활자와 삽화가 뿌려진 종이 낱장들을 한데 모아 아름다우면서도 오래 볼 수 있는 한 권의 책으로 만들어내는 작업을 유럽에서는 '예술 제본'이라는 하나의 공예로 발전시켰습니다. 대량화, 상업화된 기계식 제본과 구분하기 위해 '예술(d'Art)'이라는 수식어가 붙었습니다. 고전적인 방식으로 이뤄지는 이 책 만들기 작업은 모두 수작업으로 이뤄지고, 한 권을 제본하는데 짧게는 한 달에서 길게는 몇 개월이 걸리기도 합니다.
사람들은 똑같은 다른 책이 있더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의미가 담긴 책에 생명을 다시 불어넣고 오래 간직하기 위해 예술제본가를 찾습니다. 아버지의 선물, 남편과의 추억이 담긴 대학교재, 구하기 어려웠던 소중한 사전. 또 직접 쓴 원고나 편지, 일기 등을 책으로 만들기 위해 방문하는 손님들도 있습니다.
서울 연남동에서 예술제본 공방 렉또베르쏘를 운영하는 경력 16년의 를리외르(예술제본가) 조효은 대표에게 책이 다시 태어나는 과정과 손님들의 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예술제본이란?
개인적으로 저는 제본가가 하는 일이 이런 거라고 생각해요. 책이 만들어지기까지 그 이전의 여러 사람들의 노력, 예를 들면 작가도 있을 수 있고요, 식자공, 문선공, 그 이전에 종이 만드는 사람이 있고. 책 한 권을 위한 그 모든 사람의 노력을 제본가는 한 권의 책으로 엮어서 완결을 시켜주는 일을 한다고 생각해요. 그러면서 이 책이 문화의 전달자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만들어주는 거예요.
그냥 낱장인 상태로, 활자인 상태로 있으면 그건 단순한 정보지만, 이 책이 후대로 이어지는 순간 그건 인류의 유산이 되잖아요. 요즘은 제본 말고도 여러 가지 매체들이 있지만 그래도 인류의 가장 기본적인 정보 전달 저장 장치는 책이잖아요? 그래서 책을 견고하게 만들어서 오래 보존하도록 하는 역할을 하는 사람이 제본가죠.
예술제본은 기본적으로 유럽의 책 문화에서 시작된 것이기 때문에 우리가 받아들이기에는 조금 이질적인 부분이 있을 수 있어요. 유럽에서는 그 사람들이 몇백 년 전부터 쭉 함께 발전되는 걸 계속 봤던 문화고, 우리 같은 경우는 일제시대를 거치면서 이미 산업화되고 대량화된 책 문화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 이전에 이렇게 책을 만들었던 방식에 대해서는 생소할 수도 있어요. 그래서 지금에 와서 뭔가 '어? 이건 없었던 새로운 것이다.'라고 느껴질 수도 있는데, 실제로는 몇백 년 전부터 꾸준히 이어져 내려오던 책 문화고, 그게 켜켜이 쌓여서 지금 같은 책의 구조나 물성들이 이뤄진 거예요.
● 누가 제본을 맡기나요?
기본적으로 책을 소중하게 생각해주시는 분들이에요. 그리고 자신에게 특별한 가치가 있는 책인 경우에 (공방에) 찾아오세요.
서점에 가면 내가 얼마든지 돈을 내면 구입할 수 있는 책이지만, 어떤 책은 “내 손에 들고 있는 그 책 한 권 자체가 나에게 너무 소중한 책이기 때문에 똑같은 다른 책이 있더라도 바꿀 수 없다”라는 그런 책이 있을 수 있고, 절판돼서 더 이상 구입할 수 없는 책인데 책이 낡아서 뜯어지거나 표지가 찢어지거나 했다, 이런 경우에도 저한테 가져오시고요. 그리고 요즘은 직접 원고를 쓰거나 본인의 기록물을 저한테 가지고 오시는 경우도 있어요. 일기나 편지, 성혼선언문 같은 문서를 오래 보관하기 위해 제본하시는 분들도 있고요.
아까 저한테 의뢰를 맡기신 이택규 선생님께서는 처음에는 손녀를 위해서, 손녀가 태어났을 때 한 장 한 장 쓰시던 엽서가 어느덧 분량이 너무 많아진 거예요. 그래서 지금은 몇 천 장 될 거라고 하시는데 그 한 장 한 장 쓰신 엽서들이 쌓여가면서 그걸 그냥 낱장으로 두는 게 아니라 책으로 한 권씩 묶고 싶다. 묶어서 소장을 하고 싶다. 나중에 손녀에게도 보여주고 싶다 생각을 하셔서 의뢰를 하셨는데 제가 엽서를 받아보고, 이건 사실 엄청난 기록이잖아요. 그래서 저도 그런 것들을 보면 좀 욕심이 생겨요. ‘어떻게 튼튼하게 잘 만들어서 소장을 하실 수 있도록 할까?’ 하는 고민도 생기고.
어떤 분은 편지를 신혼 시절부터 꾸준히 남편분한테 거의 하루에 한 장씩 편지를 쓰신 거예요. 그 날 뭐 집에서 있었던 일, 뭐 누가 찾아왔다, 아이가 어떻게 울었다, 아이한테 뭐를 해서 만들어서 먹였다. 정말 생활의 기록인데 그런 것들을 몇십 년 동안 쭉 모아놓으신 것들을 의뢰한 경우도 있었어요. 정말 개인의 역사죠. 그 가족의 역사.
또 코스모스라는 책을 가지고 오신 여성분도 있었어요. 아버지가 선물해준 책이래요. 굉장히 옛날 책이니까 거의 초판본을 가지고 오셨는데, 책도 많이 누레지고, 가장자리도 찢어진 부분이 많고. 근데 책을 보니까 아버님이 쓰신 메모 같은 게 있어요. 본인이 보던 책을 선물해 주시면서 따님한테 메모를 남겨서 주신 거예요. 물론 요즘에 새로 나오는 코스모스 개정판 이런 책들은 훨씬 더 세련되고 종이 질도 좋은데, 따님이 그걸 저희한테 다시 맡기시면서, “나에게 이 책은 하나밖에 없는 특별한 책이기 때문에 제본 의뢰를 한다. 완성이 되면 다시 아버님한테도 보여 드릴 거다.” 하시고 나중에 찾아가실 때도 되게 기뻐하셨거든요. 그런 것도 되게 기억에 남고요.
● 제본 과정을 간단히 설명해주세요
유럽에서는 제본을 건축에 비유하기도 해요. 집을 지을 때 토목공사부터 시작해서 차근차근 집을 지어나가듯이 책 만들기도 마찬가지거든요. 아주 여러 가지 과정이 있고 기초적인 단계가 제대로 돼 있지 않으면 그다음으로 넘어가기가 힘들고 부실하게 작업이 돼 있으면 다 완성된 책에서는 반드시 그게 결과로 나타나거든요.
제본이라는 게 사실 한 종류만 있는 건 아니거든요. 아주 간단한 구조는 간단하게도 만들 수 있는데, 유럽의 고전적인 전통 방식으로 하는 제본은 세세하게 보자면 60가지가 넘는 공정들로 이뤄져 있어요.
▶ 책을 짓다, 예술제본가 를리외르 이야기
숙련된 사람이 작업하면 기본적인 제본은 한 달 정도 걸리고요. 이게 절대 시간이 필요한 작업이라서, 그걸 많이 단축시킬 수는 없어요. 왜냐하면 한 달 동안 계속 붙잡고 있는 건 아니고, 눌러놓고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있고, 말리기 위해 충분히 기다려야 하는 시간도 있고, 그런 시간들이 더해져서 한 달이라는 기간이 걸리는 것이고. 그리고 금박이나 모자이크 같은 장식이 더 들어가면 훨씬 더 오래 걸릴 수 있죠. 책 한 권에 몇 개월이 걸릴 수도 있고요.
● 예술 제본을 어떻게 배우게 되셨나요?
故 백순덕 선생님께서 아마 한국인으로서는 처음 프랑스에서 예술제본을 수학하고 한국에 오셔서 이런 문화가 있다는 것을 소개해 주신 분이에요. 프랑스에서 7년을 공부하고 오셨고, 1999년에 홍대 앞에 처음 ‘렉또베르쏘’라는 공방을 여셨어요. ‘렉또베르쏘(Recto Verso)'라는 말은 책의 앞장과 뒷장이라는 뜻인데,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앞표지 뒤표지의 개념이 아니라 책을 이루고 있는 모든 장이 앞장과 뒷장으로 서로 이어져 있거든요. 그래서 그런 이름을 지으셨고.
저는 2001년에 처음 (백순덕)선생님을 알게 되고, 이 예술제본이라는 작업을 알게 돼서 선생님 밑에서 예술 제본을 배우기 시작을 했어요. 2002년부터는 수제자로 선생님한테 사사하면서 계속 배워 오다가 선생님이 2008년에 별세하시고, 그때 저 말고도 다른 제자들이 여럿 있었는데 제자들이 그래도 이 ‘렉또베르쏘’라는 공방이 한국에 처음 예술제본이라는 것을 소개한 곳이니만큼, 선생님의 유지를 받들어서 우리가 계속 이어나가자라는 결정을 하게 됐어요. 그러면서 제가 수제자였기 때문에 제가 맡아서 계속 공방을 운영해오고 있어요.
네. 프랑스에서 예술제본 비엔날레가 2년에 한 번씩 열리는데, 저희가 2011년부터 학생들이랑 같이 참여를 해오고 있어요. 그래서 성과도 꽤, 상도 여러 번 받고, 올해는 저희 공방이 단체상을 수여받기도 했고, 대전에 계신 선생님이 1등 상 받으셨거든요. 한국에서만 우리끼리만 이런 작업을 하는 게 아니라 이 문화가 시작된 본토에서 우리 실력을 평가받는 기회도 될 수 있고.
그리고 사실은 경쟁이라기보단 축제 같은 개념이거든요. 저희가 책을 보내면 출품한 모든 작품들을 전시를 하고, 전시하는 기간에 가서 보는 거예요. 똑같은 책이지만 이 사람은 어떻게 이 책을 해석하고 표지를 했나. 저 사람은 어떤 제본 방식을 선택하고 어떤 재료를 선택했나. 뭐 500명이 출품을 했으면 500권의 다른 책이 나오는 거거든요. 그래서 그런 대회도 나중에는, 언젠가는 국내에서도 저런 제본 대회를 만들 수 있겠죠. 아직은 조금 시기상조이지만.
사실 뭐 실질적인 고충은 초반에는 제대로 된 재료나 도구를 구하는 것? 왜냐하면 우리한테는 없는 문화이기 때문에 프랑스에서 직접 수입을 한다거나 국내에서 자체제작하기 힘든 것들이 많이 있었어요. 근데 사실 그거는 실질적인 문제고.
제일 힘들었던 건 사람들의 인식에 관한 문제인데, 꼭 굳이 책을 그렇게까지 해야 하느냐 하는 인식을 접하면 책을 만드는 사람으로서 좌절을 하는 경우도 있었죠. 물론 내가 어떤 일을 하는 사람인지 매번 설명을 한다는 것 자체도 힘든 일이기도 했고, 여전히 아직 모르시는 분들도 많긴 하지만.
책이라는 것을 바라보는 관점의 차이일 수는 있는데, 뭐 책을 만들기 위해서 그렇게까지 하느냐. 그런 시선을 접할 때가 초반에 좀 힘들었어요. 다양성을 인정해 주지 않는 거죠. 그런데 뭐, 이해는 돼요. 왜냐하면 내가 전혀 몰랐던 분야고 생각하지도 못했던 부분이기 때문에 그런 시각을 가지실 수도 있다고 생각은 해요.
● 종이책의 미래가 어두운 세상, 예술 제본은 살아남을 수 있을까?
사람들이 다 전자책만 읽고 (종이)책을 소장가치가 없는 걸로 여기거나, 그러면 제본가들이 할 수 있는 일도 사라질 수밖에 없겠죠. 직업적으로 제본가라는 직업을 달고 그걸로 자아실현도 할 수 있고 생계도 유지하고 그렇게 되려면 이 작업을 찾아주는 수요자들이 있어야겠죠. 아까 의뢰하신 분도 그렇고, 책 보수나 이런 걸 맡기시는 분들도 그렇고. 책을 보수한다는 건 그 책을 다시 소장하겠다는 의미잖아요. 그렇기 때문에 책을 소장하고 가치 있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아져야겠죠.
요즘 전자책을 많이 쓰는데 사실 책이라는 것은 전자적인 어떤 전기 혹은 기계가 없어도 바로 집어 들면 볼 수 있는 게 책이잖아요. 빛만 있으면. 해가 떠있으면, 밤에도 달빛에서 보는 게, 집어 들기만 하면 볼 수 있는 게 책인데 그 책이 꼭 디지털로 문화가 바뀐다고 해서 저는 이 물질적인 성격을 갖고 있는 이 종이책 자체가 없어지진 않을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이 책이 없어지지 않는 한 저 같은 작업을 하는 사람들은 계속 있겠죠.
제가 하는 작업이 조금 생소하실 수도 있고 그렇지만, 책을 좋아하시고 소장하시고 소장하길 원하시는 분들께서 이런 작업들도 있구나 하고 애정을 가지고 바라봐주셨으면 좋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