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북각루 아래로 펼쳐진 갈대의 물결을 헤치며 나아가는 저 너머로 수원화성의 서문(西門)인 화서문(華西門)이 보인다.
화서문은 수원성의 서쪽 문으로, 문의 앞쪽에 벽돌로 쌓아 올린 반달 모양의 옹성(甕城)이 특이하다. 성문을 보호하기 위한 이중 구조의 방어막을 형성한 것인데, 이는 서울 도성의 남대문이나 동대문에서도 볼 수 없는 수원화성만의 특별한 구조라고 한다. 후대의 발전된 축성 기술과 군사 전략적인 발전이 결합해 만들어진 결과물이 아닐까 싶다. 문외한인 내가 보기에도 옹성과 성문의 이중적인 구조는 수비적인 측면에서 훨씬 견고해 보인다.
화서문의 현판 글씨는 화성 축조의 책임자이자, 화성 유수였던 채제공(蔡濟恭, 1720년 ~ 1799년)의 글씨라고 한다. 채제공은 남인의 영수로, 사도세자의 스승이자, 그의 아들인 세손의 스승이면서 후견인이었던 인물이다.
사도세자와 영조 사이의 관계가 악화되어 영조에 의해 세자를 폐위시키자는 비망기가 내려졌을 당시, 목숨을 걸고 이를 막아 철회시킨 바도 있었다. 이 일로 후에 영조가 정조에게 이르기를, "진실로 나의 사심 없는 신하이고, 너의 충신이다."라고 했을 정도로 채제공은 사도세자와 그의 아들인 세손의 명실상부한 후견인이었다.
그랬던 그였으니, 정조 즉위 후에 중용되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즉위 초 정조 시대의 실질적인 권력자이자, 세도 정치의 서막을 연 홍국영과의 불화로 잠시 낙향하기도 하였으나, 홍국영의 실각 후 정조 말년까지 재상으로써 정조의 곁을 지킨 인물이다. 또 한편으론 노론에 대응하는 정조 시대 탕평책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사실 어떤 정책을 평가함에 있어 양단간에 똑 부러지는 정답이야 있을 수 있겠는가마는, 정조의 탕평책은 우리가 흔히 영·정조 시대를 일컬어 탕평의 시대라고 듣고 배운 것과는 달리, 강력한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붕당 간의 정쟁을 조정 내지 이용한 미봉책에 불과하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실제 영조는 경종의 사후 노론에 의해 선택된 왕이다. 경종 생전에도 노론은 끊임없이 경종이 병약함을 핑계로 당시 연잉군이던 영조의 대리청정을 주청할 정도로 적극적이었다. 그런 노론 세력이었기에 소론 세력과의 목숨을 건 치열한 투쟁은 당연했고, 결국 경종의 독살설과 같은 온갖 추문 끝에 영조를 용상에 앉힐 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영조에게 노론은 정치적 동반자이자, 공동운명체일 수밖에 없었다.
탕평책을 통해 일당 독재에서 다당제로 전환됨으로써, 신하 권력은 분산되었고, 서로 선택받기 위한 치열한 경쟁은 불가피한 것이 되었다. 저절로 왕권이 강화되는 묘수였던 것이다. 그렇게 영조는 노론과 소론으로 대표되는 당파에 속하지만, 그중에서도 비교적 온건하고 타협적인 인물을 번갈아 기용하는 초당적 정치운용으로 왕권을 강화하고자 했던 것이다.
하지만 영조가 내건 진정한 탕평의 길은 멀고도 험했다.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결국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고만 것이다. 소론에 호의적이라는 이유만으로도 노론은 사도세자를 두고 볼 수 없었던 것이다. 죽음을 담보로 잡은 정권인데 그렇게 쉽사리 내어 놓을 수는 없는 일이었다. 정권 유지를 위해라도 사도세자는 제거되어야 했다. 수렴청정 중인 저군이라는 사실도 그들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마침내 노론은 사도세자와 그 세자가 탐탁지 않던 영조 사이를 이간질하여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8일 후 사도세자는 더위와 굶주림에 지쳐 죽고 만다. 노론의 승리였다. 영조가 사도세자를 죽인 다양한 이유가 존재하지만, 결국은 정치 투쟁의 결과였던 것이다. 탕평은 이름 뿐, 시스템으로 정착되기에는 각 정파의 투쟁은 격렬했고, 왕은 그 정파를 초월하지 못했던 것이다.
탕평을 포함한 정치 체제의 변화가 추구하는 근본적인 목적은 정치적 안정과 발전, 나아가 국가 발전을 통해 백성의 나은 삶을 도모하는 것이다. 하지만 왕은 자신의 뿌리를 버리지도, 속이지도 못했다.
영조 역시 그의 뿌리는 노론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당시 왕실을 장악한 외척들 역시 노론 일색이었다. 영조 자신의 처가와 사돈 모두가 노론이었다. 사도세자는 정치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아버지인 영조와 정순왕후, 그리고 생모인 영빈 이 씨, 나아가 마누라인 혜경궁 홍 씨의 직간접인 개입과 외면 속에서 죽어갔던 것이다. 신분이 미천했던 영빈 이 씨를 제외한 그들 모두는 골수 노론이었다.
뒤이어 즉위한 정조에게 노론은 같은 하늘을 이고 살 수 없는 철천지원수였다. 앞에서도 서술했듯이 노론은 아비인 사도세자를 무참하게 죽인 세력이었으며, 자신이 왕이 되는 앞길을 사생결단으로 막아섰던 집단이었기 때문이다.
즉위 후 정조가 맞닥뜨린 당면 과제는 대리청정 하는 세자를 죽인 증오의 정치와의 결별, 그리고 신하의 나라가 아닌 임금을 정점으로 하는 백성의 나라를 세우는 것, 노론만이 존재하는 일당 독재 체제의 진정한 종식이었을 것이다. 이 모든 적폐의 뿌리는 노론이었다.
하지만, 정조는 그러하지 못했다.
앞서 언급한 정조의 어중간한 위치, 즉 영조와 사도세자 사이의 딜레마가 주요한 이유였다. 아버지를 높이자니 할아버지를 배신하는 결과가 되는 상황에서 정조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으로 내몰리고 만 것이다. 그리고 영조는 특별히 정조에게 사도세자 문제를 거론하지 말라는 유지까지 내린 터였다. 그런 이유로 정조는 사도세자를 죽인 원흉들을 처단할 수가 없었다.
● 노론 당인으로서의 정조와 그의 시대의 한계
그리고 정조 스스로의 당색도 노론이었다. 그가 주창한 성리학적 왕도 건설은 노론이 주장한 것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자신을 만물을 비추는 달과 같은 존재인 만천명월주인옹(萬川明月主人翁)이라 칭하였던 정조는 스스로 성리학의 대유(大儒)라 여기며, 임금이자 스승을 자처하였던 것이다. 이는 스스로 뚫고 나가야 했던 주자학적 세계관에 도리어 갇히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게다가 정조는 노론 당파의 종조(宗祖)격인 우암 송시열을 공자, 주자와 같은 반열인 송자(宋子)로 높이며, 문묘에 배향하는 오류 아닌 오류를 범하였고, 이는 성리학의 계승자이자, 성리학을 금과옥조로 여기는 노론의 무리임을 스스로 인정하고 나선 꼴이 되고 만 것이다.
결국 조선 중기 이후 붕당 정치에 기반하고 있던 조선의 정치를 개혁하기 위해 실시한 탕평책은 붕당에 연연하지 않고 인재를 두루 등용함으로써 정치체제를 안정화시키고, 국가와 왕실의 발전을 도모한다는 원론적인 기대에 미치지 못하였다. 실제로는 탕평책이 신하들의 붕당 위에 국왕의 권위를 먼저 내세우는 왕권 강화 정책으로 흐르면서, 새로운 정치의 시스템 마련이라는 궁극의 목표에는 도달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렇게 제대로 된 통치 및 정치 시스템은 마련되지 못하였고, 정조 자신을 정점으로 하는 구체제의 연장선상에서 조선은 굴러가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는 왕권 중심의 정치 체제가 갖는 문제점이자 한계는 든든한 사후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을 경우 왕의 죽음이 곧 제국의 붕괴를 의미한다는 점이다. 정조 사후의 조선이 그러했다.
정조 사후 조선은 급격하게 외척 중심의 세도정치의 길로 접어들고 말았다. 그 세도정치의 시작은 정조 스스로 당시 주도 세력이었던 노론 벽파를 견제하고자 고르고 골라 사돈으로 맺은 노론 시파의 수장이었던 김조순과 그 가문이었다. 안동 김 씨 가문이 바로 그들이다.
그렇게 조선은 마지막 호흡을 붙든 연명의 시대로 접어들고 말았다.
화서문을 지나면 길은 평지길이다. 성벽을 따라 이어지는 길이라 그다지 특별함은 덜하다.
다만 중간 중간에 만나는 초소 같은 건물들이 오가는 이에게 아는 체를 한다. 무슨 사당 같이 보이는 모습의 건물이 보인다. 북서포루(北西砲樓)다. 포루(砲樓)는 성벽 밖에 3층으로 지은 벽돌 건물로, 내부를 공심돈과 같이 비워두어서 그 안에 화포를 숨겼다가 위아래를 한꺼번에 공격을 할 수 있도록 만든 시설물이라고 한다. 은폐 엄폐된 포대였던 것이다. 포대치고는 건물의 모습이 고색창연하다.
멀리 장안문이 보인다.
수원화성을 이야기하면서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는데, 바로 정약용이다. 정약용은 거중기를 발명하여 축성 공사에 큰 기여를 하였다. 성곽길 한편에 정약용이 발명한 거중기를 이용해 축성하는 백성들의 모형이 있어 그날을 재현하고 있다. 새삼 거중기가 없었다면 그 무거운 돌들을 옮겨 성을 쌓았던 이름 없는 백성들의 노고는 얼마나 더 심했을고.
오지랖이 넓어서인지, 실제 해외여행이나 출장 중에 만나는 고대나 중세의 건축물을 보면서 저 건축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의 땀과 피, 눈물이 스며있을까 하는 생각을 여러 번 했다. 중국의 만리장성이나 이집트의 피라미드야 말해 무엇하겠냐마는 유럽의 성이나 성당 같은 건축물을 볼 때도 마찬가지다.
정약용의 거중기는 성곽을 쌓는 효율성의 문제이기 전에, 수많은 목숨을 구한 생명의 장비였으리라는 짐작을 어렵지 않게 할 수 있다. 성곽을 구성하는 그 수많은 돌덩이를 어깨에 얹고 아스라한 언덕을 걸어 올라가던 그들에게 거중기는 얼마나 고마운 존재였을 것인가. 이처럼 기술의 발전이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함에도 가끔은 기술이 인간을 착취하거나 대체하기 위한 수단이 되어가는 오늘의 현실이 새삼 안타깝고 또 두려워진다.
성벽을 뚫어 화포나 총기를 내어 쏘게 만든 총안(銃眼) 틈새로 아직도 남아 있는 지난 계절의 흔적들이 화사하다. 머지않은 때에 사라질 풍경이라 그런지 절절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가끔은 쓸데없는 감정의 과잉이 어색하고 또 불편하다. 나이를 먹어간다는 증거일 것이다. 새삼 멀리 있는 막연한 소중함보다는 곁에 있는 소박한 나의 것이 더욱 소중하다는 사실을 조금씩 깨달아가고 있음을 느낀다.
멀리 성곽의 높은 곳에 우뚝 솟은 화홍문(華虹門)이 보인다. 화홍문은 성의 북수문(北水門)이다. 화홍문은 이름처럼 광교산에서 발원해 성안을 가로지르며 흐르는 수원천 위에 지어진 수문이다. 누각 아래의 홍예(虹霓, 아치 형태의 동양적 건축기법)는 커다란 댐의 수문마냥 금방이라도 물줄기를 왈칵 쏟아낼 것만 같다. 화홍(華虹)이라는 이름마저도 '화성의 무지갯빛'이니 수문을 벗어난 물줄기의 파편들이 터지며 만들어낸 무지개에서 얻은 이름이 아니던가.
아니나 다를까. 화홍문의 홍예에서 쏟아지는 장쾌한 물보라는 '화홍관창(華虹觀漲)'이라 불리며, 수원8경 중 하나라니 그 기대가 크게 다르지 않았음이 오히려 뿌듯하다.
화홍문을 지난 길은 언덕 위로 향한다. 언덕 위 용머리에는 '방화수류정(訪花隨柳亭)'이라는 이름으로도 불리며, 화성의 건축물 중 으뜸이라는 동북각루(東北角樓)가 자리 잡고 있다.
어여 가보자. 잘 정비된 성곽을 따라 오르는 길 위로 초겨울 햇살이 따사롭다.
▶ [라이프] 정조의 꿈, 조선의 꿈…수원화성 성곽길을 걷다 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