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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틸러슨 發 '조건 없는 대북 대화론'의 실체

[취재파일] 틸러슨 發 '조건 없는 대북 대화론'의 실체
지난 한 달 사이 북한과의 대화론을 놓고 갑론을박이 있었던 미국의 입장이 정리됐다.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최대한의 압박 기조를 유지하겠다’이며, ‘지금 시점에서 대화는 적절치 않다’는 것이다. 지난 12월 12일 틸러슨 국무장관이 북한에 던진 ‘대화 초대장’은 없었던 일보다 못한 일이 돼 버렸다. 그럼에도 미국의 속내를 정리하고 확인해두는 일은 한반도 상황(대화 국면으로 전환이든 대치 국면이 지속되든 간에)이 내년에도 미국 내 주요 화두가 될 것이 분명하다는 점에서 요긴하리라 생각된다.

틸러슨 장관은 지난 27일 뉴욕타임스에 ‘나는 우리의 외교가 자랑스럽다’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북한 관련 핵심 내용은 ‘북한의 비핵화가 이뤄질 때까지 대북 압박을 계속할 것’이라는 데 방점이 찍혔다. ‘국제적인 고립을 통해 북한 정권을 최대한 압박하겠다. 그래서 북한을 핵과 미사일 프로그램 포기에 대한 진지한 협상에 응하도록 만들겠다’는 취지다. 스스로 논란을 낳았던 대화 조건에 대해서도 ‘대화의 문은 열려있지만 북한 정권이 협상 테이블로 돌아오기 위해선 그럴만한 수고를 해야 한다’고 말했다. 협상 재개에 앞서 조건이 있음을 시사한 것이다.

보름 전으로 시계를 되돌려보면, 틸러슨의 발언이 얼마나 선회했는지 알 수 있다. 12일 틸러슨은 한미 외교안보전문가 초청 포럼에서 ‘북한이 대화를 원한다면 미국은 언제든(anytime), 조건 없이(without precondition) 대화할 준비가 돼 있다’고 밝혔다. 심지어는 “그냥 만나자고 해서 날씨 이야기를 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본인이 지난 8월 전제조건으로 못 박았던 핵무기 포기라는 단서도 떼 버렸다. “(북한이 투자를 많이 한) 핵무기 프로그램을 포기해야만 대화할 수 있다고 하는 건 현실적이지 않다”고 했다. 그러면서도 한 가지 단서는 붙였다. “생산적인 대화를 하려면 (도발 중단을 의미하는) 휴지기(a period of quiet)를 가져야만 한다”는 것이다. 조건 없는 대화라는 큰 주제에 묻혔지만 깨알 같은 조건은 붙어있었던 셈이다.

틸러슨의 깜짝 제안의 약효는 하루도 가지 못했다. 이미 당일에 샌더스 백악관 대변인(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정확하고 때로는 직설적으로 전달해온 인물이다)이 “북한은 위험한 방식으로 행동하고 있으며 이런 북한에 대한 트럼프 대통령의 생각은 바뀌지 않았다”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불이 제대로 꺼지지 않자 다음날인 13일, 미국의 외교안보정책을 총괄하는 백악관 국가안보회의(NSC)가 나섰다. 앤턴 대변인은 “최근 북한의 미사일 발사(11월29일 화성-15형 발사)를 고려하면 지금 북한과 대화할 시점이 아니다”고 밝혔다. 나아가 “북한이 추가로 핵이나 미사일 실험을 하지 않는 등 행동에 개선을 보이지 않으면 어떤 대화도 없을 것”이라고 못을 박았다. 국무부도 ‘틸러슨 장관 발언의 본 뜻은 무조건적인 대화가 아니었다’며 진화에 가세했다. 나워트 대변인은 “틸러슨 장관이 새로운 정책을 만들어 낸 게 아니라, 신뢰할 수 있는 대화를 북한이 하고자 할 때 미국도 대화의 문을 열어 둔다는 정책 그대로를 말한 것”이라고 브리핑했다.

NSC와 국무부 대변인의 말에서 공통 부분을 추출해 내면 다음과 같다. 대북 정책의 핵심은 비핵화이며 이를 위해 북한에 대한 최대한의 압박 기조는 유지하되 대화의 가능성도 열려있다는 것이다. 다만, 대화의 시기는 지금 당장은 아니라는 것으로 정리가 된다. 핵심이라고 할 대화의 조건은 무조건은 아니며 최소한 일정 기간 추가 도발 중단 의사를 북한이 밝혀야 한다로 요약된다. 다시 27일 틸러슨 장관의 뉴욕타임스 기고문과 일맥상통하는 취지다.

결과적으로는 미국의 외교수장인 국무장관이 실없는 말을 했다가 없었던 일처럼되어버린 상황, 그렇다면 틸러슨의 ‘언제든’과 ‘조건 없는 대화’라는 제안은 말 그대로 실언(失言)이었던 것일까? 아니면 트럼프 대통령과 교감 아래 이뤄진 역할 분담이었던 것일까?
트럼프 틸러슨
틸러슨 발언 이후 미국 언론들은 틸러슨이 속된 말로 ‘똥볼을 찼다’는 식의 보도를 쏟아냈다. 뉴욕타임스는 “북한과의 만남 제안은 북핵 해법에 대한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과 틸러슨 국무장관의 간극을 공개적으로 드러낸 최신 사례”라고 지적했고, 워싱턴포스트도 “틸러슨 장관과 백악관이 의견을 같이 하는지에 대한 의문이 있다”고 분석했다. 이런 보도의 대부분은 백악관에서 대북 강경론을 대변하는 관리들의 입을 통해 전달돼왔다. ‘트럼프 행정부 내에서 틸러슨의 말을 아무도 신뢰하지 않는다’는 전언까지 나오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틸러슨이 고전은 하고 있지만 건재하다’는 징후 역시 곳곳에서 포착되고 있다. 지난해 12월 임명되는 날부터 경질설에 시달려온 틸러슨은 최근에는 내년 2월 경질설까지 나올 정도로 장관 수명(?)을 연장해왔다. 최근에는 측근인 손튼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대행이 대행 꼬리를 떼고 정식으로 차관보에 임명됐다. 워싱턴포스트는 ‘손튼 임명이 백악관과 힘겨루기를 하고 있는 틸러슨의 승리’라고 전했다. 무엇보다 틸러슨 장관이 트럼프 대통령과 수시로 대면 접촉을 계속하고 있다는 건 백악관 관리들의 전언보다 주목해야 할 정보다. 실제로 틸러슨은 조건 없는 대화 제안을 한 다음날 트럼프 대통령과 비공개 면담을 했다. 미 행정부 사정에 정통한 우리 정부 관계자는 “트럼프 대통령이 국무부에 전적으로 힘을 실어주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국무부가 이 국면에서 무엇이라도 해보려고 하는 것에 지난 9월 ‘시간 낭비하지 말라’고 틸러슨을 면박한 것처럼 반대하고 있지도 않다”고 분석했다.

미 행정부 내의 의견 충돌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다음 질문들에 대한 답이 궁금해지곤 한다. 과연 대화를 무엇을 위한 대화이며, 대화는 다른 옵션보다 무조건 우위에 있는 방책인가 하는 것이다. 역으로 군사옵션이 최고의 대북 억제책인가에 대한 의문도 마찬가지다.

지금 한반도 상황은 미 본토를 겨냥한 북한의 핵도발이라는 미증유의 사태에, 그 해법을 놓고 미국과 중국 간에 파워게임이 결합돼  복잡함을 더하고 있다는 시각이 많다. 미국 현지에서 보면 트럼프 행정부(국무부, 국방부, 재무부 등등) 각각이 북한 관련 대책을 내놓고 경쟁하고 있는 양상이다. 국무부는 외교적 해법을, 국방부는 군사옵션 준비를, 재무부는 경제적 제재를 나눠 맡는 식이다.

그렇다고 트럼프 대통령이 이들 부처를 총괄하면서 당근과 채찍을 뜻하는 ‘굿캅(good cop)-배드캅(bad cop) 전략’을 채택하고 있느냐? 그것 역시 “글쎄요?”다. 북한도 틸러슨 장관의 조건 없는 대화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였다. 노동신문은 논평을 통해 “조건 있는 회담이든 조건 없는 회담이든 미국이 노리는 것은 우리의 핵포기”라며 “핵 억제력은 흥정물이 될 수 없다”고 분명히 했다. 미국 역시 대화와 협상은 엄연히 분리하고 있다. 틸러슨 장관도 자신의 조건 없는 대화 발언을 수습하면서 “북한과 협상을 하자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시작하자는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미국과 북한 서로가 서로의 패를 알고 있다는 말이다.

정리해보면 미국이 말하는 대화는 북한이 핵포기에 이르는 입구로서의 대화이나 행정부 내 옵션으로는 우선순위가 높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북한의 경우 최대 요구치는 미국에 의한 핵무력 인정에 있고, 이는 날씨 이야기를 하는 대화로는 인정받을 수 있는 성질이 아니라고 판단한 걸로 읽힌다. 그렇다고 일절 대화 없이 북핵 문제가 풀릴 수는 없는 법, 새해에 작은 단서라도 마련될 지 지켜볼 일이다. 그 시작은 (경질되지 않는다면) 역시 틸러슨의 입에서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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