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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성희롱 피해자가 조사과정에서 다시 모멸감을 느낀다면

[취재파일] 성희롱 피해자가 조사과정에서 다시 모멸감을 느낀다면
● 공개된 장소, 가해자 바로 옆에서 피해자 조사하는 노동청 

김포공항에서 청소일을 하는 50대 여성 A 씨는 관리자로부터 지속적으로 성희롱을 들었습니다. A 씨 뿐만 아니라 다른 청소노동자들도 성희롱과 추행을 당해 지난해에는 청소노동자들이 삭발을 하고 시위를 하기도 했습니다.

일반적인 성폭력과 달리 직장 내 성희롱과 성추행은 고용노동부 소속 지방고용노동청에서도 조사를 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의 경우 보통 상사가 부하에게 직장에서의 지위를 이용해 이뤄지는 게 많기 때문입니다. 근로감독관들은 직장 내 성희롱을 조사해 사업주에게 과태료를 부과하거나 징계 지시를 내립니다.

문제는 고용노동청에서 성희롱 조사를 할 때, 2차 피해가 발생될 수 있는 환경에서 이뤄진다는 점입니다. 지난해 11월,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A 씨는 함께 피해를 당한 청소노동자들과 서울남부고용노동청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가해자와 피해자를 한 자리에서 조사하는 대질신문이었는데 장소는 공개된 사무실이었습니다.

근로감독관들은 평소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 등 근로기준법과 관련한 조사를 사무실에서 진행합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피해자가 모멸감을 느낄 수 있는 민감한 문제인데도 노동청에서는 다른 조사와 똑같은 방식으로 이뤄지고 있었습니다.
성희롱 피해자 조사 당시 사진
성희롱 피해자 조사 당시 사진
담당감독관은 피해자들과 바로 옆에 가해자를 앉혔습니다. 성희롱 가해자와 피해자의 사이는 30cm도 떨어지지 않았습니다. 또 공개된 사무실이라 옆에서는 다른 사건의 피해자가 다른 근로감독관에게 조사를 받고 있었습니다. 김포공항 청소노동자들이 피해사실을 말하고 있는데, 다른 사건의 피해자가 그걸 듣고 "자신도 그렇게 당했다"며 끼어들기도 했습니다. 성희롱 사실을 다시 생각을 더듬어 새롭게 털어놓는 것도 쉽지 않은 일인데, 옆에서 다른 사람이 그걸 듣고 말을 거는 환경에서 조사는 이뤄졌습니다.

[A 씨 / 김포공항 청소노동자, 성희롱 피해자]
"우리 같이 피해받은 사람들이 마지막으로 손을 내밀어서 도와달라고 하는 데인데, 과연 여기 와서 도움을 받고 있는 게 맞는가 이게. 자괴감이 들었죠. 보호받지 못한다는 것에 대해서."

A 씨는 당시 분리된 공간에서 조사를 받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해당 근로감독관이 별도 장소가 없고, 조사실의 경우 사무실에서 자신이 쓰는 컴퓨터를 옮길 수 없다는 이유로 그대로 진행했다고 말했습니다.

● 2차 피해당하는 성희롱 피해자

해당 지방노동청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서울의 한 요양병원에서 치료사로 일하던 30대 여성 B 씨도 관리자에게 성희롱을 당했습니다. 피해를 당한 치료사들과 함께 서울관악노동청을 찾았습니다. 공개된 사무실이었고, 배정된 근로감독관은 남성이었습니다.

[B 씨 / 요양병원 치료사, 성희롱 피해자]
"처음에 조사를 할 때 좀 의아하긴 했었어요. 설마 이런 곳(공개된 곳)에서 조사를 하는지. 그래서 저희가 이제 이거 독립적인 어떤 방에 들어가서 하는 거 아니냐고 저희가 물었고. (감독관은) 단독적으로 된 방이 없다 라고 얘기를 하셨어요."

B 씨가 당한 성희롱의 경우 함께 있는 자리에서 당한 것도 있었지만, 피해자 개인이 개별적으로 당한 것도 있었습니다.

[B 씨 / 요양병원 치료사, 성희롱 피해자]
"아무래도 성 문제는 좀 예민한 부분이 있잖아요. 제가 (다른 피해 동료들에게) 알리고 싶지 않은 얘기들도 있었었고. 피해자 세 명이 갔었는데 그 세 명을 일 대 일로 물어보는 게 아니라 일 대 삼인 자리에서, 일 대 일로 있었던 일을 물어보니까."

B 씨는 어쩔 수 없이 조사를 마친 뒤, 국민신문고에 이에 대해 민원을 제기했습니다. 해당 노동청은 그제서야 B 씨 사건에 대해 여성근로감독관을 배치하고 독립된 공간을 마련해 재조사했습니다.

● 경찰과 고용노동부의 조사 매뉴얼

경찰의 경우 성폭력 사건을 전담하는 여성청소년수사팀이 별도로 있습니다. 수사 매뉴얼에는 피해자 조사를 진술녹화실 등 격리된 장소에서 수사하고, 원칙적으로는 여경이 수사하도록 되어 있습니다. 피해자가 동의를 받은 경우에만 남성 조사관이 조사합니다. 또 피의자 확인을 할 때는 범인식별실을 사용하고,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가해자와 피해자의 대질조사를 하지 않도록 되어있습니다. 피해자가 성폭력 경험을 되풀이해서 진술할 필요가 없도록 녹음과 녹화를 하라고도 되어있습니다.

반면 고용노동부의 성희롱 조사 매뉴얼은 엉성합니다. '가능한 한' 여성 근로감독관이 담당하고, ‘가능하면’ 별도의 독립된 공간에서 조사하라는 2가지 부분만 나와 있지만 그마저도 의무가 아니라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고용노동부 근로감독관 성희롱 조사 매뉴얼
실제로 올해 노동청에서 이뤄진 성희롱 조사를 살펴보면 피해여성 중 37.5%가 남성 감독관에게 조사를 받았습니다. 또한 41%의 피해자는 공개된 사무실에서 조사를 받았습니다. (출처 : 고용노동부 - 더불어민주당 강병원 의원실 제공) 

59%의 피해자가 독립된 공간에서 조사를 받았지만, 노동청에 성희롱 조사를 위한 별도의 조사실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악성 민원인 등을 대처하기 위한 영상조사실이 있지만 이마저도 사용되지 않아 방치된 경우도 있습니다.

A 씨가 조사를 받은 남부고용노동청의 경우 근로감독관 사무실 내에 영상조사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조사실은 오랫동안 사용되지 않아 지저분하고 컴퓨터도 켜지지 않는다는 이유로 감독관은 조사실을 사용하지 않았습니다. 조사실이 있어도 사용할 수 없는 환경이거나, 별도 조사실 자체가 없는 노동청이 많습니다.

● 인권위, 고용노동부에 2차 피해 막도록 권고

A 씨의 문제 제기로 국가인권위원회는 지난 6월 고용노동부에 권고를 내렸습니다. 성희롱 피해자들이 2차 피해를 당하지 않도록 분리된 공간에서 조사하고, 근로감독관들에게도 인권 교육을 하라는 취지였습니다.

인권위 권고 한 달 뒤 고용노동부는 분리된 공간에서 성희롱 사건 조사할 것을 의무화했습니다. 하지만 고용노동부의 매뉴얼 변경은 거기서 그쳤습니다. 고용노동부 관계자는 여성 근로감독관 배정을 의무화하거나, 별도 조사실을 모든 노동청에 마련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답했습니다. 

민주노총 노동법률센터소속 배현의 노무사는 "일선 노동청에 별도의 조사실이 마련되어 있지 않고, 근로감독관들도 성인지적 관점이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또 "피해자를 보호하기 위한 보다 강제력있고 구체적인 매뉴얼 마련이 필요하고, 성희롱 등 민감한 사건처리를 위한 전담 감독관 제도도 고려해봐야" 한다고 말합니다.
고용노동청에서 조사받은 성희롱 피해자
경찰에 비해 지방고용노동청이 성폭력 사건 조사 매뉴얼이 구체적이지 못하고, 전담 조사관이 없는 건 절대적인 사건 수가 적어서 일 수 있습니다. 실제로 직장 내 성희롱으로 노동청이 조사하는 사건은 1년에 400여 건 수준으로 임금체불이나 부당해고 등에 비하면 매우 적은 수준입니다.

직장 내 성희롱 문제는 상사가 가해자, 부하가 피해자인 경우가 대부분이고 계속 몸담고 있는 회사 안에서 일어나 피해자의 문제 제기가 매우 어렵습니다. 노동청에 신고 되는 경우는 피해자가 다수거나, 노조에서 문제제기를 한 경우가 많고 피해자 개인이 나서기는 쉽지 않습니다.

이처럼 노동청에서 조사받는 이들은 쉽지 않은 환경에서 어렵게 용기를 내 고발을 한 피해자입니다. 이런 피해자들이 도움의 손길을 뻗은 노동청마저 성희롱의 추가 피해를 발생시키지 않도록 세심한 노력이 필요합니다.

관련 기사 : ▶ 가해자-피해자가 함께…성희롱 '2차 피해' 만드는 노동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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