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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반전의 기회 축소가 한국인의 극단적 이중성 키웠다

기득권 제로가 기회 확대라는 정치적 학습도 영향

[취재파일] 반전의 기회 축소가 한국인의 극단적 이중성 키웠다
▲ 중동 건설현장.  위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련이 없습니다.

● "미국도 못 이긴 나라 북한과 베트남"

오래전 건설업계를 출입하던 기자들과 퇴직한 건설사 임원들이 오랜 만에 만났다. 그 중에는 쉬는 사람도 있었고, 대학의 교수가 된 이도 있었다. 이야기의 화두는 오래전 중동의 한 건설현장을 취재차 방문했을 때 느꼈던 감회였다.

그 현장은 한국 건설업에서 해외진출의 기념비적인 의미를 갖는 곳이었는데, 수많은 인종의 외국 인력들이 일하고 있었다. 여러 이야기를 나누던 중 당시 기자들을 이끌고 갔던 임원이 재미있는 말을 꺼냈다.

“당시 많은 국적의 인력들을 써 보면 나라별 인종별로 그 능력에 차이가 참 많이 났었어요. 그 가운데 가장 빨리 일에 숙달하고 작업 진척이 높은 사람들은 단연 조선족을 포함한 한국 사람들과 베트남인들이에요.”

우리 뇌리에 각인된 한국인들의 뛰어난 두뇌와 근면성을 확인하는 순간이었다. 그런데 다른 전직 임원의 반박은 뇌리를 복잡하게 휘저었다.

“일을 잘 할 때 그렇다는 이야긴데, 문제는 뭔가 수틀리면 최악이 된다는 겁니다. 머리가 좋은 만큼 지능적으로 업무를 태만히 하고, 작업자들을 내 편과 네 편으로 갈라서 상대를 괴롭히고 관리자를 속이는데 정말 미칠 지경이었어요.”

그러면서 나름의 분석까지 내놓았다. 미국이 전쟁에서 이기지 못한 나라가 딱 둘이 있는데, 그게 북한과 베트남이란 거다. 그만큼 민족성이 영리하면서도 독하다는 이야기일 테다. 동북아의 한 귀퉁이 작은 나라가 거대 중국을 옆에 두고 수 천년 동안 독립 국가를 유지한 배경도 그럴 테고, 삼국지에 ‘칠종칠금(七縱七擒)’이란 故事成語의 기원이 될 정도로 좀처럼 굽히지 않는 맹획의 나라가 베트남이니 이해가 되는 대목이다.

● "극단적 이중성을 가진 한국인"
IMF 당시 금모으기 운동하는 국민들
나라 전체가 어려울 때나 어떤 목표에 동의할 때는 큰 능력을 발휘하는 한국인, 하지만 그 자질이 부정적으로 발휘될 때는 그만큼 스스로와 주변에 큰 상처를 입힌다는 이야기에 자리에 참석한 많은 이들이 동의했다. 엉성한 분석일지 모르지만 우리 민족의 극단적 성향을 확인해 볼 수 있는 대화였다.

IMF 금융위기 상황에서 온 국민이 집안에 모아 둔 금을 내놓아 경제 살리기에 나설 정도로 공통의 목표에는 세계가 놀랄 힘을 보이지만, 다른 한편으론 이해관계가 첨예한 국가적 쟁점을 두고 사회적 합의가 거의 이뤄진 적이 없는 나라, 정권이 바뀌면 매번 기존 정권의 모든 가치와 단절을 선언하는 나라, 내 생각과 다른 이를 설득의 대상이 아니라 적으로 간주하는 나라, 편을 갈라 극단적인 비난과 적개심을 표현하는 살인댓글의 나라가 지금의 우리 현실이다.

● "단절의 역사가 키운 반전의 기회"

이런 극단적 심리의 배경에 대해 모임에 참석했던 교수는 역사적 단절을 이야기했다. 조선이 붕괴되면서 양반과 평민의 경계가 무너졌다. 연이은 장기간의 일제 식민지와 6.25 전쟁은 기존의 모든 질서와 가치를 붕괴시켰다는 것이다.

기존질서와 기득권 붕괴의 의미는 역설적으로 큰 가능성이다. 모두가 과거의 태생에 관계없이 돈과 명예와 권력을 잡을 수 있는 무한한 가능성이며, 또한 반전의 기회이기도 하다. 양반의 소작농이었던 사람이 기존의 신분을 탈피하고, 과거 양반이 가졌던 넓은 땅을 거느리며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기회의 가능성인 동시에, 행세하던 양반이 빈곤층으로 떨어지는 몰락의 가능성이기도 하다.

기존의 질서와 가치가 존속하는 상황에서 반전의 크기와 가능성은 당연히 제한적일 수밖에 없다. 기득권 제로에서 시작할수록, 결국 기존의 것 과거의 기득권을 부정할수록 ,반전의 규모가 확대된다는 것을 슬프게도 단절의 역사를 통해 경험한 셈이다. 

● 영속성 있는 가치를 창조할 때
달동네
정치도 그에 익숙해졌다. 연속보다는 단절을 통해 시간적으론 현재와, 공간적으론 내 편의 가능성만을 높이는 정치가 우리 현대사의 정치였다. 그리고 이런 정치는 끊임없이 반전의 가능성을 부풀려 현실을 부정하게 만들도록 선동한다.

거기다 양극화의 고착은 상황을 더 악화시키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고도성장을 겪으며 한때 기업과 가계가 함께 성장의 과실을 따먹었다. 하지만 어느 순간 경제가 좋은 말로 고도화되면서 기업은 기업대로 가계는 가계대로 양극화가 고착되기 시작했다. 무한하던 반전의 가능성이 줄어들면서 한국인의 극단적 성향은 더 강화됐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기존의 질서가 다 무너져야 내 것이 많아진다고 생각하는 심리가 용서와 배려와 타협을 가로막는 기제가 돼 왔던 것이다.

유럽을 비롯한 선진국들은 오랜 정치 역정을 통해 자유와 평등 같은 이념적 가치에 대해 온 국민이 공유하는 가치체계를 만들어, 다른 성향의 정권이 집권해도 그것만은 지키는 정치문화를 갖고 있다. 그를 통해 노동이나 시장경제의 갈등을 정권변화와 관계없이 풀어내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그런 정치문화가 없다. 영속성 있는 가치를 다듬어낼 만한 역사가 짧은 이유도 있겠지만, 내편의 가능성만을 최대한 높이는 극단의 정치가 우리 사회를 오랫동안 지배해왔기 때문이다. 진영의 차이를 넘어서서 이것만은 지키자고 할 수 있는 가치를 창조하고, 그 가치를 영속성 있게 가져가는 정치문화가 하루 빨리 다가오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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