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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나이가 어때서…" 칠순에 한글 깨친 할머니들의 시화집

"내 나이가 어때서…" 칠순에 한글 깨친 할머니들의 시화집
"얼굴 한 번 못 본 신랑님과 딸만 여섯 놓고 나니 맵디매운 시집살이 고추보다 더 맵더라. 동지섣달 긴 긴 밤이 왜 이리도 기나긴지. 춥디추운 겨울날도 지나가면 눈이 녹고 봄이 오듯 내 나이 칠십에 눈이 녹고 봄이 왔네."

부산에 사는 성순자(70) 할머니가 까막눈 신세를 벗어나 생애 처음으로 한글로 쓴 시 '고된 시집살이'의 한 부분이다.

성 할머니는 맏이로 태어나 동생들을 돌보다 어려운 집안 형편에 조금이라도 부담을 덜려고 열일곱 살에 얼굴 한 번 못 본 신랑에게 시집갔다.

아들을 못 낳았다는 '죄책감' 속에 한글을 배운다는 것은 사치로 여겨졌고, 반백 년이 넘는 세월이 훌쩍 흘렀다.

황혼의 문턱에서 한글을 배우면서 성 할머니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됐다.

'고된 시집살이'는 부산진구청이 최근 발간한 시화집 '내 나이 칠십에 눈이 녹고 봄이 왔네'에 첫번째로 실렸다.

시화집에는 부산진구청이 부산진구 평생학습관, 성지문화원, BBS중고등학교, 삼광한글학교, 부산진구 종합사회복지관, 당감종합사회복지관 등 관내 8개 성인문해반 수강생 300여명을 대상으로 한 시화전 출품작 중 62편이 담겼다.

수강생들의 나이는 대부분 70대로 전쟁과 가난 탓에 학교에 못 다니고 이렇다 할 교육의 기회가 없어 한글을 읽고 쓸 줄 모른 채 살았다.

낫 놓고 기역 자도 모르던 할머니들은 저마다의 가슴에 평생 품고만 있던 생각을 성인문해반에 오면서 한글로 표현할 수 있게 됐다.

조한순(71) 할머니는 '시작'에서 "남편과 사업을 하는데 받은 어음에 '싸인'(사인)을 못해주어 남편을 찾아다녔습니다"라고 털어놓았다.

조 할머니는 한글을 모르던 과거의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한글을 더 많이 알고 싶다는 열정을 불태우고 있다.

청일점인 이재강(73) 할아버지는 이제 비가 와도 친구들과 부침개를 구워놓고 막걸리를 마시며 놀지 않는다.

주변의 유혹을 물리치고 아내와 함께 성인문해반에 한글을 배우러 간다.

이 할아버지는 '마누라'에서 "무슨 소리하요(소리해요). 비와도 가야제(가야죠)…옷이 다 저져도(젖어도) 둘이 학교에 오요(와요)"라고 표현했다.

성순석(73) 할머니는 '우리 영감'에서 "영감님 오토바이 타고 공부하러 오넌 사람은 내뿌이다(나뿐이다). 쎄게 달리면 땀이 쑥 더러(들어) 간다"라고 자랑한다.

이말식(71) 할머니의 '여름밤'을 보면 공원에서 산책하며 바라본 남편에 대한 애틋함이 생생하게 느껴진다.

"남편과 함께하는 한 여름 밤이 요즘 왜 이리 설레이는지 청춘이 다 지나버린 뒤안길에서 주책스럽다는 생각에 나홀로 얼굴을 붉히며 살며시 남편에(남편의) 옆모습을 쳐다본다."

2010년 남촌문학상 시부문 당선자인 하계열 부산진구청장은 발간사에 "진솔한 표현이 그 어느 시인이나 소설가의 글보다 마음에 와 닿는다"며 "앞으로 더욱 더 많이 배우셔서 좋은 글 많이 쓰시고 하루하루 재미있는 인생 사시길 바란다"고 썼다.

(연합뉴스, 사진=부산진구청 제공/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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