으스스한 느낌을 갖곤 했습니다. 마음 속에 쌓아둔 편견도 한 몫 했을 겁니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최근 <저승사자>에 이어 <산신령>을 취재하면서 온갖 종류의 귀신, 신장, 산신, 무신을 그린 문화재들을 접하면서 이런 공포심이 싹 사라지더군요. 어쩌면 너무 몰라서 무서웠는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