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백악관, 한미 FTA 종료 편지 작성했었다"
하지만 김현종 본부장의 판단은 달랐다. 간담회 모두발언에서 그는 “폐기 움직임은 실질적 위협으로, 앞으로 언제든 현실화될 수 있다”고 밝혔다. 실질적이라는 근거를 밝혀달라는 요구에 누구인지는 특정하진 않았지만 “백악관 고위 관계자를 만나 컨펌(confirm)할 기회가 있었다”고 했다. 또 “20여명의 상하원 의원, 미국 산업계 인사들을 만났더니 똑 같은 메시지를 전하더라. 블러핑이 아닌 듯 했다”고 덧붙였다.
김 본부장은 나아가 “그 위협은 실제적이고 임박해 있다”고 진단했다. 임박했다고 판단한 이유를 다시 물어봤다. 그는 “백악관에서 FTA를 종료(termination)하겠다는 편지까지 작성됐다는 보도가 있었는데 미국에 와서 여러 인사들을 만나본 결과 이 보도가 정확하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전했다. 김 본부장은 “모 상원의원은 (폐기 지시 보도 다음날인 4일이) 노동절 연휴였는데 지역구에서 차를 세우고 즉시 백악관과 통화해 ‘절대로 폐기에 반대한다’는 메시지까지 전달했다”며 자신의 면담 내용을 공유하기도 했다. 미 의회와 업계의 반대가 여전하지만 FTA 폐기는 여전히 살아있는 카드라는 말이었다.
● "블러핑이라도 콜하면 끝까지 가야 한다"
“협상이란 것은 상대방의 호의를 기대하는 게 아니다. 압박을 하고 양보도 하고 마찰도 있을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결과가 나오는 것이기 때문에 호의는 기대하지 않는다” “국익이 걸려있는 협상에서 느슨하게 협상한 적 없다. 단 한번도 어떤 상대국이 됐든 느슨하게 했다는 건 절대로 동의하지 못한다” “협상가 입장에선 벼랑 끝까지 가볼 필요도 있다고 생각한다”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런 모습은 미국 측이 김 본부장을 불편한 상대로 여기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다. 최근 미 국무부의 한 관리는 비공개 석상에서 “김현종 본부장과 라이트하이저(Lighthizer) 미 무역대표부 대표간 관계에 대해선 우려가 있다. 김 본부장이 반미(反美)주의자라는 평판이 있다”고 했다. 한 통상 소식통은 지난달 서울에서 열린 한미 FTA 1차 공동위원회 회의 결과를 라이트하이저 대표로부터 보고받은 트럼프 대통령이 “한국이 매우 도발적”이라며 격노했다는 소식을 전했다.
이런 내용을 염두에 두고 김 본부장에게 라이트하이저 대표에 대한 인상을 물어봤다. 라이트하이저 대표가 어느 정도 권한을 가지고 있다고 느꼈는지, 밀어붙이는 트럼프 대통령 때문에 힘들어하는 기색은 없는지 등등, 김 본부장은 자신의 추측이라고 전제하면서 “상당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요? 무역대표부 부대표를 한 경험도 있고, 충분한 신뢰를 가지고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고 답했다. 협상에서 ‘밀당’을 해야 할 상대 장수(將帥)에 대한 예의 때문이었을까? 다른 질문 때와는 달리 두루뭉술한 표현이었다.
● "최선의 협상은 양측이 아쉬움을 갖고 집에 가는 것"
미국 컬럼비아 로스쿨 박사, 한국과 미국서 로펌 변호사, 외교통상부 통상교섭조정관-통상교섭본부장, 2007년 한미 FTA 협상 대표, 유엔 주재 대사, 세계무역기구(WTO) 상소기구 위원, 다시 통상교섭본부장. 통상 전문가이자 협상가로서 이론과 실무를 아우르는 화려한 이력이다. 그런 그에게 유능한 협상가란 어떤 사람일까? 김 본부장은 "유능한 변호사는 자기 고객을 효과적으로 대리하지만 더 유능한 변호사는 그 상황을 대리한다"고 했다.
그럼에도 작금의 상황은 만만치 않다.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이 임계치에 이른 상황에서 한미간 통상과 안보라는 다른 방정식을 함께 풀어야 하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김 본부장은 안보 문제와 결부해 협상력이 떨어지지 않을까라는 질문에 “저는 거꾸로 봅니다”고 잘라 말했다. “한미 관계가 중요하기 때문에 동맹국 입장에서 미국이 더 많이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고 답했다.
하지만 미국 상황이 그렇지 않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전부터 한미 FTA 를 ‘재앙(disaster), 끔찍한 거래(horrible deal)’이라고 지칭했고 한국에 대한 방위비 분담금 증액을 요구해왔다. 무역수지와 안보 비용, 둘 다 양보하라는 노골적인 압박인 셈이다. 동맹 관계보다는 미국의 이익을 우선시하는 트럼프 행정부에 김 본부장 같이 찔러서 피 한 방울 안 나올 스타일이 우리에게 최선의 결과를 가져올 수 있지만, 역효과를 낼 수 있다는 우려도 있다. 10월4일 2차 공동위원회 회의를 앞두고 그는 이렇게 다짐했다.
“제일 좋은 협상 방향은 쌍방이 아쉬움을 가지고 집에 가는 게 가장 좋은 결과다. 하지만 대한민국을 위해선 국익과 국격, 국력 차원에서 합치할 수 있는 결과를 내야하는 게 협상가의 임무다. 최선을 다해 좋은 결과를 낼 것이다” '외골수'이지만 '칼잡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워싱턴을 방문한 관료들 가운데 보기 드물게 현실적인 그의 상황인식이 어떤 결과를 낳을지 지켜볼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