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우 이병헌은 시나리오를 읽을 때 최대한 머릿속을 백지상태로 놓는다고 했다. 제작사는 물론 감독과 호흡을 맞추게 될 배우에 대한 그 어떤 사전정보나 선입견도 없이 읽기 시작해 이야기의 재미와 감정만을 파악한다고 했다.
2015년 '내부자들'(감독 우민호)로 국내 시상식 남우주연상 그랜드 슬램을 달성한 이병헌은 차기작 두 편 모두 신인 감독의 시나리오를 골랐다.
'싱글라이더'와 '그것만이 내 세상', 두 영화 모두 연출 데뷔작이었기에 감독의 연출력과 글발을 전작이라는 잣대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병헌은 그저 이야기의 재미와 개인의 촉에 기대 이 작품들을 골랐다. 어떤 식으로든 자신만의 감별법과 검증법이 가동됐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적어도 그 요소에 있어 선입견은 배제됐다.
"시나리오는 좋은데, 감독이 신인이라면 고민스러워지는 게 사실이에요. 내가 대본을 읽으며 그리고 느꼈던 그림과 정서 이상이 나올까 아니면 전혀 다른 것이 나올까에 대한 고민을 하게 되거든요. 그러다가도 '에이 이야기가 좋으니까!'하고 선택을 해요. 일단 선택을 하고 나면 그 이후부터는 선장(감독)의 말을 따르고 그의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편이에요. 배우가 작품에 개입을 많이 하게 되면 어떤 색깔도 제대로 뽑아내지 못하는 상황이 생길 수 있으니까요. 영화가 끝날 때까지는 감독이 자신만의 세계를 펼칠 수 있게끔 조력하며 작업을 해나가요."
이병헌이 시나리오를 읽으며 받은 느낌과 달리 완성된 영화는 누가 봐도 JK풍 가족 드라마다. 보편적인 정서의 가족애를 예상 가능한 이야기에 녹여내고, 웃음과 울음이라는 MSG를 뿌렸다. 흔하고 뻔하다는 게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하지만 관객들에게 이런 영화는 너무 익숙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연기 하나는 기가 막힌 이병헌이 나오고, 탁월한 재능을 펼치는 젊은 피 박정민, 관록의 배우 윤여정이 나온다는데 뭔가 특별한 것을 기대하기 마련인 게 관객의 심리다.
어쩌면 이병헌은 '내부자들'과 '남한산성'과 같은 진하고 향이 깊은 코냑 같은 영화를 연거푸 작업했기에, 인공 향은 나지만 부담 없이 술술 마실 수 있는 과일 소주 같은 영화를 하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이 비범한 배우는 과일 소주도 안동 소주로 둔갑시키는 연기 내공을 발휘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많은 부분에서 이병헌과 박정민의 탁월한 연기력의 덕을 보고 있다. 몇몇 뚜렷한 단점을 두 배우의 열연이라는 확실한 장점으로 보완하는 영화다.
이병헌은 이번 영화에서 과거 WBC 웰터급 동양 챔피언이었지만 지금은 오갈 데 없는 전직 복서 '조하'로 분했다. 우연히 17년간 헤어져 지냈던 엄마 인숙(윤여정)과 재회하고 신세를 지게 된다. 조하는 엄마의 집에서 듣지도 보지도 못했던 동생 진태(박정민)와 마주한다. 오랫동안 떨어져 지내던 세 가족이 한 집에 살며 상처를 회복해나가는 과정이 유쾌하게 그려진다.
이병헌은 조하라는 인물이 가진 쓸쓸함의 정서가 좋았고, 그것만은 제대로 표현하려고 했다고 말했다.
"얼핏 봐서는 동네 양아치가 좋게 변화하는 영화인가라고 예상할 수도 있는데 조하가 처음부터 끝까지 순수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설정이 좋았어요. 보통은 삐뚤어진 사람이 개과천선하는 식의 흐름으로 흘러가잖아요. 실제 주변에서 운동하는 사람들을 봐도 어린애처럼 순수한 사람이 많거든요. 그 와중에 조하에게는 어딘지 모를 쓸쓸함의 정서가 배어 있어요. "
가장 좋아하는 신으로 엄마의 비밀을 알게 된 후 자신의 속내를 토로하는 조하의 모습을 담은 장면을 꼽았다.
조하의 엄마로 분한 배우는 윤여정이다. 이병헌은 윤여정과 처음으로 호흡을 맞췄다. 자신과는 조금 다른 연기 스타일에 놀라움과 존경심을 갖게 됐다고 말했다.
"배우마다 스타일이 다른데 윤여정 선생님은 정말 모니터링을 잘 안보시더라고요. "선생님 모니터 안하세요?"라고 물으면 "야, 네가 내 것까지 보고와" 하셨어요. 그 이유가 궁금해서 여쭸더니 "난 내가 연기한 거 (부끄러워서) 못 보겠더라" 하시더라고요. 저도 예전에는 꼬박꼬박하는 편이었는데 요즘은 안 그러는 편이에요. 어차피 봐도 나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없으니까요."
이병헌은 이번 영화를 하면서 신선한 자극을 얻었다. 바로 박정민이라는 배우가 준 성실과 열정의 자극이다. 자신보다 한참 어린 배우지만 후배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고. 이병헌은 제작보고회에서도 "박정민의 연기에 내가 묻어갔다"고 말 할 정도로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영화가 공개된 직후 "진부하고 뻔한 영화를 이병헌, 박정민이 살렸다"는 반응이 나오기도 했다. 이에 대해 이병헌은 "뜨거운 물과 차가운 물을 따로 마시는 느낌"이라고 짧게 반응했다.
'그것만이 내 세상'은 따뜻한 감동을 내세운 가족 드라마지만, 이병헌의 개인기로 만들어내는 청량한 웃음의 지분이 상당한 영화기도 하다. 며칠간 연습에 연습을 거듭해 완성한 브레이크 댄스 장면, 보는 사람을 배고프게 만드는 먹방 연기 등 종전의 카리스마 넘치는 연기와는 또 다른 볼거리를 제공하며 관객을 만족시킨다.
"코미디 영화를 할 때만 받을 수 있는 기쁨이라면 관객들의 반응을 체감할 수 있다는 거예요. '남한산성'이나 '싱글라이더' 같은 영화를 보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는 관객들의 후기를 많이 봤어요. 그런데 그 감동이라는 것은 관객의 가슴속에서 일어나는 반응이라 밖으로 드러나는 것은 아니잖아요. 반면 코미디 영화는 관객의 웃음으로 그 반응을 느낄 수가 있어요. 그래서 이런 즉각 반응이 나오는 장르의 영화들은 개봉 후에도 극장에 자주 가는 편이에요. 관객들의 쏟아내는 반응을 느끼며 행복감을 찾으려고요. "
<사진 = CJ 엔터테인먼트 제공>
(SBS funE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