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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광복절 전후로 새롭게 발굴되는 '위안부 문서'

[취재파일] 광복절 전후로 새롭게 발굴되는 '위안부 문서'
● '위안부 문서' 공개로 북적인 기자회견

어제 오전 세종대학교에서 기자회견이 열렸습니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관련 문서를 연구해 주요 내용을 중간보고회 형식으로 알리는 자리였습니다. 세종대는 지난 15일과 18일, 19일 세 차례에 걸쳐 보도자료를 배포하며 홍보했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는 기자회견 전날 통화에서 "해당 문서와 연구 내용은 한국에서 제대로 알려진 적이 없어 이번에 처음 공개되는 내용들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기자회견이 열리는 강당은 취재기자와 방송 카메라 장비로 북적였습니다.

기자회견에서 밝힌 호사카 교수의 요지는 이렇습니다.

1930,40년대 당시 일본은 일왕 아래 군과 내각이 나눠져 있다. 일본은 지금까지 일본군의 위안부 동원은 인정했지만, 일본 정부 부처들의 관여는 언급하지 않았다. 이번에 연구한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 중 '시국이용 부녀유괴 피의사건에 관한 건'(1938.2.7) 등의 문서를 통해 일본군 뿐 아니라 일본 외무성 소속 영사관과 내무성 소속 경찰국 또한 위안부 동원에 편의를 제공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뿐 아니라 1993년 고노담화에서도 일본군의 개입만 인정했을 뿐 일본 정부의 개입은 언급하지 않아 법적 책임을 회피한 것이다. 한국인들이 그나마 양심적인 선언이라 생각했던 고노담화 조차 일본 정부의 책임을 피하기 위한 기만적인 부분이 있다. 오늘 발표된 문서를 토대로 일본 정부에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다.

호사카 유지 교수 위안부 관련 문서 공개
● 광복절 전후로 새롭게 발굴되는 '위안부 문서'

호사카 교수가 번역 및 연구중인 <종군위안부 관계자료집성>(이하 집성)은 총 5권으로 일본에서 1997년에 출판됐습니다. 와다 하루키 등 3명의 교수가 '아시아여성기금'의 이름으로 편집한 이 책은 1930,40년대 당시 일본군 위안부와 관련한 일본정부 문서를 모아둔 공문서집입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에 따르면 이 책에 들어있는 문서는 80년 전의 일본어를 수기로 써둔 것이 많아 한국에 번역을 할 수 있는 사람이 10명도 되지 않습니다. 호사카 교수는 일본인들 조차 읽기가 쉽지 않아 한국은 물론 일본에서도 이 공문서집과 관련된 연구는 거의 이뤄지지 않았다고 말합니다. 호사카 교수는 자신이 독도 연구에 매진하느라 위안부 연구는 미뤄둬 이러한 사실이 지금에야 드러나게 된 걸 반성하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다른 전문가들의 말은 다릅니다. 이신철 성균관대 교수는 "연구자들이 2000년대 초반부터 계속 해왔던 이야기다."고 말합니다. <집성>이 일본에서 출판된 뒤, 10여년 전부터 한국에서 번역과 연구가 이뤄져왔다는 겁니다.

실제로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표한 <집성>과 '시국이용 부녀유괴 피의사건에 관한 건'(1938.2.7) 문서(이하 와카야마현 경찰 문서)가 한국에 소개된 적이 있는지 찾아봤습니다. 이 문서를 토대로 처음 일본군 뿐 아니라 일본 정부 부처들이 위안부 동원에 개입했다는 주장이 언론에 등장한 건 2004년이었습니다.

日 학자 "위안부 日 국가차원 동원" (2004년 9월 20일, 경향신문)

위의 기사에서는 일본의 위안부 연구자 나가이 가츠 교토대 교수가 서울대에서 열린 학술발표회에서 <집성>의 와카야마현 경찰 문서를 토대로 영사관과 내무성의 개입을 알렸습니다. 어제 호사카 유지 교수가 공개한 내용과 같은 내용입니다.

이후에도 <집성>은 언론에 새롭게 조명됩니다.

- "일제 위안부 동원에 영사관까지 개입" (2007년 3월 5일, 연합뉴스,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 "일본군 위안부 파견 비밀문서 발견" (2012년 8월 16일, 연합뉴스,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 일본 "위안부 연행 증거없다"지만 자국 문서엔 '연행' 언급 (2015년 4월 8일, 연합뉴스,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 부녀자 유괴 위안부로 동원…문건 단독입수 (2017년 7월 9일, KBC,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 일본 경찰도 범죄로 판단했던 위안부 모집…문서 공개 (2017년 8월 13일, 연합뉴스, 김문길 부산외대 명예교수)
- "위안부 조직에 日 정부 개입"…호사카 교수, 일본 자료 공개 (2017년 9월19일, 연합뉴스, 호사카 유지 세종대 교수)


특히 <집성> 중 '와카야마 현 경찰 문서'는 2004년 나가이 가츠 교수가 발표한 이후 2007년과 2017년 7월, 2017년 8월, 어제 호사카 교수까지 네 차례나 언론에 새롭게 공개되는 것처럼 등장했습니다. 또한 2012년과 2017년에는 <집성> 자료 관련 연구가 발견되고 공개되는 시점 또한 8월 15일 광복절을 전후한 시기인 것이 눈에 띕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 위안부 관련 문서 공개
● <집성>에 대해 계속된 연구

한혜인 성균관대 동아시아역사연구소 연구원은 호사카 유지 교수가 발표한 '내무성 통첩 문서'는 2004년 나마이 카즈 교수 발굴 뒤 일본에서 이미 많은 논쟁이 있었다고 말합니다. 내무성 통첩에는 위안부의 도항 조건에 "추업(매춘업)에 종사하여 만 21세 이상"에 한해 당분간 이것을 묵인할 것이라고 나와있습니다. 일본 우익들은 이를 빌미로 21세 이상 매춘부에 한해 위안부를 동원했다며 마구잡이식 동원을 막기 위한 일본의 선의의 개입이라 주장하는 한편, 반대 쪽에서는 이 문서를 근거로 위안부 동원 시스템에 내무성과 외무성이 직접 관여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고 주장해왔습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가 기자회견에서 내무성 통첩 문서를 토대로 일본군 뿐 아니라 일본 외무성, 내무성이 위안부 동원에 개입해왔다는 내용은 2004년 이후 한국에서 계속 연구해왔다는게 다수 전문가들의 입장입니다. 한혜인 연구원은 "내무성 통첩 문서와 관련해서는 추가적인 연구도 계속되고 있다. 지난해에는 와다 하루키 도쿄대 명예교수가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내무성 통첩이 내려지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을 책에서 언급했다."고 말합니다.

21세 이상 매춘부로 제한하는 규정이 담긴 내무성 통첩 문서는 일본 내부의 지침으로 발견된 것인데 당시 조선에서는 위안부와 관련해 이러한 지침이 발견되지 않았습니다. 와다 하루키 교수 등은 21세 규정을 만들어 놓으면 그보다 어린 사람을 위안부로 동원했을때 명백한 불법이 되는데, 규정 자체가 없으면 그렇지 않으니 식민지였던 조선에서는 그런 규정이 없었을 거라는 겁니다. 한혜인 연구원은 “특정 지침이 없었다는 사실은 자료로 남기지 않기 때문에 예측으로 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실제로 조선인 위안부 할머니들이 동원된 건 17, 18세가 가장 많았다. 아무리 식민지라고 해도 모든 것을 불법으로 할 수 없으니 조선에서는 내무성 통첩 자체를 내리지 않았을 것이라는게 최근 연구”라고 밝혔습니다. 

● 고노 담화는 일본정부의 법적 책임을 피하기 위한 의도?

호사카 유지 교수는 기자회견에서 일본군이 아닌 일본 정부 부처의 개입이 이번 연구로 드러나면서 1993년의 고노 담화조차 법적 책임을 회피하려는 의도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고 말했습니다. 2차 대전 이후 지금은 사라진 일본군에 위안부 강제 동원의 법적 책임을 돌리고, 일본 정부는 도의적인 책임만 통감한다는 표시만 했다는 겁니다.

하지만 고노 담화를 살펴보면 군 뿐아니라 '관헌'(官憲)이라는 표현이 나옵니다.

위안부의 모집에 관해서는 군의 요청을 받은 업자가 주로 이를 맡았으나 그런 경우에도 감언(甘言), 강압에 의하는 등 본인들의 의사에 반해 모집된 사례가 많았으며 더욱이 관헌(官憲) 등이 직접 이에 가담한 적도 있었다는 것이 밝혀졌다. 또 위안소에서의 생활은 강제적인 상황하의 참혹한 것이었다. - 고노 담화(1993.8.4)

관헌이라는 표현이 일본 정부 부처를 뜻하는 것이 아닌지 호사카 유지 교수에게 물으니 "관헌이라는 단어의 뜻은 애매하지만 군 헌병대를 지칭하는 것이라고 짐작된다."고 답했습니다. 반면 한혜인 연구원은 "고노 담화에서 '관헌'은 정부 외무성, 내무성을 뜻하는 것"이라며 담화에서 일본은 군과 정부의 위안부 동원 관여를 인정했다고 말합니다. 다만 아베 등 일본 정부가 인정하지 않아온 것은 조선인 위안부를 군과 관헌이 직접 관여해서 강제 연행을 한 사실이라는 겁니다.

조선인 여성을 위안부로 동원하기 위해 직접 납치해 트럭에 태우는 등 강제 연행을 한 증거가 남아있지 않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는 다른 많은 증거들에도 강제 연행을 부정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고노 담화에 위안부 동원의 책임을 일본군에만 돌리고 당시 일본 정부 부처의 법적 책임은 회피하려는 의도가 담겼다는 호사카 교수의 주장은 논쟁의 여지가 있어 보입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 위안부 관련 문서 공개
● '문서 공개'가 반복되는 이유

<집성>과 '와카야마현 경찰 문서', '내무성 통첩 문서'가 위안부 강제동원의 명백하고 중요한 증거임은 틀림없습니다. 그런데 왜 일부 교수들은 2004년 이후 수 차례에 걸쳐, 특히 광복절을 전후로 새롭게 발굴되고 공개된 문서처럼 발표할까요.

이신철 성균관대 교수는 "위안부 연구가 프로젝트 중심, 성과 중심으로 지원된다. 일본에 대한 즉각적인 대응을 중심으로 학문연구가 정치화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말합니다. 이 교수는 "정부가 위안부 연구를 지원할 때 1년 안에 이슈화될만한 성과를 요구한다. 연구라는 게 5년, 10년 장기적으로 해야할 것들이 있는데 그런 이슈에 대한 지원분위기는 형성이 안 된다."는 게 이처럼 나왔던 내용을 새롭게 공개되는 것처럼 내어놓는 이유일 수 있다고 말합니다. 학문적인 연구가 위안부 피해자 문제를 다층적으로 바라보고, 학술적으로 확장시킬 수 있도록 나아가야 하는데, 정부 지원은 즉각적으로 일본 정부의 책임을 촉구할 수 있는 연구에 집중된다는 겁니다. 

호사카 유지 교수의 기자회견과 <집성>에 대한 반복되는 보도를 보며, 2012년 이명박 전 대통령의 독도 방문과 유사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대통령의 독도 방문은 즉각적으로 통쾌한 마음을 불러일으키지만, 장기적으로 봤을 때 한-일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고 이미 실효적 지배하고 있는 독도를 국제 사회에 분쟁지역화 하는 우려를 낳았다는 비판을 받습니다. 

이처럼 위안부 문제 또한 일시적으로 분노의 감정을 일으키거나 잠깐 이슈화되는 연구보다, 일본의 역사부정을 정확히 파악하고 위안부 문제의 실질적인 해결의 실마리를 찾는 연구에 대한 지원이 필요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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