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IVE 제보하기

[취재파일] 취임하자마자 블랙리스트 기획…문체부 내부 사찰도

새롭게 밝혀진 사실…前 정부의 '시대 착오'와 '철학의 부재'

강청완 기자 blue@sbs.co.kr

작성 2017.10.23 10:36 수정 2017.10.23 10:57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취임하자마자 블랙리스트 기획…문체부 내부 사찰도
● 朴 대통령 취임 직후인 2013년 3월부터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
 
‘대한민국 헌법 22조: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박근혜 정부의 ’문화계 블랙리스트’에 대한 1심 재판에서, 법원은 당시 정부가 이 헌법 가치를 크게 훼손했다고 판결했습니다. (2017.7.27) 정치적 성향과 현 정권에 얼마나 협조적이냐를 기준으로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작성하고 이를 보조금 지급에 적용하게 한 행위 등이 헌법 정신을 어겼을 뿐 아니라 법치주의와, 국가의 공공성에 대한 국민 신뢰를 훼손했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정점에는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이 있었다고 지목했습니다. 적어도 박근혜 정부에서는 김기춘 실장 취임 이후 2014년 무렵부터 본격적으로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이 기획되고 추진되어 왔다는 게 그동안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그러나 SBS가 더불어민주당 이재정 의원실을 통해 단독 입수한 지난 정부 청와대 문건에선 이를 뒤집는 새로운 내용이 등장합니다. <문화예술계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라는 제목의 해당 문건에 따르면 ‘현 상황을 문화계 좌파가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있다며 지원금을 무기로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구분하려는 내용이 나옵니다. 취재진은 이 문건 내용을 확인하는 과정에서 문건이 작성된 시점에 주목했습니다. 문건에 등장하는 몇 개의 날짜와 이벤트를 종합하면, 해당 문건이 작성된 시점은 2013년 3월로 확인됩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대한민국 18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건 지난 2013년 2월 25일입니다. 그러니까, 이 문건은 박 전 대통령 취임 바로 뒤에 작성된 것입니다. 김기춘 비서실장이 취임 이후 블랙리스트 작성을 총괄하고, 세월호 사태 이후 정무수석실 등에서 본격적으로 리스트를 작성했다는 게 그동안 알려진 사실이었습니다. 이번 문건 내용에 따르면 그 시점이 더욱 거슬러 올라갈 뿐 아니라, 전(前) 정권이 출범과 동시에 문화계 장악을 기획하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됩니다.
 
▶ [단독] 박근혜 靑, 정권 출범하자마자…'블랙리스트' 기획했다
 
● "문화계 좌파, DJ·盧 정부 10년간 헤게모니 장악"
 

<문화예술계 건전화로 ‘문화융성’ 기반 정비> 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문화예술계 내 좌파(左派)들이 큰 영향력을 행사하면서 사회분열과 갈등을 지속적으로 획책하고 있어 문화융성과 문화예술계 건강성 회복을 저해’ 한다고 적혀 있습니다. 또 이른바 문화계 좌파들이 ‘김대중·노무현 정부 10년간 각종 특혜를 받으며 성장했으며 헤게모니를 장악하고 ‘문화권력’을 형성했다‘고 진단했습니다. 인터넷상에서 ‘나꼼수’ 등이 대중영향력을 지속 확대하고 있으며, 이런 ‘문화계 좌파’들이 ‘순수 창작활동보다는 맹목적 정책비판 등 정치투쟁에 치중’하고 있다며 적대감을 드러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선 좌파 문화예술인들이 ‘국론을 분열시키고 편향된 가치관 조장에 몰두’하고 있다고 규정하는 내용이 나옵니다. ‘공권력과 정부는 탄압의 주체로, 대중은 사회적 약자로 왜곡’해 공권력에 대한 저항을 정당화함은 물론 그릇된 대북관을 주입‘한다는 겁니다. 사례로 영화 <26년>과 <남영동 1985>, 시사평론가 김어준 씨가 쓴 책 <닥치고 정치>를 들며 정부불신을 야기한다고 적었습니다.
 
쇼박스, CJ E&M 같은 대형 영화사도 ’불량 사례‘로 등장합니다. 이들이 ‘흥행성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건전영화‘ 투자를 외면하고, 영화계의 눈치보기에 급급’하다는 겁니다. 참고사항으로는 제 2연평해전을 다룬 영화 ‘NLL’이 투자사 확보에 난항을 겪다 최근 국방부 지원으로 촬영을 개시했다고 적었습니다. 문화연대가 운영한 ‘성미산마을’도 사회주의식 공동체라며 안 좋은 사례로 적었을 뿐 아니라 나꼼수에 나왔던 정봉주 전 의원이 ‘경북 봉화로 귀촌해 유기농 농산물 판매 등 농촌살리기를 빙자해 의식화’에 나섰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이런 ‘문화계 좌파’들이 선거정국마다 좌파 후보를 노골적으로 지지하고, ‘정치를 오염’시킨다는 표현도 썼습니다. 당시 청와대가, 이른바 ‘문화계 좌파’를 사실상 적(敵)으로 규정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 '지원금' 무기로…블랙리스트/화이트리스트 시사
블랙리스트 실제 예산 삭감 불이익당시 문화계 상황을 위와 같이 진단한 청와대는 해결책으로 지원금을 무기로 한 ‘문화계 건전화 촉진’ 방안을 시사합니다. 2013년 3월부터 시행되는 100억 원 규모의 ‘예술인 취업지원 및 창작준비금 지원사업 대상자 선정시 예술 공헌자’ 위주로 선정하고 ‘민예총·문화연대 등 골수 좌파조직들은 예술위·영진위 등의 정부지원 대상 선정시 철저 배제하는 등 점진적으로 격리 추진’한다는 내용입니다.

이어지는 대목에선 대기업들이 문화지원을 위해 만든 ‘메세나협회의 펀드조성·교육사업 등 문화지원을 적극 독려’하겠다는 내용과 함께 건전세력과 협조해 ‘문화계 좌파세력의 반국가·정치투쟁 실체·폐해를 폭로하는 등 대응활동 강화를 유도’한다는 내용도 있습니다. 거칠게 요약하면 ‘말 잘 들으면 지원금 주고, 말 안 듣는 애들은 안 주겠다’는 뜻입니다. 이후 작성된 블랙리스트와 화이트리스트를 시사하는 대목입니다.
 
실제로 지난해 말 SBS가 입수한 문체부 블랙리스트 문건에 따르면, 리스트에 오른 단체와 개인에 대한 지원이 대부분 끊긴 사실이 확인됐습니다. 앞서도 언급한 <남영동1985>는 고 김근태 민주당 의원이 민주화운동 시절 남영동 대공분실에 끌려가 고문당한 내용을 다룬 영화인데 이 영화를 배급한 ‘엣나인필름’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지원금이 뚝 끊겼습니다. 외국 예술영화나 독립영화를 수입·배급한다는 명목으로 2013년 문체부에서 3천4백만 원을 지급받았는데 이후에는 한 푼도 받지 못했습니다. 또 세계적인 작곡가 고 윤이상 선생을 기리는 윤이상 평화재단도 2013년 9천만 원을 지원받은 뒤 블랙리스트에 올라 예산이 삭감됐습니다.
 
▶ [단독] 블랙리스트 오르자 예산 삭감…불이익 실체

언급한 사례는 빙산의 일각에 불과합니다. SBS가 확인한 이듬해 2014년 8월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자료에는 위 내용대로 ▲문제영화상영 독립·예술영화관 지원 배제 ▲건전애국영화 제작지원(영화발전기금 50억원) 같은 구체적인 내용이 담겼습니다. 지난 정부 청와대가 출범 직후 돈줄을 무기로 한 문화계 장악 방침을 세워놓고, 이듬해부터 실제로 문건을 작성한 뒤 실행에 옮긴 증거입니다.
 
● '김제동, 윤도현, 탁현민, 김미화, 김여진' 등 미리 블랙리스트에 올려
 김제동, 윤도현, 기획사 표적 세무조사문건에는 한 장 분량의 ‘좌파 문화예술계 주요 현황’도 첨부돼있습니다. ‘문화예술’과 ‘영화’, ‘연예’ 항목으로 구분한 문서에는 단체와 조직현황, 주요동향까지 꼼꼼히 적혀 있습니다. 문화단체로는 민예총과 작가회의, 문화연대가 이름을 올렸고 단체장들도 이름이 적혔습니다. 이들이 ‘반미·반정부 투쟁을 통한 문화선동대 역할’을 하고 있고 ‘정부비판 시국선언·칼럼 등을 통해 대중들에게 왜곡된 입장을 전파’한다는 겁니다. 여기 이름이 오른 단체장 가운데 민예총 이사장을 맡고 있던 정지창 영남대 교수는 이후 석좌교수 임용에서 탈락했습니다. 작가회의 이사장인 소설가 이시영 선생 역시 지난해 한국문학번역원이 지원하는 해외 문학행사에 참가했다가 석연찮은 이유로 혼자만 항공료 지원을 받지 못했다는 증언을 한 바 있습니다. 작가회의에 소속된 소설가 김연수, 김애란 씨 역시 블랙리스트에 오른 뒤 한국문학번역원에서 “두 작가를 위에서 싫어하기 때문에 지원할 수 없다”는 내용이 SBS 보도를 통해 알려진 바 있습니다.

영화계에선 영화제작가협회 (대표: 이은 명필름 이사), 영화감독조합 (대표: 이준익 감독, 영화프로듀서조합 (대표: 최은화 프로듀서), 독립영화협회 (회장: 임창재 감독)이 리스트에 포함됐습니다. 문성근·명계남 주도 아래 작년 총선과 대선에서 ‘정권 교체’를 주장하며 연대활동을 강화했고 ‘시대고발성 독립영화 제작·상영을 지원하면서 반정부 활동을 전개’했다는 게 주된 이윱니다.
 
연예인 명단도 눈에 띕니다. 개그맨 김제동, 가수 윤도현, 김C 등의 이름과 함께 소속사명을 적었고 현 청와대 행정관인 탁현민 씨도 ㈜P당 대표로 이름을 올렸습니다. 또 블랙리스트에 포함된 것으로 익히 알려졌던 개그우먼 김미화, 배우 김여진, 권해효 씨의 이름도 ‘기타 폴리테이너’라는 항목으로 분류됐습니다.
 
위 열거된 이름이 문화계 블랙리스트 관련 문건이나 기사에 등장한 건 아시다시피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이후에 작성된 9천여 명이 넘게 포함된 블랙리스트에는 위 이름들이 빠짐없이 올라 있습니다.
 
문건 작성 시점에 주목…'MB정부와 연관성?'
이명박 전 대통령, 국정원, 블랙리스트다시 해당 문건이 작성된 시점에 주목해 봅니다. 박근혜 정부 출범 직후인 2013년 3월에 해당 문건이 작성됐다는 사실에는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는 앞서도 말씀드렸다시피 지난 정권이 김기춘 실장 취임 이후가 아닌 출범과 동시에, 이미 문화계 장악 작업을 준비하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두 번째는 앞선 MB정부와의 연관성입니다.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구성된 국정원개혁위에 따르면, MB정부 때 국정원 주도로 문화·예술·출판 영역을 아우르는 광범위한 블랙리스트가 작성된 사실이 최근 확인됐습니다. 이번에 확인된 문건 내용을 살펴보면 상당히 오랜 기간 면밀한 조사 없이는 작성되기 어려운 내용이라는 점을 알 수 있습니다. 단체별 내부 동향 뿐 아니라 구체적인 수치, 또 주요 인물까지 일일이 열거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특히 앞서 설명한 ‘좌파 문화예술계 주요 현황’은 MB정부 국정원 당시 작성된 블랙리스트 명단과도 거의 일치합니다. 박근혜 정부 당시 청와대가 이명박 정부 국정원 혹은 어느 다른 기관으로부터 해당 목록과 정보를 ‘인수인계’ 받았다는 추론이 가능한 부분입니다.
 
● "영남권 인사 없다"…정치사찰에 물갈이까지  
 
SBS가 추가로 확인한 문건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이 문화체육관광부 직원들을 면밀히 사찰하고, 출신 지역에 따라 인사를 분류한 정황도 담겼습니다. 이 문건은 2014년 9월 14일 작성된 것으로 명기돼 있습니다. 지난 7월 이번 정부 청와대가 민정수석실 캐비닛에서 발견해 제목만 공개한 <문화부 4대 기금 관리 집행부서 문제 인사> <문체부 주요 간부 검토> 등의 문건입니다. 이 문건들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을 위해 청와대가 문체부 간부들의 성향까지 파악하며 치밀하게 사전 준비 작업을 한 것으로 여겨지는 물증들입니다. 그만큼 지난 7월 청와대가 제목만 발표했을 당시 문체부 내부에서 가장 큰 관심을 모았던 내용이기도 합니다. 청와대가 주요 간부에 대해 세세한 동향까지 챙겨본다더라, 하는 문체부 내부에서만 돌던 ‘카더라’ 설이 이번에 새롭게 확인된 것입니다.

▶ [단독] "영남 인사 앉혀라"…정치성향 SNS 사찰하며 '물갈이' 정치사찰우선 ‘문체부 주요 간부 검토’에서는 문체부 현 간부진에 대한 총평이 적혀 있습니다. ‘문체부 내에서 시계가 느리다는 자조적 말이 나올 정도로 업무추진이 더딤’이라는 문장과 함께 ‘크게 문화와 홍보 분야로 나눠지는 데 칸막이가 여전하고 융화가 되지 않고 있음’이라는 평가도 써있습니다. 결정적으로, ‘정부 비판세력에 대해서도 개입이 어렵다는 미온적 태도 만연’하다고 문제 삼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문장이 특히 눈에 띕니다. 문건에선 ‘실장보직은 총 7개’라면서 ‘현재(2014.9) 행시 27~30회 6명 및 비고시 출신 1명이 포진’하고 있다고 적은 뒤 ‘7명 중 영남권 인사가 한명도 없는 상황’이라고 적었습니다. 또 현 실장급 인사의 용퇴범위에 따라 전체인사의 폭이 결정된다면서 ‘국가관이 투철하고 업무추진력이 뛰어난 인사를 주요보직에 배치하여 업무분위기 대폭 쇄신 필요’라고 적었습니다. 지난 정권이 영남 지역에 주된 지지기반을 두었던 것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1급 공무원이 주로 맡는 실장급 보직에 ‘특정 지역 출신이 없다’고 언급한 것은 상당히 이례적이고 노골적 대목입니다.
 
그러면 이후 인사는 어떻게 되었을까요? SBS 취재진이 일일이 당시 인사 명단을 대조해 확인한 결과, 놀라운 사실이 드러납니다. 문체부가 바로 다음 달인 2014년 10월 8일과 27일, 두 번에 걸쳐 인사를 냈는데 결과적으로 실장급 인사 가운데 4명이 영남권 인사로 ‘물갈이’된 것입니다. 당시 기조실장과 문화콘텐츠사업실장, 그리고 평창올림픽 조직위기조실장이 먼저 인사가 나고, 역시 실장급인 해외문화홍보원장에도 경남 출신 인사가 보임됐습니다. 해외문화홍보원장을 역임했던 인사는 다음해인 2015년 3월 7개 실장보직 가운데 하나인 체육정책실장 자리를 꿰찹니다. 방송 리포트에는 반영하지 않았지만, 이렇게 새롭게 실장급 인사를 차지한 인물 가운데 2명은 이후 최순실 게이트에 연루돼 특검 조사를 받습니다.
 
인사에 앞선 ‘정지작업’에는 이미 알려진 속사정도 있습니다. 9월 14일 이 보고서가 작성됐다고 말씀드렸는데, 불과 나흘 뒤인 9월 18일 김희범 문체부 1차관이 문체부 내 1급 간부 6명을 불러 사표 제출을 지시합니다. 그리고 이들 가운데 실제로 3명은 사표가 수리돼 옷을 벗어야 했습니다. 이런 사정은 이미 여러 차례 기사화가 된 바가 있습니다. 최규학 전 기조실장과 김용삼 전 종무실장, 신용언 전 문화콘텐츠사업실장이 바로 그 3명입니다. (사표를 낸 이들 가운데 2명은 이후 청와대의 문체부 간부 사찰 목록에도 등장합니다)
 
정리하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9월 14일 ‘실장급 보직에 영남권 인사가 한 명도 없다’고 지적한 뒤 나흘 만에 김희범 당시 1차관이 1급 공무원 6명을 불러 ‘위에서 내려온 지시’라며 사표 제출을 지시한 것입니다. 이후 10월 초 사표가 수리됐고, 두 차례에 걸쳐 영남권 인사 4명이 보임하는 식입니다. 이들 대부분은 지금은 교체가 됐고, 실장 보직 7개도 문재인 정부 들어 4개로 줄었습니다.
 
<문화부 4대 기금 관리 집행부서 문제 인사>라는 문건에는 공무원들의 정치적 성향을 주요 평가 기준으로 다뤘다는 정황도 드러납니다. ‘문화부 4대 기금’은 앞서도 밝혔다시피 청와대가 문화계 블랙리스트 작업의 주된 ‘무기’로 내세웠던 수단입니다. 여기에선 한 과장급 인사에 대해 ‘문체부 주요보직을 다 거친 엘리트로 평가되나 A 과장 주도하에 금년 4월까지 문화예술진흥기금이 좌파단체로 많이 지원되었다고 함’ 이라고 적었습니다. 또 상사인 B 국장의 경우 ‘대구 출생이나 좌파에 온정적이어서 이를 모두 묵인했다는 의견’ 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또 한 실장급 인사에 대해선 ‘업무에 적극적이지 않고 산업육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시장 의견, 또한 좌파 성향으로 좌파 지원에 보이지 않게 많이 관여했다는 의견’ 이라고 적고 있습니다. 정치적 성향을 문제삼은 것입니다. 이 인사는 앞서 언급한, 사표가 수리된 실장급 인사 3명 가운데 1명입니다.
 
● "페이스북에 세월호시위자 게시글 공유"…SNS 사찰까지
 
이어지는 <문화체육관광부 부이사관급 주요 인사 세평 종합>과 주요 간부 동향에는 사생활과 개인 SNS까지 주도면밀하게 사찰한 정황도 드러납니다. 한 과장급 이사의 세평에는 ‘트위터에 대통령님 당선무효를 주장한 문제인물(ID)을 팔로잉하며 좌파논리를 리트윗한 전력’, ‘최근 페이스북에 세월호시위자 게시글 공유’라는 내용이 적혀 있습니다. 직접 SNS에 들어가 세세히 살펴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또 다른 인사에 대해선 ‘노무현 정부에서 국정상황실 근무’라는 내용이 주요 참고사항으로 언급돼 있습니다.
 
<주요 간부 세평>은 더 깨알같습니다. 학력과 주요경력은 물론 ‘업무보다는 저녁모임, 운동 등 사적인 일과 체육계 인맥관리에 더 많은 관심이 많다는 지적’, ‘업자(스포츠토토)와 골프로 구설’, 또 ‘아버지는 어느 기업 회장이고 배우자는 어떤 업체를 운영해 경제적으로 넉넉하다는 후문’ 같은 개인사와 ‘술을 전혀 못하는 특이체질로 회식 대신 수다떨기로 직원들과 소통’, ‘직원들에게 업무관련 부담주기를 꺼려해 일처리 속도가 느리다는 지적도’ 같은 사항도 적혀 있습니다. 아까 내용과는 반대로, 한 과장급 인사에 대해선 ‘평소 종북세력 척결을 강조하고 “대통령님의 통치이념 구현을 통해 국민행복을 실현해야 한다”고 언급하는 등 국가관 양호’라며 정치적 성향을 치켜세우는 내용도 있습니다.
 
특이한 것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나쁜 남자’로 찍혀 좌천됐다가 현 정부에서 문체부로 복귀한 노태강 제2차관에 대한 내용입니다. 문건에선 노 차관이 ‘공직관이 투철’하고 ‘원칙주의자로 직원들에게 외부접촉시 식사접대를 금지시킬만큼 청렴성이 뛰어나 ’Mr 공정’으로 회자된다고 적었습니다. 그러면서 노 차관의 좌천 배경에 대해서 자세히 썼습니다. 하나는 ‘체육계 비리 척결 관련 대통령님 지시메모 분시로 1개월간 대기발령타 2013.10 현직으로 좌천되었다는 후문’이고, ‘2013.9 대한체육회장 선거시 새누리당 이에리사 의원이 일부단체들의 김정행 회장 지원활동 차단을 요구했음에도 ’중립을 지키겠다‘며 소극적으로 대응한 것도 좌천배경 중 하나라는 설’이라고 자세히 적었습니다. 모두 그동안 알려지지 않았던 새로운 내용입니다.

이러한 내용들이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직무상 당연히 알아야 할 내용일 수도 물론 있습니다. 지금은 꿈도 못 꿀 일이지만, 예전에는 청와대 민정수석실에서 직원들의 개인 서랍과 캐비넷까지 일일이 따서 검사했다는 사실을 예전 청와대 행정관 출신 국회의원에게 들은 적도 있습니다. 다만 요즘 분위기에 맞춰 봤을 때 위와 같은 사실을 직원들이 알았다면 숨이 막힐 만한 것도 사실입니다. 또 SNS에서 누굴 팔로우하고 리트윗했는지 여부와 ‘종북세력 척결을 강조하는 등 국가관 양호’ 같은 내용은 분명히 과한 부분이 있습니다. 공무원 또한 이 나라 국민이고 당연히 정치적 중립의 의무와 표현의 자유를 동시에 갖기 때문입니다. 국가관은 중요합니다만, 문체부 공무원이 자기 업무를 잘하는 게 우선이지 ‘종북세력 척결’을 강조해야 할 필요가 꼭 있어야 했을까요? 국방부 공무원도 아니고 말입니다.
 
● 靑 '문화계 블랙리스트'의 두 가지 함의: 시대 착오, 철학 부재
박근혜 전 대통령 정부 블랙리스트 취임 직후부터 기획지금까지 SBS가 확인한 ‘문화계 블랙리스트’와 ‘문체부 내부 공무원 사찰’ 문건의 내용을 방송에서 미처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까지 자세히 설명 드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이 문건 내용을 확인하면서 떠오른 키워드가 두 가지 있습니다. 바로 ‘시대착오’와 ‘철학의 부재’입니다.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거창한 말들은 이미 많이 나왔으니 접어두겠습니다)
 
문건에는 ‘문화예술계가 보수·좌파 공히 정치색을 벗고 순수 문예활동에 매진하도록 문화계 대통합과 자성 분위기를 조성’하라는 문장이 쓰여 있습니다. 문화계는 정치에는 관심 끊고 순수 문화활동만 하라는 이야깁니다. 이 말에는 두 가지 맹점이 있습니다. 하나는 필연적으로 우리 삶과 밀접한 관계를 가질 수밖에 없는 문화예술을 그저 온실 속 박제된 존재로만 여기려는 철학의 빈곤함입니다. 또 하나는, 그렇게 말하면서도 ‘건전영화 제작’에는 수십억 원의 예산을 몰아줘서 정권에 우호적이거나 도움이 되는 문화 활동은 적극 지원하는 모순을 범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결국 문화와 예술을 입맛대로 도구로 쓰겠다는 발상에 다름아닙니다.
 
SNS까지 사찰해가며 공무원의 출신 지역, 정치적 성향까지 파악한 것도 법치의 근간을 흔드는 행위일 뿐 아니라 시대착오적 발상입니다. 지금이 어느 때인데, 그것도 문화예술 정책을 담당하는 공무원의 자질로 ‘종북세력 척결’을 언급한다는 말입니까. 사상의 자유 시장, 또 시장 경제 원리에 맡겨야 할 문화 현상을 입맛대로 제어하겠다는 발상 역시 마찬가집니다. 법과 원칙을 훼손했을 뿐만 아니라, 빠르게 변화하는 세상에서 청와대만 혼자 거꾸로 간 셈입니다.
 
‘문화계 블랙리스트’는 국정농단 사태와 함께, 탄핵이라는 불운한 말로를 맞은 지난 정권의 주된 과오로 꼽히고 있습니다. 1심 재판에선 김기춘 비서실장을 포함한 전 정권의 권력자들에게 대거 유죄가 선고됐습니다. 블랙리스트가 중요한 이유는 앞으로 누가 정권을 잡든 간에 다시는 반복되지 말아야 할 일이기 때문입니다. 새로운 사실이 적나라하게 드러난 만큼 지난 정권과의 연관성을 규명하고 나아가 다시는 이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경계로 삼아야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