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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김현종 "한미 FTA 폐기 움직임, 실질적이고 임박"

[취재파일] 김현종 "한미 FTA 폐기 움직임, 실질적이고 임박"
뉴욕과 워싱턴을 옮겨가며 7일에 걸쳐 39건의 일정. 김현종 통상교섭본부장의 스케줄이다. 지난 3일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검토 지시 이후 한층 고단해진 대한민국 통상 대표의 업무가 고스란히 전해진다. 그가 워싱턴 일정 중에 지난 28일 특파원단과 간담회를 가졌다. 듣던 대로 기름기 전혀 없는 스타일이었다. 자기 할말은 팩트와 사례를 들어가며 똑 부러지게 했고, 돌려서 하지 않았다. 그는 워싱턴 조야와 트럼프 행정부 인사들과의 면담 내용을 조근조근 복기하면서 “한미 FTA 폐기 위협이 실질적이고 임박했다”고 진단했다. 속된 말로 블러핑(bluffing)이나 ‘뻥카’가 아니라는 말이다. 1시간 넘게 진행된 간담회 내용을 정리했다.

● "백악관, 한미 FTA 종료 편지 작성했었다"
간담회 현장
트럼프 대통령의 한미 FTA 폐기 검토 지시는 북한의 6차 핵실험 직전에 나왔다. 한국은 물론 미국도 발칵 뒤집혔다. 북 핵실험 와중에 이건 안 된다고 백악관 참모들까지 트럼프 대통령을 말렸다는 이야기가 나왔고, 이틀 뒤 폴 라이언 하원의장을 비롯한 미 의회 핵심 인사들이 “행정부로부터 한미 FTA 철회(withdrawal) 문제를 당분간 의제에서 제외하겠다는 입장을 보고받았다”는 보도가 전해졌다. 이후 국내에선 “폐기 운운은 미측의 협상용 카드” 심지어는 “해프닝이었나?”라는 분석까지 제기됐다. 북미간 대치국면이 다시 고조되면서 이 문제는 서서히 주요 뉴스에서 밀려나는 듯 했다.
 
하지만 김현종 본부장의 판단은 달랐다.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그는 “폐기 움직임은 실질적 위협으로, 앞으로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질적이라는 근거를 밝혀달라는 요구에 누구인지는 특정하진 않았지만 “백악관 고위 관계자를 만나 컨펌(confirm)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또 “20여명의 상하원 의원, 미국 산업계 인사들을 만났더니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하더라. 블러핑이 아닌 듯 했다”고 덧붙였다.

김 본부장은 나아가 “그 위협은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고 진단했다. 임박했다고 판단한 이유를 다시 물어봤다. 그는 “백악관에서 FTA를 종료(termination)하겠다는 편지까지 작성됐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여러 인사들을 만나본 결과 이 보도가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 본부장은 “모 상원의원은 (폐기 지시 보도 다음날인 4일이) 노동절 연휴였는데 지역구에서 차를 세우고 즉시 백악관과 통화해 ‘절대로 폐기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까지 전달했다”며 자신의 면담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미 의회와 업계의 반대가 여전하지만 FTA 폐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라는 말이었다.
 
● "블러핑이라도 콜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
간담회 현장
통상수장으로서 어떻게 이 상황을 풀어나갈 지로 질문이 이어졌다. 그는 몇 가지 비유를 들면서 자신의 역할과 각오를 밝혔다. “국제협상 무대에서는 블러핑을 했는데 상대방이 콜을 하면 끝까지 가야하지 않나?”라며 현 트럼프 행정부의 입장을 포커판에 빗대 묘사했고, 자신의 협상관(協商觀)과 관련해선 “장사치 논리”라고 설명했다.

“협상이란 것은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하는 게 아니다. 압박을 하고 양보도 하고 마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호의는 기대하지 않는다” “국익이 걸려있는 협상에서 느슨하게 협상한 적 없다. 단 한번도 어떤 상대국이 됐든 느슨하게 했다는 건 절대로 동의하지 못한다” “협상가 입장에선 벼랑 끝까지 가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런 모습은 미국 측이 김 본부장을 불편한 상대로 여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비공개 석상에서 “김현종 본부장과 라이트하이저(Lighthizer) 미 무역대표부 대표간 관계에 대해선 우려가 있다. 김 본부장이 반미(反美)주의자라는 평판이 있다”고 했다. 한 통상 소식통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1차 공동위원회 회의 결과를 라이트하이저 대표로부터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매우 도발적”이라며 격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고 김 본부장에게 라이트하이저 대표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는지, 밀어붙이는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는지 등등, 김 본부장은 자신의 추측이라고 전제하면서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무역대표부 부대표를 한 경험도 있고,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고 답했다. 협상에서 ‘밀당’을 해야 할 상대 장수(將帥)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을까? 다른 질문 때와는 달리 두루뭉술한 표현이었다.
 
● "최선의 협상은 양측이 아쉬움을 갖고 집에 가는 것"

미국 컬럼비아 로스쿨 박사, 한국과 미국서 로펌 변호사,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통상교섭본부장, 2007년 한미 FTA 협상 대표, 유엔 주재 대사,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다시 통상교섭본부장. 통상 전문가이자 협상가로서 이론과 실무를 아우르는 화려한 이력이다. 그런 그에게 유능한 협상가란 어떤 사람일까? 김 본부장은 "유능한 변호사는 자기 고객을 효과적으로 대리하지만 더 유능한 변호사는 그 상황을 대리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은 만만치 않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임계치에 이른 상황에서 한미간 통상과 안보라는 다른 방정식을 함께 풀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김 본부장은 안보 문제와 결부해 협상력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저는 거꾸로 봅니다”고 잘라 말했다. “한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동맹국 입장에서 미국이 더 많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답했다.
 
하지만 미국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한미 FTA 를 ‘재앙(disaster), 끔찍한 거래(horrible deal)’이라고 지칭했고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해왔다. 무역수지와 안보 비용, 둘 다 양보하라는 노골적인 압박인 셈이다. 동맹 관계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김 본부장 같이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스타일이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0월4일 2차 공동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제일 좋은 협상 방향은 쌍방이 아쉬움을 가지고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은 결과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위해선 국익과 국격, 국력 차원에서 합치할 수 있는 결과를 내야하는 게 협상가의 임무다.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낼 것이다” '외골수'이지만 '칼잡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워싱턴을 방문한 관료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현실적인 그의 상황인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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