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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친구들 : 숨어있는 슬픔' - 마음을 포개는 일

[취재파일] '친구들 : 숨어있는 슬픔' - 마음을 포개는 일
1. 
내 친구. 친구의 이름엔 꽃花자가 들어갔다. 친구의 어머니는 통통한 내 친구를 ‘꽃돼지’라고 불렀다. 친구를 부르는 어머니의 목소리에선 늘 행복이 터져나갈 것만 같은 팽팽한 기운이 느껴졌다. 초등학교 운동회 날, 같은 반이었던 우린 오합지졸 다른 친구들과 손을 맞잡고 - 원을 만들어 - 단체 무용을 하는데, 멀리서도 그 모습이 귀여워 어쩔 줄 몰라하시는 친구 어머니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유, 우리 꽃돼지, 아유, 우리 꽃돼지." 해맑고 애교 많은 친구의 성격은 부족함 없이 사랑받는 아이들만 가질 수 있는 그것이었다. 친구와 난 같은 고등학교에 진학해 같은 반에서 또 만났다.

수학여행을 앞두고 친구가 잔기침을 했다. 며칠째 친구의 목엔 아가 냄새가 배어 있을 것만 같은 앙증맞은 손수건이 돌돌 말려 리본 매듭으로 묶여 있었다. 여행하는 동안 친구는 잔기침에 더해 열병이 났다. 숙소를 빠져나가 감기약을 사다 주었다. 저녁에 단체 장기자랑을 한다고 하는데 친구는 기운이 없어 방에 있겠다고 했다. 홀로 있으면 무서울 것 같아 함께 이불을 덮고 누워 수다를 떨었다. 친구는 여행을 마친 다음 날부터 결석했다.

차를 타고 3시간은 가야 하는 대학병원에 입원했다고 했다. 선생님이 친구의 병에 대해 설명하자 교실은 삽시간에 울음바다가 되었다. '감기가 아니었구나….' 병원에 갔더니, 친구는 약기운에 취해 그렇다며 긴 잠에 빠져 있었다. 기다리길 한 시간 여, 눈을 뜬 친구가 처음 뱉은 말은 “어, 너 여기 어떻게 왔어? 중간고사는?”이었다. 다녀간 지 얼마 안 돼 친구는 세상을 떠났다.

발인하던 날은 모의고사를 보는 날이었는데, 옆 반 담임선생님이 조회 시간에 대신 들어오셨다. 친구를 태운 차가 오늘 마지막으로 학교 운동장에 들를 것이라고, 너희들은 동요하지 말고 문제 잘 풀라 말하더니, 본인의 말에 본인도 놀랐는지 쭈뼛거리다 이내 나가셨다.

하염없이 창밖을 보기 몇 시간 째, 정문 밖 오르막길 끝에 국화를 잔뜩 붙인 버스 한 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차는 천천히, 아주 천천히 운동장을 크게 한 바퀴 돌았다. 사실 우린 운동장에서 뛰어노는 여고생들은 아니었는데. 친구가 제일 좋아하는 장소는 버스정류장에서 내려 학교로 들어오는 골목에 있는 분식집과 빵집이었는데. 미리 알았더라면 어머니한테 적어드렸을 텐데...

친구와 관련한 모든 소식이 그랬다. 한 박자 늦게, 나중에 전해 듣는 식으로만 알게 됐다. 그 즈음 교감 선생님이 노파심에 몇 번이고 담임선생님을 불러 신신당부하는 모습을 보았다. 평소보다 무거워진 공기를 느낄 뿐, 친구를 화제로 대화하지 못했다.

옆에 앉은 친구는 지금 이 일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지, 나만큼 슬픈지, 우리가 이렇게 죽은 친구에 대한 기억을 흘려보내는 게 맞는지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었다. 슬픔은 못지않게 컸지만, 가족 아닌 우리가 그것을 드러내는 일은 허락되지 않았다. 책상은 치워졌고, 사물함에 붙은 견출지는 손톱으로 긁어 떼어졌다.

몸을 틀어 움직일 때마다 팔이 부딪칠 정도로 가까이 앉아있던 사람이 한 순간에 사라졌는데, 마지막 가는 길을 볼 자격은 없었다. 친구를 잃은 슬픔, 그리움은 한동안 일상을 이어가는 일이 어려울 정도로 날 짓눌렀다. 충격도 컸다. ‘친구 아닌 나였더라면’ 하는 상상을 멈출 수 없었다.

“부모 죽은 것도 아닌데 너무 울상으로 다니지 마라”
없던 일처럼 대하라는 어른들의 주문이 가혹하고 비정해 어느 날은 분노가 치밀어 침대에서 벌떡벌떡 몸을 일으키기도 했다. 어느 한 장소에서도 마음껏 울어보지 못했다. 그렇게 황망하게 친구와 이별했다.

2. 
최근 한 다큐영화를 보고 15년 째 기억에서 지운 줄로만 알았던 고등학생 때 일을 떠올렸다. 영화 제목은 '친구들:숨어있는 슬픔'이다. 영화는 까만 바탕화면에 흰 글씨의 자막으로 시작한다.

"2014년 4월 16일 세월호 참사로 안산 단원고 학생들 중 250명이 우리 곁을 떠났다. 안산에서 함께 성장한, 적어도 2천 명 넘는 청소년들은 어느 날 갑자기 자신의 친구들을 잃었다"


친구를 잃은 친구들의 고백은 그렇게 시작된다.
안산 단원고 - 빈 교실
"저희는 안산에서 살았으니까 모두가 다 놀면 안산이고, 사실 여기 놀 데는 중앙동밖에 없거든요. 나가면 그 경치가 보이잖아요. 그러니까 같이 걸었던 거리, 같이 농담도 했던 장소, 같이 갔던 PC방. 장소는 그대로 있는데 친구가 없으니까 막 그 장소도 보기 싫더라고요."

"그날 약간 불안해서 XX에게 '야, 너 괜찮냐?' 그렇게 문자를 보낸 게 (톡에서) 그 1이 아직도 안 사라졌어요."

"(주위 친구들을 돌아보며) 아마 제일 처음으로 뜬 영상이 XX이 아니야? '야, 배 기울어진다!'고 말했던 애. 나중에 그 모습을 뉴스에서 딱 보는 순간, 진짜 아, 진짜 왜. 거기서 그러고 있냐…. 나오지…. 나오지…. "

"몰래 갔어요. 자율학습 한다고 말하고 친구들 장례식장을 다녔어요."

"친구의 시신을 찾았는데 근처 장례식장에 빈 곳이 없어서 멀리 가야한다는 소식 들었을 때, 안산에 장례식장이 얼마나 많은데… 장례식장 빈 곳이 없을 정도로 친구들이 많이 죽은 것이 너무 슬펐어요."
                                                                  -다큐영화 '친구들:숨어있는 슬픔' 中


250명의 친구들이 사라졌다. 한 다리 건너 이름 정도 알며 지내던 사이까지 더한다면, 2천 명보다 훨씬 더한 수의 학생들이 함께 자라온 친구를 잃은 셈이 된다. 한 사람의 빈자리에 250을 곱한 정도라고 해도 상상하기 어려운데, 이를 커뮤니티, 관계로 가져와 적용해 보면... 말이 나오질 않는다.

자신을 둘러싼 관계의 대부분을 잃었을 학생도 있다는 뜻이 되기 때문이다. 슬픔을 이야기하고 위로받고 싶은데, 터놓을 친구조차 사라진, 그야말로 진공 상태에 놓인 학생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단원고 기억교실에 가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체감할 수 있다. 교실의 문마다 수학여행을 간 학생과 희생학생, 생존학생의 수를 표시해 두었는데, 2학년 7반의 경우 수학여행을 떠난 학생은 33명, 그 중 생존학생은 1명이다.

3. 
올해 2월, 세월호 희생자를 기억하고 가족들의 마음을 보듬는 공간인 <이웃>이 세월호 희생학생의 친구들을 만났다. ‘이웃'의 설립자이기도 한 정혜신 정신과 전문의가 '친구를 잃은 친구들'과 몇 달에 걸쳐 여러 차례 대화 모임을 가졌다.

이 프로젝트에서 특이한 건 대화에 참여한 또 하나의 주축, '공감기록단' 학생들이다. 전국 곳곳에서 자원한 26명의 청소년들이 '공감기록단'이 되어 정혜신 선생님과 함께, 친구들의 육성을 듣고 기록했다.

어디서도 꺼내지 못했던 어려운 이야기를 털어놓는데, 생전 본 적 없는 낯선 이들이 함께 한다면 부담스럽지 않을까? 걱정도 잠시, 친구들은 점차 또래 세대인 공감기록단 학생들을 친밀하게 여기기 시작한다. 공감기록단은 친구들의 사연을 진지하게 경청하며 하나하나 소중하게 기억한다. 그리곤 그들이 들려준 이야기를 애니메이션으로, 영화로, 글로 만들어 돌려준다.
다큐영화 '친구들:숨어있는 슬픔'
'친구들:숨어있는 슬픔'은 반 발자국 물러선 거리에서 그 모든 과정과 결과물을 기록한 다큐영화이다. 마치 대화에 함께 참여하고 있는 것만 같은, 몰입감을 느끼게 한다. 이야기의 농도가 진해서였을까, 연출자는 욕심내지 않고 스스로 드라이해졌다.

그토록 절절한 사연들을 왜곡 없이 전하려 했다는, 사명감 같은 것이 느껴진다. 영화엔 친구를 잃은 이들의 육성과, 그 이야기를 듣고 기록하는 공감기록단 학생들 - 예상치 못하게, 새롭게 친구가 된 이들 - 의 이야기가 함께 기록됐다.
참사 후 3년, 친구들은 이제 스물한 살 성인이 되었다. 그 중 한 명은 “기억 속 친구는 나이 들지 않은 채 교복 입은 고등학생 모습 그대로”라고 말하며 서글퍼한다. 마음 속 꼭꼭 숨겨둔 슬픔은 대화가 깊어지자 수면 위로 금세 떠오른다.

숨겨두라는 어른들의 지시를 따랐던 아이들의 슬픔은 상상한 것 이상으로 크고 무거운 것이었다. 없는 체 한다고 없어질 수 있는 게 아니었음이 역설적으로 드러난다. 스스로를 이 비극의 조연 쯤이라 여기고 물러나 있던 학생들이, 실은 배려받지 못한 채 누구보다 큰 고통 속에 오랜 시간 노출되어 있었다는 사실도 함께 알 수 있다.

"애들이 배에 타는 걸 막아야 하는 거예요. 막 꿈인데도 기사 뽑아서 ‘야 ,이거 가면 안 된다고. 내가 너 타는 배 선장 이름도 알고 배 이름도 알고 어떻게 되는 지 다 아니까.’ 이러면서 말려요. 근데 뭔 소리냐고 애들이 그냥 배를 타요, 다. 그리고 아침에 뉴스를 보는 순간, 딱 잠에서 깨요. 그러고 나면 하루 종일 ‘이번에도...’ 꿈에서라도 어떻게 막을 수 있으면 좋겠는데 꿈에서도 그게 안 돼요."

"저의 슬픔을 부모님의 슬픔과 어떻게 비교하겠어요. 비교 자체가 안 되죠. 장례식장에 가서도 마음껏 못 울었어요. 부모님이 더 슬픈데 제가 울면 안 되잖아요."

"저 혼자서 막, 중압... 그 혼자 막 중력을 배로 받고 있는 것처럼 무겁더라고요 몸이."


"(말을 잘 잇지 못 하던 한 친구가) 지금 이런 제 모습도 너무 화가 나요. 내가 더 말을 조리 있게 잘한다면, 내가 더 나은 사람이라면 이 슬픔을 세상에 더 멀리 알리고, 떠난 친구들이 조금이라도 더 기억되게 하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었을 텐데. 그게 너무 슬퍼요. 내가 뛰어난 사람이 아니란 게, 내가 좀 더 나은 사람이어야 하는데..."

화면 속 친구들은 끊임없이 자책한다. 쉽게 합리화와 망각에 성공한 어른들에게 이보다 더한 회초리는 없다. ‘무엇이 이 착하고 속 깊은 친구들을 지옥으로 내몰았나’ ‘우리 사는 세상에서 또 이런 일이 일어나게 내버려둘 것인가'와 같은 생각이 떠오를 때, 피하지 않기란 어려운 일이다. 영화를 보고 나면 아직 배워야 할 것이 많이 남았다는 걸 깨닫게 된다. 어른이라고 성장이 멈추는 것은 아니니까.

4.
영화의 막바지에 이르러 경이로운 장면이 펼쳐진다. 대화가 깊어지자 여태 청자(聽者)였던 공감기록단 학생들 한 명 한 명이 누가 시키지도 않았는데, 각자의 삶 속에서 견뎌야만 했던 슬픔을 털어놓기 시작하는 대목이다. 세상 무너지는 시간을 홀로 버틴 줄로만 알았던 친구들에게 공감기록단 학생들은 내밀한, 자신의 이야기를 들려줌으로써 위로를 건넨다.

“네 슬픔이 작은 것도, 이해 못할 것도 아니야. 네 이야기를 들으니 말 못한 내 슬픔도 떠올라. 한 번 들어볼래?”

세상을 향한 증오와 분노, 서운함 같은 감정들은 벼랑에 떠밀리거나 홀로 고립돼 있을 때 배가 된다. 결국 깊게 공감해주는 타인을 만나야만 치유의 작업은 '비로소' 완성된다. 공감 없이는, 그 어떤 현란한 말과 적극적인 행동으로도 불가능한 것이다. 마음을 포개는 일을 통해 말하던 이와 듣는 이가 함께 치유되었다.

이 경험은 앞으로도 이 친구들이 살아가며 역경을 만날 때마다 떠올라 스스로를 치유 - 구원 - 하게 하는 첫 걸음이 될 테다. 역으로, 누군가 그런 곤경에 빠져 있는 모습을 볼 때면, 내가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알고 있어 절로 그리 하게 될 것이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사가 되어주는 일 말이다. 15년 전, 친구를 잃은 나에게도 이런 소중한 깨달음을 얻을 기회가 있었다면 어땠을까. 내 인생은 조금이라도 달라졌을까.   
영화는 공동체 상영을 통해서만 볼 수 있다. 이웃에서는 일터, 학교, 작은 모임, 가족 등 공동체 상영을 원하는 이들에게 무료로 상영한다. 치유공간 이웃 누리집(www.이웃.kr)에서 신청하면 된다(문의 031-403-0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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