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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뷰] '1987', 이렇게 광장은 역사가 되었다

[리뷰] '1987', 이렇게 광장은 역사가 되었다
역사학자 에드워드 카(Edward Hallett Carr)는 자신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서 역사는 본질상으로 변화이며, 운동이며, 진보라고 했다.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1987년이라는 격동의 시기를 복기할 때 이 말은 절묘하게 적용된다. 87년은 변화와 운동과 진보의 시발점이었다. 그리고 과거는 현재와 이어진다.

1987년 1월 13일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생 박종철(여진구)은 치안본부 수사관 6명에게 연행된다. 남영동 대공분실로 끌려간 박종철은 심문을 받던 중 수사관들에게 폭행, 전기고문, 물고문 등 당해 하루 만에 사망한다. 치안본부의 우두머리 박 처장(김윤석)은 "보따리 하나 터졌을 뿐이다. 당장 화장하라"고 엄포를 놓는다. 

서울지검 공안부장 최 검사(하정우)는 박종철이 고문치사임을 직감하고 화장동의서에 사인하지 않겠다고 버틴다. 그리고 이 사건을 언론에 흘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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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은 초, 중반까지 사건의 사실적인 묘사에 치중하며 인물로부터 거리를 둔다. 시대의 분위기, 인물의 성격, 사건의 본질 등에 대해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관찰과 묘사를 보여주며 보는 이들을 이 세상에 들어오게끔 만든다. 시대의 눈 역할을 한 김우형 촬영 감독의 카메라와 시대의 공기 역할을 한 한아름 감독의 탁월한 미술도 관객의 빠른 진입을 돕는다. 

이 과정에서 관객이 알아야 할 정보를 누락 없이 제공하고, 기억해야 할 진실을 되새기게 만든다. 지난 8월 개봉해 천만 관객을 동원했던 영화 '택시운전사'가 5.18에 대한 내부의 시선을 담지 않고 우회로를 선택했던 아쉬움도 해소한다. 

장준환 감독은 시작부터 끝까지 등장하는 대부분 사람의 실명과 신분을 명시한다. 희생자와 가해자와 방조자와 고발자 등 선악을 가리지 않고 수많은 사람을 역사의 주인공으로서 소환해낸다. 역사에 이름과 행적이 기록된다는 것, 그 책임감을 되새기기 위한 의도는 아니었을까 싶다. 

중반 이후부터는 '보통 사람들'의 이야기로 채워진다. 한 시대와 체재가 전복되기 위해서는 아래로부터의 꿈틀거림이 필수적이다. 이는 지난해 겨울, 광화문의 외침과 결과로도 체감할 수 있는 사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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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은 총과 전기의자가 자유를 억누르고 있던 시대에도 펜은 꿈틀거렸고, 대중들의 화는 들끓었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보도 지침을 어기고 진실을 보도한 기자, 사건의 참상을 알리는 편지를 실어나르던 교도관, 신의 복음만큼이나 세상의 순류에 관심을 가졌던 종교 운동가, 인권을 짓밟는 독재 군부에 화가 난 대학생 등 각자의 사연과 계기가 공동의 소명과 맞닿았다. 이 역시 실화에 기반을 둔 드라마다.

플롯 측면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절대악 캐릭터를 중심에 두고 이에 대항하는 캐릭터를 얼기설기 엮어놓았다는 점이다.

김윤석은 1950년 월남해 간첩 및 용공사건을 전담하는 대공수사처 우두머리가 된 실존 인물 박처원 역할을 맡아 잘못된 신념으로 똘똘 뭉친 안타고니스트를 연기했다. 평안도 사투리부터 고저를 넘나드는 감정 연기까지 어느 것 하나 흠잡을 데 없는 명연기를 펼쳤다. 감정의 분출과 절제마저 정교하게 세팅된 그의 연기는 캐릭터를 이유 있는 악역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아니라 인물로부터 도망치게 만들어버린다. 

하정우는 사건을 은폐, 축소하려는 박 처장에게 법의 힘을 빌어 제동을 거는 최 검사로 분했다. 동시대의 스타일을 흡수한 외형으로 등장해 탈시대적인 자유로운 연기로 팽팽한 극에 활기를 불어넣는다. 능구렁이가 담장을 넘듯 얄밉고 능청스러운 연기가 일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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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윤석을 중심으로 하정우, 유해진, 박희순, 이희준, 김태리, 설경구, 강동원, 고창석, 여진구 등 주연급 10여 명의 배우가 나오는 이 영화는 비중과 존재감이 비례하지 않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배우가 자신의 역량과 매력을 뽐내는 구간을 하나씩 가지고 있다. 2시간 내외의 영화에서 이렇게 많은 주인공이 소비되지 않고, 장면 장면을 장악해나가는 것을 보는 것도 오랜만이다. 

특히 박종철 열사의 가족으로 등장하는 김종수, 조우진, 김혜정의 짧지만 강렬한 연기는 보는 이의 가슴을 후벼판다. 강물이 꽁꽁 언 탓에 유골이 스며들지 못하고 겉돌자 강으로 뛰어드는 아비의 모습은 영화가 끝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을 잔상을 남긴다.  

'1987'은 최근 몇 년 사이 만들어진 사회파 영화 중 가장 건조하고 정확하게 폐부를 까발리면서도 섣불리 눈물을 강요하지 않는다. 관객의 감정을 쥐고 흔드는 건 말초적 자극과 신파의 조성이 아닌 실존했던 역사, 실재했던 인물이 보여준 소명 의식에 대한 자연스러운 동화일 것이다. 

이 영화의 유일한 아쉬움은 중반 이후 이한열 열사가 등장하면서 극의 분위기가 급작스레 바뀐다는 것이다. 앞선 이야기가 흥미진진한 사회파 다큐멘터리 영화라면 한열(강동원)과 연희(김태리)의 에피소드가 이어지는 중반부 일순간 분위기가 청춘 영화로 전환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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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한열과 만난 연희는 시대 정신을 흡수하는 계기를 마련한다. 또한 분위기를 환기하며 관객의 숨통을 튀어주는 기능도 한다. 그럼에도 영화의 장르와 톤이 휘청이는 듯한 분위기 변화는 다소 아쉽다. 

박종철로 열고, 이한열로 닫는 이 영화의 탁월한 플롯이 샛길로 빠지지 않고 직선으로 힘있게 뻗어 나갔어도 충분한 울림을 줬을 것이다.  

1987년 6월 항쟁은 직선제 개헌이라는 결과를 끌어냈다. 그러나 힘들게 얻어낸 투쟁의 결과는 국민의 잘못된 선택으로 이어졌다. 뼈아픈 시행착오였다. 

역사는 어떤 식으로든 나아가지만, 그것이 속도와 넓이를 확장하는 전진만은 아닐 수도 있다. 답보와 퇴행의 여지도 있다는 점에서 예나 지금이나 같은 속성을 띤다. 그래서 역사는 만들어가는 주체에 따라 형태와 성격을 달리하는, 어떤 의미에서는 생물이다. 

* 영화의 엔딩크레딧을 끝까지 볼 것을 권한다. 

개봉 12월 27일, 상영시간 129분, 15세 관람가.
    

(SBS funE 김지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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