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이 있는 영국에서는 문화·학술·스포츠 등의 분야에서 큰 공적이 있다고 인정되는 사람에게 군주(현재는 엘리자베스 2세 여왕)가 정부 추천을 받아 기사 작위를 수여한다. 서훈자 명단은 1년에 두 번, 신년과 여왕의 공식 생일(6월 둘째 토요일, 실제 생일은 4월 21일)에 발표된다. 그러니 다른 나라의 문화훈장과 비슷한 의미를 담아 수여되는 건데 무릎 꿇은 서훈자의 두 어깨에 군주(또는 그를 대신한 왕세자, 왕세손)가 의례용 검을 가져다 대는, 중세의 기사 서임 방식에서 유래한 전통 의식을 치르다 보니 다른 나라에 비해 큰 화제가 되곤 한다.
기사 작위를 받은 사람이 영국인 이거나 영국 군주를 국가원수로 인정하는 영연방 국가 출신일 경우 이름 앞에 남성의 경우 서(Sir), 여성의 경우 데임(Dame)이란 경칭(敬稱)을 붙일 수 있다. 그 밖의 외국인에게는 명예기사(Honorary Knight) 지위를 부여하는데 이 경우 기사 서임 의식은 거행하지 않으며, 이름 뒤에 대영제국훈장(Order of the British Empire) 2등급 수여자(Knight Commander)의 약칭인 KBE를 표기할 수 있다.
록 음악가들이 작위를 받은 이유는 대부분 음악을 통해 영국문화를 세계에 널리 알렸다는 점과 자신들의 유명세를 자선활동 등과 연계해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을 줬다는 점이다. 하지만 록 음악이 영국의 대표적인 문화 수출상품으로 영국의 국부에 기여했다는 점도 크게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이들 중 상당 수가 부유층에 대한 높은 누진세를 피하기 위해 전성기의 상당 부분을 미국 등 외국에서 세금 망명(Tax Exile) 생활을 보냈다는 점은 역설적이지만...
그럼 여기서부터 록 음악계의 기사들의 면모를 살펴보자.
록 음악계 첫 기사는 영국인이 아니었다. 아프리카 이디오피아의 기아 문제 해소를 위한 음반 <Do They Know Its Christmas>와 대규모 공연 <live Aid>를 기획한 아일랜드인 밥 겔도프가 기아 구호에 공헌했다는 이유로 1986년에 기사가 됐다. 영국인이 아닌 그는 명예기사인 만큼 이름 앞 Sir표기 대신 이름 뒤에 KBE라고 표기한다.
2. 클리프 리처드(Sir Cliff Richard OBE, 1995)
영국인 최초의 록 뮤지션 기사는 9년 뒤인 1995년에 나왔다. <The Young Ones> 등의 히트곡, 밴드 섀도우즈(The Shadows)와 활동 등으로 유명한 팝 스타 클리프 리처드가 음악과 자선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기사작위를 받았다. '영국의 엘비스 프레슬리'로 불리기도 하는 그는 인기절정이던 1969년도에는 이화여대에서 내한공연을 하기도 했다.
역사상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를 기록하고 있는 비틀즈 출신의 폴 매카트니는 1997년 기사 작위를 받았다. 서훈 이유는 음악에 대한 공헌. 수상 소감은 "영국인인 게 자랑스럽다. 리버풀의 빈민가로부터 참 먼 길을 왔다."비틀즈 시절 다른 멤버들과 함께 연예산업에 기여한 공로로 대중음악계에선 처음으로 1965년에 대영제국훈장(5등급, MBE)을 받았었기 때문에 매카트니는 이름 뒤에 표기하는 훈격은 가장 낮은 5등급. 매카트니가 작위를 받기 한해 전(1996)에는 '비틀즈의 프로듀서'조지 마틴(Sir George Henry Martin CBE)이 기사 작위를 받아 앞서 영국 문화계에서 비틀즈의 위상을 과시하기도.
4. 엘튼 존(Sir Elton Hercules John CBE, 1998)
비틀즈에 이어 가장 많은 음반 판매고(3억5천만장)를 기록하고 있는 엘튼 존은 1998년에 음악과 에이즈 퇴치·성소수자 권리 관련 자선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작위를 받았다. 1997년 타계한 다이애나 왕세자비(Princess Diana)와 가까운 사이로 그녀의 장례 때 <Candle in the Wind 1997>을 불렀던 점도 수작(授爵)에 기여했다는 평가도. 그의 본래 이름은 Reginald Kenneth Dwight이지만 지금은 공식적으로 Elton John을 사용.
5. 믹 재거(Sir Michael Philip Jagger MBE, 2003)
'세계 최강의 록 밴드'로 불리는 롤링스톤즈(The Rolling Stones)의 리더 믹 재거는 대중음악에 대한 공로를 인정 받아 2003년에 수작. 작위 수여식은 엘리자베스 2세 여왕이 아닌 찰스 왕세자(Prince Charles)가 대신 수행. 당시 일각에서는 믹 재거의 평소 품행을 탐탁지 않게 생각해 온 여왕이 병원 일정을 만들어 작위 수여식을 참석을 피했다는 소문이 돌기도.
아일랜드를 대표하는 록 밴드 U2(유투)의 리더이자 사회운동가로 널리 알려진 보노는 음악과 자선활동에 기여한 공로로 2007년에 수작. 영국인이 아닌 아일랜드인이므로 영국 왕실에 의한 작위 수여식 없이 당시 아일랜드 주재 영국 대사가 명예기사 증서를 전달.
7. 밴 모리슨(Sir George Ivan Morrison OBE, 2016)
'켈트(Celt)족의 혼을 노래하는 뮤지션'으로 불리기도 하는 밴 모리슨 역시 아일랜드인의 피를 이어받았지만 영국령인 북아일랜드 태생으로 국적은 영국인(영국의 공식 국호는 그레이트 브리튼과 북아일랜드 연합왕국(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따라서는 그는 2016년 찰스 왕세자로부터 정식 기사 작위를 수작. 서훈 사유는 음악과 북아일랜드 관광에 대한 기여.
<세일링(Sailing)>, <매기 메이(Maggie May)> 등의 히트곡과 특유의 허스키한 목소리로 전 세계적으로 1억 장 이상의 음반 판매를 기록하고 있는 로드 스튜어트는 2016년 역시 음악과 자선활동에 대한 공로로 윌리엄 왕세손(Prince William)으로부터 수작.
9. 레이 데이비스(Sir Raymond Douglas Davies CBE, 2017)
록 그룹 킹크스(The Kinks)를 이끌며 밴드와 솔로 작품을 통해 재치 가득한 풍자로 영국인의 인상적 삶을 세계에 알려온 레이 데이비스는 지난 봄(2017) 찰스 왕세자로부터 수작. 배우, 연출가로도 활동해 온 그의 서훈 사유는 예술에 대한 기여.
흥미로운 점은 최근 들어 록 뮤지션에게 작위를 주는 경우가 부쩍 늘고 있다는 점인데 이는 1960년대초에 태동한 영국의 록 음악이 반세기 넘는 시간을 거치면서 영국 대중문화의 큰 축을 이뤄 영국 문화 수출의 근간이 됐고 그 선구자들이 대부분 연령 70대의 문화계 원로로 자리잡았기 때문으로 분석된다. 영국 언론을 보면 당분간 이런 추세가 이어질 것으로 보는 전망이 많다. 내년 초 2018년 수작자 명단 발표를 앞두고 지미 페이지(Jimmy Page OBE, Led Zeppelin), 브라이언 메이(Brian May CBE, Queen), 로저 달트리(Roger Daltrey CBE, The Who), 에릭 클랩튼(Eric Clapton CBE), 데이비드 길모어(David Gilmour CBE, Pink Floyd) 등이 신년 수작자 예상 명단을 오르내린다.
(디자인=정혜연, 사진=게티이미지코리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