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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베 총리가 노조위원장? '관제춘투(官製春鬪)'를 하는 까닭은?

[취재파일] 아베 총리가 노조위원장? '관제춘투(官製春鬪)'를 하는 까닭은?
지난 5일 일본 경제계 3개 단체의 신년 축하회에 참석한 아베 신조 총리가 올해 봄 노사교섭에서 3%의 임금 인상을 요구했습니다. 무언가 이상하죠? 노조 대표가 아닌 총리가 임금인상을 요구하다니요? 우리에게 낯설지만, 이런 상황은 일본에선 벌써 5년째 해마다 계속되고 있습니다. 일본 언론은 '정부가 주도하는 임금투쟁'이라는 의미에서 '관제춘투(官製春鬪)'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정상'은 아니라는 의미에서, 야유하고 있는 셈이죠.
 
● '아베노믹스'의 핵심 고리 '임금인상'…아베 "나는 경제정책은 진보"

아베 총리는 왜 직접 나서서 기업에 임금인상을 요구하는 것일까요? 먼저 아베 총리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와의 연관성을 들 수 있습니다. '아베노믹스'의 최대목표는 장기불황 탈출입니다. 경기가 회복하려면 소비가 늘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선 임금인상이 필수라는 판단에 기업을 압박하고 있는 것이죠. 아베 총리의 구상은 소비가 확대되면 기업의 투자도 느는 이상적인 '선순환'이 이뤄질 수 있다는 것이기 때문에, 임금인상은 꼭 필요한 핵심 연결고리인 셈이죠.

대신 기업에는 각종 규제를 풀어주고, 세율을 낮춰주는 '당근'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법인세가 대표적입니다. 현재 일본의 실효법인세율은 29.74%인데, 일본 정부는 이를 10%P 낮추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우리 전경련에 해당하는 일본 경제단체연합회(게이단렌)은 이에 적극 호응하고 있습니다. 게이단렌의 사카키바라 사다유키 회장은 지난해 12월31일 송년 인터뷰에서 "기업들이 임금 3% 인상 방안을 긍정적으로 검토해주길 바란다"며, 회원사들의 임금인상을 적극 독려했습니다.
일본 아베 총리
그래서 아베 총리는 자신의 정치색깔은 '보수'지만, 경제정책은 '진보'라고까지 말하기도 합니다. 지난해 10월 아베 총리는 "내가 하고 있는 일들이 국제 표준에서 보면 상당히 '리버럴'하다고 할 수 있다"라고 말했습니다. 일본에서 '리버럴'은 진보를 가리킬 때 쓰는 말입니다. 일본 언론은 아베노믹스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관여하고 소득재분배 기능을 강화'한다는 문맥에서 아베 총리가 이 말을 사용했다고 분석합니다. 스스로 '진보' 아니냐고 공언할 만큼, 자신의 경제정책인 '아베노믹스'가 거두는 효과에 자신감이 있다는 것이죠. '관제춘투'를 계속 강하게 추진하는 데엔 이런 확신이 밑바탕에 깔려 있는 셈입니다.
 
● '춘투(春鬪)'가 아니라 '춘담(春談)'?

두 번째는 일본에선 이젠 더 이상 고전적인 의미의 '춘투'가 없다는 점입니다. '춘투'는 '춘계투쟁'의 줄임말로, 일본에서 해마다 행해졌던 '전투적 임금인상 투쟁'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런데 지금은 '투쟁'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을 정도로 교섭이 차분하게 진행돼 '춘담(春談)'이라고 불릴 정도로 '전투적'인 요소가 빠져 있습니다.
현재 일본 노조의 대표 단체는 '렌고'(連合: 일본노동조합총연합회)입니다. 2016년 기준 일본 전체 994만 명의 노조원 가운데 67.9%인 675만 명이 가입한, 명실상부한 일본 최대단체입니다.

1989년 결성 이후 노동쟁의를 거의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온건 노조'로 분류됩니다. 2009년에는 게이단렌과 함께 '위기극복을 위한 노사공동선언문'을 발표할 정도로 노사협조노선을 견지하기 때문에, 일부에서는 '어용노조'라는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특히 아베 총리가 '관제춘투'를 시행한 뒤로는 너무 정부와의 사이가 좋아지는 것 아니냐는 소리를 듣고 있다고 합니다.
일본 최저임금
물론 춘투도 1955년 시작 당시에는 단어가 가진 의미처럼 정말 격렬했습니다. 기업별 노조의 약점을 극복하고 임금인상을 실현하기 위해, 당시 일본의 최대 중앙노조(일본에서는 'National Center'로 부름)였던 '총평'은 8개 산업별 노조단위로 '춘투'라는 공동투쟁을 시작했습니다. 총평이 산업별 평균 임금인상률을 제시하고 기업별 노조가 임금교섭을 시도하는 식이었는데, 먼저 조합원 수가 많고 투쟁력이 센 자동차와 전자업체와 같은 대기업 노조들이 파업 등을 통해 원하는 임금인상률을 쟁취하면, 다른 기업에도 이를 근거로 확산시키는 방식으로 목표를 이뤘습니다. '통일 교섭'에 의한 '통일 임금' 전략인 셈이죠. 예를 들어 2월 한 달 동안 먼저 대기업 춘투를 끝내고, 3월에는 중소기업 춘투를 하는 게 전형적인 방식이었습니다. 고도성장기의 '만성적 노동력 부족'을 배경으로 삼은 측면도 큽니다.

비판도 많지만, 적지 않은 경제학자들이 고도 성장기에 춘투 덕분에 전체 노동자의 명목소득이 오르고 노동자의 소득증대가 내수시장 활성화로 이어져, 결과적으로 일본 경제발전에 기여했다는 긍정적인 평가를 합니다. 또 '임금의 표준화'로 중소기업까지 소득이 오르면서, 전체적으로 임금격차를 줄여 일본 사회의 안정에 도움이 됐다고 분석하기도 합니다. 양극화를 막았다는 것이죠.
일본 관광
그러나 임금인상에만 국한된 '투쟁'은 결국 노조의 발목을 잡습니다. 임금인상은 기업의 흑자, 즉 지불 능력을 전제로 합니다. 따라서 고도 성장기에는 가능했지만, 경기가 나빠지자 임금인상의 명분이 약해지고, 임금인상을 앞세웠던 노조의 존재의의도 희미해진 것이죠. 그래서 일본경제에 큰 타격을 준 1973년 제1차 오일쇼크 이후 일본의 강성노조는 급속히 세력이 약해집니다. 대규모 파업을 했지만 여론의 지지를 받지 못했고, 1975년을 분수령으로 급속히 온건노조의 길로 들어섭니다. '춘투'도 임금인상보다는, 임금 상한선을 설정하는 기능으로 바뀌어 사실상 임금을 억제하는 효과를 낳습니다. 노동조합이 아니라 노무관리 조직이 됐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입니다. 이후 강성의 '좌익' 노조들마저 떨어져 나가면서 1989년 노사협조 노선을 내걸은 '렌고'의 출범으로 이어졌고, 현재까지 이 흐름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또 학자들은 노조 '변질'의 근본적 원인으로, 고도 성장기를 통한 물질적 풍요가 노동자의 계급의식을 약화시켜 '대중화'를 촉진했다는 점을 꼽습니다. 종신고용, 연공서열형 임금, 퇴직금 제도와 같은 일본 특유의 기업복지를 통해 기업에 대한 노동자의 충성이 높아진 결과, 노동자 스스로 '중산층'이라고 인식하게 됐다는 것이죠. 진보학자들은 이를 "기업들이 노동을 포섭했다"고까지 표현합니다.
 
● '政勞社일체'…"우리는 '日本號'라는 배를 탄 공동운명체"

세 번째는 관이 주도가 되어 하나의 목표를 향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일본 특유의 구조를 드는 설명입니다. 정부와 노사가 하나라는 '정노사일체(政勞社一體)'라는 말로 표현할 수 있는데, 이는 '정노사회의'라는 명칭에서 단적으로 드러납니다. 우리의 '노사정 협의회'와 달리, 대놓고 정부를 뜻하는 '정(政)'이 맨 앞에 있습니다. 사실 파워로 볼 때는 일본의 경우 '정=사>>>>노'쯤으로 표현해야 할 정도로 정부와 기업의 힘이 훨씬 강하지만요.

이런 특이성은 일본 정부 관료와 기업인이 자주 쓰는 '일본號'라는 말에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인은 한배를 탄 '공동운명체'라는 말인데, 최근에도 게이단렌 사카키바라 회장은 "일본號라는 배를 두고 선장과 기관장이 싸우거나 비판할 겨를이 없다"며 '올재팬(All Japan)'의 일치단결을 호소했습니다. 대내외적으로 위기인 만큼, 정부와 기업, 그리고 노조가 자신들의 사사로운 이익을 내세우기보다 日本이라는 대의를 위해 하나가 되어서 헤쳐 나가야 한다는 것이죠.
일본 아베 신조 총리
'일본號'라는 말 이외에도 '일본 선단(船團)', '일본 주식회사'라는 말도 많이 쓰입니다. 고도 성장기에 먼저 일본 商社가 활로를 뚫고, 은행이 보증을 해주고, 국가가 정책적으로 밀어주는 전형적인 방식으로 무섭게 세계시장을 휩쓴 일본을 비유할 때 종종 인용되던 말이었습니다. 똘똘 뭉쳐 마치 전투를 하듯 거세게 밀어붙이는 일본에 전 세계가 경악했습니다. 경제학자들은 일본이 이런 효율적인 시스템 덕분에 1980년대 말까지 성장기를 구가하고, 한때 세계 NO.1의 자리까지 올랐다고 평가합니다.

저명한 경제학자 노구치 유키오 교수는 이런 일본의 경제 시스템을 '1940년 체재'라고 명명했습니다. '1940년 체제'는 곧 전시(戰時)경제 체제를 말하는데요, 노구치 교수는 "일본의 현 경제 시스템은 1937년~1945년의 전시 때 형성된 특수한 체재"라며, "모든 경제력을 전쟁에 쏟아붓는 총력전을 위한 구조다 보니, '통제'와 '효율'을 우선시한다"고 진단합니다. 그는 구체적으로 1937년 이전의 일본경제가 전시 때 어떻게 변했는지, 그리고 종전 이후 1990년대까지 어떻게 정착됐는지를 정부의 기본정책과 금융, 세제, 기업, 노조 등 모든 면에서 꼼꼼히 조사한 자료를 보여주며 납득시킵니다.

또, 노구치 교수와 다른 일본 학자들의 글을 읽다 보면, '관제춘투'의 배경에 일본 노조의 역사적 특수성도 있음을 확인하게 됩니다. 일본에선 기업별 노조의 기원을 전시체제하에서 전국 공장에 걸쳐 조직되었던 '산업보국회'에서 찾습니다. '산업보국회'는 1938년 전시체제를 뒷받침하는 기둥으로 활용하기 위해 세운 기업 단위의 '사용자 종업원 동일체 조직'입니다. 1940년에는 기존 노동조합 조직을 해산해 '산업보국회'에 편입시키고, 전국 중앙조직까지 만듭니다. 산업보국회는 중앙과 지방의 경찰조직이 나서서 조직했으며, 지역 지부장을 지역 경찰서장이 맡았습니다. 전시였다고는 하지만, 이미 오래전부터 일본에서는 관과 노사가 긴밀하게 협력했던 적이 있었던 것이죠.
 
● '관제춘투'는 일본 경제에 도움이 될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서 아베 총리의 바람대로 '관제춘투'가 경제의 선순환으로 이어지고 있을까요? 약간 회의적인 시각이 많은 것 같습니다. 먼저 기업의 실제 임금 인상률이 기대에 못 미친다는 점 때문입니다. 지난 2012년 12월에 정권을 잡은 아베 총리는 지난 2013년 9월부터 해마다 독려를 해왔지만, 그동안 2% 초반을 넘어서지 않았습니다. 이마저도 지난 2017년에는 2%대가 무너져 1.98%를 기록했습니다. 더욱이 일본의 임금인상률은 '베이스업'이라고 해서 '기본급 인상+정기 승급분'을 합친 개념이기 때문에, 실제 직장인들의 소득인상 체감률은 더 낮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언 발에 오줌 누기'라는 말까지 나옵니다.
일본 자동차
다른 이유로는 '아베노믹스'의 혜택이 대기업에 집중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중소기업은 수혜를 받지 못한 곳이 그다지 많지 않아서 임금인상에 적극적이지 않다 보니, 실제 임금이 오른 곳이 그다지 많지 않다는 것입니다. 미무라 야키오 일본 상공회의소 회장은 지난달 기자회견에서 "중소기업은 사정이 어렵다"며 회원사에 임금 3% 인상을 독려하지 않겠다고 밝혔습니다. 적극 찬성하는 대기업 단체인 게이단렌과는 대조적인 모습이죠.

또 대기업 위주로 임금이 오른다는 의미의 연장선상에선 결국 '관제춘투'에 의한 임금인상이 격차, 우리로 치자면 양극화를 오히려 확대시키고 있다는 비판도 나오고 있습니다. 소득분배가 제대로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죠. 실제 관제춘투에도 불구하고 노동 분배율은 오히려 악화되고, 개인소비도 여전히 부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학자들은 특히 일본 근로자의 40%에 해당하는 비정규직에게 임금인상의 수혜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있다는 점을 일본 내수시장 활성화에 도움이 되지 않는 이유로 꼽습니다.

따라서 중소기업체와 노조를 중심으로 이제는 임금인상 협상을 그만 노사에 맡겨두라는 목소리도 나오고 있습니다. 조합원이 2백만 명에 이르는 금속노협의 다카쿠라 아키라 회장은 도 지난달 6일 기자회견에서 "노동조건은 노사가 주체적으로 정한다. (관제춘투는) 이제 적당히 좀 하라"고 비판했습니다.

보신 것처럼 일본의 '관제 춘투'는 우리와 역사적 문화적 배경이 다릅니다. 따라서 우리의 모델이 될 수 없거니와, 지향점도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최소한의 '대화의 場'조차 마련하지 못하고 있는 우리 노사정의 모습을 보면 답답해집니다. 새해에는 무언가 달라지기를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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