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라이프] 천년 숲의 숨결을 느끼다…함양 상림(上林)

[라이프] 천년 숲의 숨결을 느끼다…함양 상림(上林)
<추야우중(秋夜雨中)>

秋風唯苦吟 (추풍유고음)
가을바람에 괴로이 읊조리나,

世路少知音 (세로소지음)
세상에 알아주는 이 없네.

窓外三更雨 (창외삼경우)
창밖엔 밤 깊도록 비만 내리는데

燈前萬里心 (등전만리심)
등불 앞에 마음은 만 리 밖을 내닫네

통일신라시대가 저물어가는 어느 가을밤, 최치원은 등불 아래 외로이 서책을 뒤적이다 창밖의 빗소리에 온갖 상념에 젖어 든다. 12살의 어린 나이에 중국 유학길에 오르고, 28살의 나이에 조국에 헌신하기 위해 돌아온 지 어언 20여 년, 그 20여 년은 육두품이라는 자신의 신분의 벽에 갇혀 살아온 세월이었다. 그렇게 지방 수령 자리만 맡아 외지를 떠돈 게 또 얼마이던가. 그러한 최치원의 회한과 안타까움이 고스란히 담겨있는 시가 위의 시, <추야우중(秋夜雨中)>이다.

마음과 뜻은 만리(萬里) 밖 큰 꿈을 향해 내달리는데, 현실은 넘을 수 없는 벽 앞에서 좌절하던 시대의 선각자. 그가 최치원이었다. 그렇게 지방 수령 자리를 떠돌다 마지막으로 닿은 곳, 그곳은 내가 나고 자란 천령, 지금의 함양이다.
만추(晩秋)의 상림 (사진=함양군청 제공)
최치원이 함양에 부임했을 당시 함양의 당면한 가장 큰 위협은 함양 읍내를 가로지르는 위천(渭川)의 범람으로 인한 홍수였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최치원은 위천의 가장자리에 둑을 쌓게 하고 둑 위에는 활엽수들을 심게 하였는데 이것이 함양 상림(上林)의 시초라고 전해진다. 상림은 호안림(護岸林: 제방의 보호를 위한 숲)이었다.

사실 상림은 함양이 고향인 대부분의 사람들의 기억 속에는 어떤 형태로든 추억과 맞닿아 있는 곳이기도 하다. 체육대회라든가, 많은 문화행사가 열리던 곳이 이곳 상림이었으며, 또한 연인들에게는 정겨운 데이트 장소였고, 어린 학생들에게는 소풍하면 떠오르는 장소가 바로 상림이었다.
함양 상림 3
● 함양 상림을 걷다

흐린 날만큼이나 스산한 바람이 불던 날, 오랜만에 상림(上林)을 걸었다.

상림을 들어서면 먼저 함화루(咸化樓)가 여행자를 맞는다. 함화루는 원래 조선시대 함양읍성의 남문(南門)이었다. 처음의 이름은 '멀리 지리산(智異山)이 보인다'는 뜻의 망악루(望岳樓)였으나, 1932년 지금의 위치로 옮겨지면서 이름도 함화루(咸化樓)로 바뀌었다고 한다. 본래 함양읍성의 동쪽에는 제운루(齊雲樓), 서쪽에는 청상루(淸商樓), 남쪽에는 망악루(望岳樓) 등 세 개의 문이 있었는데 지금은 망악루만 이렇게 상림으로 옮겨져 함화루라는 바뀐 이름으로 보존되고 있는 것이다.
함양 상림 4
그리고 내가 어릴 적 함화루 앞은 운동장이었다. 언젠가부터 숲의 일부를 헐어 운동장으로 사용했으리라 짐작된다. 함양 사람들에게 이 운동장은 오랫동안 군 단위의 모든 체육대회와 각종 문화행사가 펼쳐지는 여느 도시의 공설운동장과 같은 역할을 하던 곳이었다. 그러니 놀이 문화가 부족하였던 당시에는 이곳이 축제의 장소이기도 했었다. 시골의 무료한 삶 속에서 상림운동장에서 펼쳐지던 커다란 규모의 이런저런 행사는 그야말로 축제였고, 벽촌의 사람들에게는 오랜만의 읍내나들이를 위한 핑계이자 기회였던 것이다.

초등학교 시절, 나 역시 그 축제의 장소에서 50원 정도의 돌아갈 차비를 군것질 하나와 바꿔먹고는 친구들과 어울려 시오리(6km 남짓)의 길을 걸어서 집으로 갔던 기억이 새롭다.
함양 상림 5
숲으로 발걸음을 옮기자, 숲은 천년의 숨결을 품고 있는지라 깊으면서도 그윽하다. 먼 길 떠난 자식의 귀향 소식에 마을 어귀까지 마중 나가는 등 굽은 어머니의 뒷모습처럼 처연하면서도 깊은, 그래서 푸근하고 따스해지는 아릿함이 배여 있다. 원래 '오래된 것'에는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저마다의 색깔과 향기가 스며있는 법이 아니던가.

그래서일까. 숲에 들어서자 저절로 가슴이 펴지고 숨이 깊어진다. 폐부 가득 상쾌함이 밀려든다. 한두 점씩 떨궈지는 새들의 지저귐만이 고요의 호수에 파문이 되어 번져난다. 연무(煙霧)처럼 드리워진 고요에 바람조차도 조심스러워 속삭이듯 부드럽다. 그러니 여행객이야 오죽하랴. 발걸음 소리조차도 자박자박…. 낙엽을 밟는 것조차 조심스러워진다.
함양 상림 6
상림을 걸으면 하늘을 뒤덮어버릴 듯 나무들의 가없는 행렬에 자못 경이로움을 느끼게도 된다. 산이 아닌 평지에 펼쳐진 숲치고는 그 규모가 방대하고 아름답기 때문이다. 나무들의 면면을 보면 천년의 사연을 간직한 나무들이야 어느새 세월의 뒤안길로 사라진 지 오래일 터이고, 지금의 나무들은 그 손자의 손자쯤이 아닐까 싶다. 그래도 천년의 세월 동안 농익은 숲의 밀도는 깊고도 깊다.

숲에는 갈참나무·졸참나무 등 참나무류와 개서어나무류가 주를 이루며, 은행나무·노간주나무·생강나무·백동백나무·비목나무·개암나무·물오리나무·서어나무 등 2만여 그루의 나무가 자라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숲의 하층에는 왕머루와 칡 등이 얽히어 마치 계곡의 자연 식생을 연상시킬 정도로 116종에 이르는 다양한 나무와 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으니 작은 식물박물관이나 다름이 없다.
함양 상림 7
가을로 접어들 무렵의 상림을 걷노라면 졸참나무나 상수리나무가 많은 탓에 낙하하는 도토리 세례를 받기도 한다. 먹거리가 풍부하니 청솔모며 다람쥐들이야 오라지 않아도 원래부터 그들의 삶터였던 양 도토리를 물고 이리저리 뛰는 모습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는 곳이 상림이다.

상림은 예전에는 대관림(大館林)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었다고 한다. 그러던 것이 큰 홍수로 숲의 가운데 부분이 무너져 버렸고, 그 무너진 부분을 경계로 숲은 위아래로 나뉘는데 위쪽은 이름 그대로 상림(上林)이 되고, 아래쪽은 하림(下林)이 되었다고 한다. 이후 오랜 세월이 흐르며 하림은 마을이 조성되는 등의 이유로 훼손되어 버려, 상림만이 온전히 보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상림은 이 나라 최초의 대규모 인공림(人工林)이라는 역사적 가치는 물론이고, 치수(治水)의 교본이라는 문화적 가치뿐만 아니라 남부 낙엽활엽수림의 극상(極相)을 이루고 있는 학술상 가치 또한 매우 높은 숲이라고 한다. 그런 이유로 상림은 천연기념물 154호로 지정돼 보호되고 있다.
상림의 사운정
● 비운의 학자이자 행정가, 최치원

얼마 걷지 않아 사운정(思雲亭)이 보인다. 고운(孤雲) 최치원을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다. 글자 그대로 고운(孤雲) 선생을 그리며(思) 지은 정자가 사운정이다. 1906년 건립 당시에는 모현정이라는 이름이었으나, 이후 사운정으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고 한다.

고운 최치원, 그는 비운의 학자이자, 행정가였다. 또한 유학과 도학에 통달한 선인(仙人)이기도 했던 인물이다. 하지만 세상은 그의 능력을 구하기는커녕 오히려 외면하고 말았으니, 개인 최치원과 신라 모두에게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최치원은 12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당나라에 유학하여 6년 만에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과거시험인 빈공과에 급제한 수재였다. 그러나 당나라라는 외국에서, 그것도 어린 나이에 그의 뜻을 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과거급제 후 2년여의 세월 동안 그는 관직을 받지 못해 떠돌아야 했으며, 그나마 받은 관직도 미관말직이었다.
함양 상림 10
그러다 '황소의 난' 당시 황소 토벌대를 이끌던 고병의 수하로 있으면서 <토황소격문(討黃巢檄文)>를 써 잠시 이름을 얻는 듯하였지만 그뿐이었다. 반란군 수장과 세상에 고하는 격문을 일개 미관말직인 20대의 관원 이름으로 발표할 수는 없는 일이지 않은가. 그러니 토황소격문은 당연히 토벌대장의 이름으로 발표되었을 것이고, 황소를 놀라게 한 격문을 쓴 최치원의 명성 역시 토벌대 내의 일이었을 것이다. 결국 격문을 쓴 이가 누군지 아는 사람은 안다지만, 당시 최치원은 글 좀 쓰는 참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나름 이름을 얻었다 하더라도 망해가는 당나라에서 그의 역할은 한정적일 수밖에 없었고, 결국 최치원은 28살이 되던 해에 신라로 돌아온다.

당시의 왕은 헌강왕. 역사적으로 신라는 당나라와의 외교적 관계가 중요했던지라 유학파에다 당나라의 과거에 급제한 이력의 최치원은 국가의 중요한 자산이었다. 그렇게 해서 맡겨진 역할은 양국 간의 외교 문서를 담당하는 외교관이었다. 그렇게 출세가 보장되는 듯했다. 하지만 거기까지였다.
함양 상림 11
최치원이 신라에서 행정 관료로서 성장하기에는 근원적인 한계가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골품제도라는 신분제도였다. 육두품인 그에게 성골, 진골들이 득세하는 중앙 관료 시장은 넘볼 수 없는 벽이었던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정권까지 교체되자, 그는 지방 외직을 자청한다. 그는 웅주의 태산군(太山郡, 전북 정읍시)과 부성군(富城郡, 충남 서산시) 등의 태수를 맡으며 지방 수령으로서의 긴 여정을 시작한다. 그러다가 그의 마지막 임지가 된 곳이 천령군, 지금의 함양이었던 것이다.
최치원의 초상
최치원은 함양 태수로 있으면서 망해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울 방도를 마련하고자 고군분투한다. 그렇게 해서 나온 것이 당시 왕인 진성여왕에게 올린 '시무(時務) 10조(條)'라는 개혁안이었다. 시무(時務) 10조(條)의 주 내용은 귀족이 아닌 전문 행정관료에 의한 국가통치를 제안하는 것이었다. 귀족들의 부정부패와 무능으로 점철되어 망해가는 신라를 일으켜 세울 수 있는 마지막 방도는 엘리트 관료들에 의한 정국 운영만이 그 답이라고 그는 주장했던 것이다. 거기에는 자신의 처지를 반영한 바도 없지는 않을 것이다.

전하는 시무(時務) 10조(條)의 일부 내용은 다음과 같다.

- 정치는 인을 가지고 근본을 삼고……백성을 건져주는 것으로서 인을 이룬다.
- 신하를 알아보기는 어진 임금밖에 없다
- 비상한 인재가 있어야 비상한 일이 있고, 비상한 일이 있어야 비상한 공이 있다.
- 천하를 다스리려면 먼저 부정 출세를 막아야 하고 어진 선비의 진출 길을 막아서는 안 된다.
- 장차 곤궁에 빠진 백성을 살리려면 진실로 유능한 관리들에게 의지해야 할 것이다.

정도준 작(作), ‘추야우중’
시무10조의 내용을 보노라면 최치원이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공부한 유학자로서의 모습이 드러난다. 유학의 핵심 사상은 수기치인(修己治人), 즉 자기 자신의 수양에 힘쓰고 천하를 이상적으로 다스리는 것을 목표로 하는데, 최치원 역시 이를 제안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나라에서 공부하고, 또 관료로서 생활해본 경험은 신라의 신분제도를 인정하고 수용하기가 쉽지 않았을 것이다. 중국의 역사에는 신라의 골품제와 같은 신분제도가 존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왕을 제외하고, 양민이면 누구나 과거를 통해 통치계층에 참여할 수 있는 길이 열려있던 곳이 중국이 아니던가. 그에 비교되는 신라의 세습되는 신분제도는 최치원에게 그야말로 만악(萬惡)의 근원이었을 것이다.
함양 상림 14
여하튼, 시무(時務) 10조(條)를 받아든 진성여왕은 크게 기뻐하며 국정에 반영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최치원에게 상으로 육두품의 최고 벼슬인 아찬을 제수한다. 하지만 벽은 높고 또 공고했다.

왕의 관심과는 별도로 골품제도라는 단단한 신분제의 벽은 쉽게 넘을 수 있거나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러니 신라에서는 아무리 유능하다 한들 그것이 신분을 뛰어넘을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던 것이다. 시무10조의 개혁안마저도 어쩌면 이루어지기 힘든 이상론일 뿐이었을 것이다.
함양 상림 15
게다가 신라는 이미 기울어져 가고 있었다. 지방 곳곳에서 반란은 끊이질 않았고, 궁예와 견훤이라는 후삼국시대의 주역들 역시 기지개를 켜고 있었던 때가 바로 그때였다. 진성여왕에 대한 후대의 평가 역시 그리 후하지 않은 것을 보면 그런 통치력으로 새로운 질서를 만든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했는지도 모른다. 여하튼 망국으로 가는 롤러코스터를 탄 시점에 발표된 최치원의 개혁안은 비록 왕의 관심을 얻었는지는 모르나, 세상의 귀에는 공허한 메아리 정도가 아니었을까. 그렇게 시대적 운(運)마저도 최치원을 비켜가고 말았다.

이제 더 무엇을 할 것인가? 최치원에게는 더 이상 할 수 있는 역할도 의욕도 이유마저도 사라져버렸다. 떠나는 것 말고는, 세상과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는 것 말고는 그에게 더 이상의 선택지는 남아 있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천령 태수를 마지막으로 홀연히 사라져 버리고 만다. 지리산으로 들어가 신선이 되었다는 설도 있고, 해인사로 들어갔다는 설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한 영웅적 인간마저도 공고한 현실의 벽 앞에서는 그저 무력한 존재였을 뿐이라는 사실이다.
운명은 가혹하고도 냉혹한 것이었다 
 (사진=함양군청 제공)
운명은 가혹하고도 냉혹한 것이었다. 몰락하는 나라와 신분제라는 이중의 굴레 속에서 나름 고군분투하였던 학자이자 행정가이며, 문장가였던 최치원은 그렇게 역사의 뒤편으로 쓸쓸히 퇴장하고 말았다. 다만 그의 기나긴 상념의 시간들은 학문과 문학적 성취로 남았으니, <계원필경>을 위시한 수많은 서책과 문집이 그것이다. 결국 그 상념의 시간들이 최치원을 오늘날까지 살아 있게 했으니, 참으로 역사는 모를 일이다.

사운정의 날아갈 듯한 처마 끝으로 살며시 부드러운 바람이 인다. 마치 어루만지듯이…. 최치원이 조성한 그 숲의 바람이, 그 이파리가 그를 추모하기 위해 세워진 정자를 쓰다듬으며 그의 지난한 여정을 추억하고 있었다.

나 역시 사운정 앞에 서면 오롯이 살아나는 추억이 있다. 초중학교 시절 군 단위 글짓기 대회가 열린 주요한 장소 중 하나가 이곳 사운정이었던지라, 학교 대표로 여러 번 사운정 주변에서 글을 짓고 썼던 기억이 난다. 그러다 말석의 입선이라도 하는 날에는 사운정 누각의 시상대에 올라 상장과 사전류의 상품을 받고는 득의양양했었으니…. 그마저도 오래된 일이나, 다시금 사운정 앞에 서니 어제의 일만 같고, 그저 아련할 따름이다.
함양 상림 18
● 소멸과 탄생이라는 긴 거듭남을 통해 숲은 비로소 자연이 된다.

숲은 가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숲 사이로 난 목책으로 구분되어진 길은 구불구불 이어지다가 이내 널찍한 산책로로 바뀐다. 하지만 오전이라는 시간 때문인지 오가는 이는 드물어 고즈넉하다.

상림의 길이는 1.6km쯤 된다고 한다. 오래전에는 3km나 되었다고 하나 아쉽게도 상림과 하림으로 나뉜 후 하림이 사라져버렸으니 어쩔 수 없는 결과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 1,6km의 길이만으로도 오래된 숲의 풍미를 느끼기에는 전혀 부족함이 없다. 비록 인공숲이었다고는 하나 지금의 상림에서 인공숲의 흔적은 어디에서도 찾아 볼 수가 없다. 그만큼 푸르고 깊기 때문이다. 천년 세월의 힘은 '스스로 그러하다'라는 자연(自然)의 의미를 이곳 상림에 오롯이 펼쳐놓았던 것이다.

상림의 나무들은 서로에게 기대며 바람을 맞고 비를 맞으며 소멸과 탄생이라는 긴 거듭남의 시간을 통해 제 스스로 숲이 되고, 또 그렇게 자연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함양 상림 19
대부분 낙엽활엽수로 이뤄진 110여 종 2만여 그루의 고목들은 20만8000여㎡의 상림을 가득 채우고 있다. 대를 이어 상림을 지키고 있는 나무들 중엔 500년이나 된 고목도 있다고 하니, 문득 나무의 시간에서 보면 천년마저도 두세 세대밖에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일 뿐이구나 하는 생각에 풀썩 헛웃음을 짓게 된다.
둘로 태어나 하나가 되었다는 연리목(連理木)
● 따로 또 같이! 연리목(連理木)에게서 세상사를 배우다

얼마를 더 걸었을까. 양지바른 숲 가장자리에 연리목(連理木)이 그들만의 애틋한 사랑을 과시하고 있다. 둘로 태어나 하나가 되었다는 연리목.

보통 가지가 연결되어있으면 연리지(連理枝), 뿌리나 줄기가 붙어 있으면 연리목이라고 한다니, 상림의 사랑나무들은 연리목이 맞을 듯하다. 그리고 연리목보다는 연리지가 훨씬 사례가 드물다고 한다.

보통 연리지나 연리목은 한 나무 분량의 영양분과 햇볕을 두고 두 나무가 싸우다가 친해져 한 몸이 되고, 또 그렇게 서로 공생의 길을 찾은 경우라고 한다. 그리고 더욱 신기한 것은 두 그루의 나무가 합쳐졌을 때 홀로 존재했을 때보다도 더 강해진다고 하니, 그 생존의 지혜에 새삼 경외감을 느끼게 된다. 게다가 한 몸이 되었다고 해서 자신의 것을 강요하기보다 서로의 장점을 살리면서 각자의 성격이나 기질을 그대로 유지한다고 하니, 셋이 길을 걸으면 그중에 스승이 있는 말, 삼인지행필유사(三人之行必有師)는 사람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었던 것이다.
함양 상림 21
따로 자라는 것 같지만 결국은 한 몸으로 더불어 자라는, 그래서 사랑나무라고 불리는 연리목. '둘이 만나 서는 게 아니라 홀로 선 둘이가 만나는 것'이 홀로서기라고 정의한 시인도 있다지만, 가끔은 누군가에게 기댄 채로 또 안긴 채로 살아갈 이유도 있는 것이다. 둘이 만나 하나가 되고자 하는 많은 우리에게 연리목이 전하는 메시지는 그래서 더 귀하고 소중하게 다가온다.
함양 상림 22
● 상림에는 뱀이 살지 않는다고?

숲을 소요하듯 걷다 문득 떠오르는 기억 하나. 예로부터 상림에는 뱀, 지네 등과 같은 미물이 살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는데, 그 기억이 떠오른 것이다. 새삼 확인하고픈 욕망이 스멀스멀 밀려든다. 대충 둘러본 숲에는 개미도 보이질 않는다. 그런데 전설 속에서 뱀이나 지네 같은 미물들을 몰아낸 이는 다름 아닌 최치원이다.

어느 날 최치원의 어머니가 상림을 걷다가 뱀을 만나 크게 놀란 적이 있다고 한다. 이 이야기를 들은 최치원은 상림으로 달려가 '모든 미물은 상림에서 물러가라!'고 외치니 그다음부터는 뱀이며 여타의 미물이 상림에서 자취를 감추었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류의 전설일 뿐이지만 많은 함양 사람들은 아직도 그렇게 믿고 있는 모양이다. 나 역시, 내 눈으로 못 봤으니 없는 것이라고 우기고 싶은 '어린 백성' 중 한 명인지라, 그 전설이 사실이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혹여 상림을 방문하는 분들은 뱀 같은 미물이 정말 없는지 눈을 크게 뜨고 살펴볼 일이다.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날의 울긋불긋한 상림 (사진=함양군청 제공)
● 상림에서 만나는 가을의 아름다움

함양 상림은 사계절 어느 한철이 낫다 할 수 없을 정도로 때에 따른 다양한 숲의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개인적으론 만추의 가을빛 상림을 가장 좋아한다. 가을 햇살이 비스듬히 비치는 날의 울긋불긋한 상림의 색감은 그야말로 천하일색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방문한 때는 아직은 이른 가을의 초입이었던지라 푸르름만 가득하였다. 그래서 함양군청의 홈페이지에서 찾아낸 상림의 만추를 통해 상림의 진면목을 공유하고자 한다.
가을에는 상림을 걸어 볼 일이다 (사진=함양군청 제공)
숲에는 꽃무릇이 지천이다
9월 즈음한 이른 가을날에는 수십만 송이의 꽃무릇이 상림의 단풍보다 한발 앞서 제 붉음을 뽐낸다. 여기저기 고목나무 아래로 꽃무릇이 지천이다. 붉게 물든 꽃무릇의 향연 앞에 서면 눈이 부셔 제대로 쳐다보는 것조차 부담스러울 지경이다. 하지만 부담은 잠시, 휘황한 꽃들의 향연에 취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함양 상림 25
함양 상림 25-1
땅속에서 어느 날 갑자기 융기하듯 불쑥 솟아나 꽃망울을 틔워 올리는 그 절묘한 탄생의 순간이야말로 실로 감격스러운 일이기 때문이다. 잎이나 꽃받침조차 하나 없이 그저 맨몸으로 땅에서 불쑥 솟구쳐 꽃을 피우기로 작정한 그의 도발에 뉘라서 이의를 제기할 것인가. 다만 그 무모해보이기까지 하는 꽃무릇의 교만이 그저 부러울 따름이다. 숲이 드리우는 음영조차도 꽃무릇의 화사함에는 아무런 방해가 되지 못한다. 작은 그늘 하나가 어찌 이 도도한 화사함을 훼방 놓을 수 있을 것인가.

꽃무릇은 석산(石蒜)이라고도 하는데, 보통 9월 초쯤 뿌리에서 가느다란 꽃대가 올라와 여섯 장의 빨간 꽃잎을 틔운다. 꽃이 진 뒤 잎이 돋아나는지라, 같은 몸에서 나고 자라는 처지일지라도 꽃과 잎은 영원히 만나지 못하는 얄궂은 운명을 타고난 꽃이기도 하다. 그래서 꽃말도 '이룰 수 없는 사랑'이란다.
함양 상림 26
숲은 그저 적막하고 또 아득하다. 하지만 어느 순간 숲의 피조물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소리들을 자각하는 아련한 순간이 찾아온다. 처음에는 풍광에 취하고, 다음에는 은근한 향취에 아련해지다가, 나중에는 숲이 풀어내는 소리에 귀가 열린다고 하지 않던가. 사르륵대는 이파리들의 속삭임이며, 해질녘 풀벌레들의 찌르르 구애의 소리, 작은 개울에서 졸졸졸 흐르는 물소리, 인기척에 놀란 새들의 지저귐, 숲을 뛰어가는 아이들의 까르르 웃음소리까지 숲에는 다양한 소리들이 만들어내는 화음이 있다. 그렇게 살며시 소리에 젖어 들다가 어느 순간 사람들은 마음이 가라앉고, 그렇게 한결 너그러운 평화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숲은 부지불식간에 사람에게로 다가오고 사람은 또 그렇게 숲과 동화되어 간다.
상림의 물레방아
상림의 여정이 끝나갈 무렵 물레방아가 보인다. 인위적으로 만들어놓은 물레방아인지라 깊은 맛이야 없지만 아이들에게는 좋은 구경거리이면서 교육교재이기도 하다. 내 어릴 적에는 상림을 가로지르는 개울의 중간쯤에 실제로 물레방아가 있었다. 긴 세월을 돌고 돌아 연륜만 남은 물레방아는 물이끼에 거무스름한 모습이었으며, 끼이익거리며 힘들게 제 몸을 돌리던 역전의 노장이었었다.

그렇게 물살이 좋은 곳을 지키며 이 땅의 수많은 노장의 물레방아들은 힘겹게 돌고 돌아 날곡식들이 쌀이 되고 보리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그 과정은 같은 세월을 동고동락한 농부에게는 성취와 보람의 시간이었다. 이 즐거운 때를 어찌 축하하지 않으리오. 축하의 자리는 잔치가 되고 잔치는 노랫가락 속에서 무릇 익어가는 법이다.
함양 상림 28
함양의 사람들도 노랫가락에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었으니, 그 노랫가락 중 하나가 '질꼬내기'다. 질꼬내기는 논매기를 끝내고 부르는 농요(農謠)를 말하는데, 전라도 지방에서는 '길꼬내기'한다. 하지만 경상도 사람들에게는 '길'마저도 '질'이라 발음되는지라 질꼬내기다.
 
오르랑 내리랑 잔기침 소리는
자다가 들어도 우리 님 소리라(후렴)
얼시구 갔으면 갔제 제가 설마나 갈소냐
용추 폭포야 네 잘있거라
명년 춘삼월 또다시 만나자
임의 생각을 안할랴 해도
저 달이 밝으니 저절로 나노라……

경상도 일부 지역에서는 이 같은 농요를 '칭칭이'라고 한다는데, '쾌지나 칭칭' 같은 노랫가락이 아니었을까 싶다. 칭칭은 꽹과리 소리를 흉내낸 말이란다.
함양 상림 30
공연히 덩달아 어깨를 들썩이며 상림의 가장자리를 에둘러 돌아가는 길에 만나는 코스모스의 장관….

이토록 풍성한 꽃잔치는 상림을 포함하는 이 지역의 관광상품화를 위해 함양군이 기울인 노력의 결과이다. 수만 평의 농지에다 봄, 여름, 가을까지 다양한 꽃들을 심어 방문객의 마음을 홀려놓는다. 대표적인 것이 연꽃과 코스모스다.
함양 상림 31
수천 평의 농지가 온통 코스모스 꽃밭이다. 바람에 살랑대는 폼이 좀 놀아본 솜씨가 분명해 보인다. 긴 다리로 살랑대며 꽃받침을 은근슬쩍 흔드니 무심한 행인인들 넘어가지 않을 도리가 없다. 그렇게 어울리며 사진을 찍고 웃음을 토해내며 추억을 만들고, 꽃들의 장관이 만들어준 추억에 다음에 또 오마 약속까지 해버리고 마는 것이다. 지자체가 심혈을 기울인 노력들이 결실을 맺는 순간이기도 하다.
함양 상림 32
코스모스 단지를 벗어나면, 철 지난 연꽃밭이 나타난다. 화사했던 연꽃 축제는 또 한 해를 기다려야 만날 수 있지만, 과거의 그 사진으로 수인사라도 나눌 일이다.
상림의 연꽃 (사진=함양군청 제공)
이제는 상림과 짧은 이별을 하여야 할 시간이다.

무심코 걷던 상림에서의 수십 수백의 이전의 시간들이 있었고, 무언가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두리번대며 걸은 오늘의 시간이 있었다. 무엇이 달랐느냐고?
 
'나무처럼 산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그러나 나무가 나의 숨을 들이마시고,
나무의 숨을 내가 들이마신다.'
함양 상림 34
이 지극히 평범한 한 문장의 의미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볼 기회를 얻은 것이 달라진 것이라면 달라진 것이다. 인식하지 못하지만, 우리는 공존하며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너와 나는 그렇게 어울려 살아가고 있음을, 그렇게 숨을 공유하며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조금은 알아 간 시간이었던 것 같다.
함양 상림 35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