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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판사 블랙리스트' - 조사 자체를 거부한 당사자들

[취재파일] '판사 블랙리스트' - 조사 자체를 거부한 당사자들
A 부장판사는 "재판할 때 가장 경계하라고 배우는 것이 '예단'이다. 혐의 사실은 그 자체로 입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판사 블랙리스트 추가조사를 반대하는 그의 논리를 가장 잘 설명하는 키워드는 '예단'과 '정황 증거'였다. '절차적 정당성', '인권' 같은 단어도 왕왕 등장했다. 이번 일을 '제보 수준의 전언'으로 비롯된 대혼란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존재하는지 알 수 없는 판사 블랙리스트를 두고 법원이 안팎으로 흔들리고 있다며 안타까워했다.

그는 무엇보다 이 일이 '법원 내 판사들 간에 촉발된 사건'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재판을 하는 판사들이', '우리 사회 최후의 보루, 법원이' 같은 표현이 반복됐다. "법원이 이번 사건을 어떻게 해결했는지를 두고 사회에선 판례보다 더 앞선 메시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는 말도 했다. 민간 기업들이 "법원도 자리에 없는 직원 PC를 영장 없이 뒤졌다는데", "사적인 정보가 담긴 걸 복원해 들여다봤다던데."라며 너도나도 따라 할 것이라며 걱정했다.

● 예단을 걱정할 필요 없는 단계 - 아직 재판은 열리지 않았다

재판 과정에서 예단을 경계해야 한다는 것은 지당한 말이다. 제1의 명제다. 하지만, 적어도 이 사건을 두고 A 부장판사는 '조사'와 '재판'의 개념을 다소 혼란스럽게 섞어 사용하고 있다. 추가조사위가 하고 있는 건 말 그대로 '조사'이지 '재판'이 아니다. 제기된 의혹에 대해 최소한의 사실 관계를 파악하자는 거다. 유무죄에 대한 예단을 언급하기에 이른 단계다. 지금으로선 가장 공정한 방식으로, 가장 정확한 사실 관계를 얻어내는 것만이 유일의 과제로, 예단이 개입할 여지를 되레 최소화한다. A 부장판사의 표현대로라면 '아직 재판은 열리지도 않았다'.

무엇보다 이번 사건의 발단이 된, 한 때 법원행정처 소속 이모 판사의 증언 내용-"상급자로부터 행정처 컴퓨터에 판사들을 뒷조사한 비밀번호가 걸린 파일이 있다고 들었다"-이 상당히 구체적이고 개연성이 높다는 게 전국법관대표회의를 통해 표출된 일선 판사들의 의견이다. 혹여나 사실로 판명될 경우 법원이 감당해야 할 후폭풍도 만만치 않겠지만, 그게 두려워 덮어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다.

● 법조계 "영장주의 위반 아니야"…당사자 동의 구하는 절차는 도의적 책임까지 지겠다는 것

추가조사위가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 당사자에게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후 시작된 조사가 그래서 위법하다는 주장이 일각에서 제기된다.

그런데, 토막 낸 사실 앞뒤의 것을 이어 붙여보려 한다. 그러니까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라는 문장 앞엔 1) '동의를 구하는 작업이 필수적인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와 2)'동의를 구하려 노력했는데'를, '동의를 구하지 못했다' 뒷부분엔 3)'동의를 얻는 과정에서 제안했던 최선의 방법이 실제 조사 과정에서 실현됐다(유효했다)'를 말이다.

사법행정 정보가 담긴 조사대상 컴퓨터의 소유자는 국가(사법부)이고, 최종 관리자는 법원행정처 처장이다. 해당 컴퓨터의 1차 관리자 및 소지자도 현재 그 컴퓨터를 사용하는 법원행정처 근무 판사이지, 당시 판사가 될 수 없다. 법원행정 사무를 목적으로 작성된 모든 공공기록물에 대한 접근 권한을 보유한 사람은 바로 대법원장이다. 추가조사위원회는 대법원장의 조사권한을 위임받은 상태다.

조사 대상 컴퓨터 4대 중 3대의 사용자인 임종헌 전 법원행정처 차장, 이규진 전 양형위원회 상임위원 등은 이미 컴퓨터를 법원행정처에 두고 퇴직하거나 다른 법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해당 컴퓨터를 사용하거나 관리할 권한이 없고, 컴퓨터 안에 저장된 문서 파일을 열람하거나 접근할 권한 또한 없다.

추가조사위원회는 법원행정처 등으로부터 해당 컴퓨터들을 임의 제출받아 보전 조치를 완료한 상태에서, 말하자면 합법적인 조치를 끝낸 상태에서 당사자들의 동의를 구한 것이다. 도의적인 부분조차 책임지려 했던 추가조사위의 배려 -플러스 알파-의 문제이지, 선결했어야 할 무언가를 건너뛴 것이 아니었다.

일각에서 제기되고 있는 '영장주의에 어긋난다'는 주장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게 법조계 시선이다. 형사소송법에 따르면, 영장은 압수할 물건의 '소유자, 소지자, 보관자'에게 발부되는데, 압수할 물건이 정보인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수사가 개시된다면, 해당 컴퓨터들에 대한 영장은 대법원장 또는 법원행정처장에게 발부된다. 그런데, 법원행정처장은 이미 조사 대상 컴퓨터들을 추가조사위원회에 임의 제출했다.

이에 대해, 박경신 고려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신의 SNS에서 이런 입장을 밝혔다. (전문 인용을 허락받았습니다)

"강제조사"? "당사자의 컴퓨터"? 법원에서 공무용으로 지급했다가 공무가 끝나 돌려받은 컴퓨터가 어떻게 "자신의" 컴퓨터라는 것인지... 고용주가 자신이 소유하고 점유하고 있는 컴퓨터를 조사하는 것이 누구에게 "강제"라는 것인지...

물론 업무용PC라고 해서 직원들 몰래 또는 아무런 사전 통지 없이 도청을 하거나 수색을 하면 예기치 않게 보관된 사적 내용이 공개될 수 있다. 그렇게 상시 또는 불시모니터링을 할 거라면 직원들에게 지급 시에 그렇게 사전통지하고 모니터링하는 것이 옳다.

하지만 보직변경/퇴직 후에 법원행정처에 반납하여 관리자까지 바뀐 컴퓨터를 자신이 과거에 썼었다는 이유로 사생활침해를 주장할 수 있는가? 자신이 쓰던 업무용 책상을 퇴직하거나 전근하면서 사업장에 제출한 후에 고용주가 책상서랍을 열어보면 사생활 침해인가?

블랙리스트 재조사위원회가 이들 PC에 있는지 확인하려는 것은 법원인사에 관련한 특정성격의 파일의 존부이다. 즉 개인의 사생활이 아니라 조직의 핵심적인 공무에 대한 것이다.

업무용을 사적인 이유로 썼다면 그 자체가 규정 위반이다. 규정 위반 조사는 못할 망정 업무용PC에 사적내용이 있을 수 있다는 이유로 그 PC의 다른 공무관련 파일을 조사하지 못하게 한다는 것은 적반하장이다.

미국 대선에서 힐러리는 국무장관 시절 공식업무를 개인메일계정/서버를 통해 본다는 의혹 때문에 패배했다. (물론 다른 이유도 있지만 트럼프와의 박빙의 차이가 여기서 나오지 않았다고 확신하는 게 더 이상하다.) 이 사건에서는 개인PC/메일은 공적 관리가 되지 않아 보안 위험이 있어서 문제가 된 것인데 우리에게 중요한 교훈은 공식PC는 공적 관리가 된다는 것이다.

물론 어떤 업무용PC는 업무전용이라기보다는 직원후생차원에서 지급되어 개인의 전속적인 관리에 놓여지고 사무실이 바뀔 때 가지고 나오기도 한다. 또는 업무용인지 후생용인지 불분명한 것도 많다. 그러나 행정처 판사들이 사용한 PC들은 그런 것이 아니다.


● '위법한 방식'의 조사가 아닌, '어떤 조사도 위법하다'는 주장엔 문제 있어

다음 글은 추가조사위가 지난달 8일, 법원 구성원들에게 알린 경과보고를 위한 글이다.

"...관련 당사자들의 동의와 참여 하에 추가조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바람직하므로 추가조사위원회는 그러한 협조를 구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습니다. 조사의 대상이 공용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이고 이를 복구하거나 열람하는데 관련 당사자의 동의가 필요한지에 관한 논란이 있습니다. 비록 사법행정과 관련하여 업무상 작성된 문서이지만 법관이 사용한 컴퓨터에 저장된 문서를 열람하는 것이기에 법리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먼저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지속해왔고 현재도 노력하고 있습니다...."

알 수 있듯이, 그럼에도 추가조사위원회는 동의를 구하려 (한 달 가까이 설득한 것으로 알려졌다)노력했다. '법리적으로 접근하기 전에 먼저 동의를 구하는 절차를 지속해' 온 것이다.

공무 목적으로 작성되어 보관하고 있는 공용정보와 공공기록물은 사생활 보호 영역에 속하지 않는다. 대법원장은 사법 행정에 관한 모든 공공기록물의 열람권자이고, 대법원장이 공공기록물을 열람하는 것은 비밀침해죄에 해당할 여지가 없다.

추가조사위는 조사에 앞서 당사자들에게 사생활 침해를 막기 위한 컴퓨터 조사 참여권을 보장하고 사적 정보를 분류할 수 있게 할 것을 약속했다. 추가조사위는 "저장매체에 있거나 복구된 모든 문서를 열람하는 것이 아니다. 문서가 생성, 저장된 시기를 한정하고 현안과 관련된 키워드로 문서를 검색한 뒤 해당 문서만을 열람할 것"이라고 밝혔다.

저장매체에 들어 있을 수 있는 개인적 문서와 비밀침해 가능성이 큰 이메일은 아예 조사 대상에서 제외한다고 덧붙였다. 그럼에도 동의는 끝내 이뤄지지 않았다. 당사자들이 거부한 건 '위법한 방식의 조사'가 아닌, 조사, 그 자체였다는 비판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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