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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방통고, 청각장애인에게 수업을 허(許)하라!

[취재파일] 방통고, 청각장애인에게 수업을 허(許)하라!
● 청각장애인 은정 씨, 방송통신고등학교에 진학하다

올해 48살인 박은정 씨는 2급 청각장애인입니다. 누구보다 성실하게 살아왔지만 삶이 녹록지는 않았다고 합니다. 지금은 험한 공사판에서 일하며 생계를 이어가고 있습니다.
만학도인 청각장애인 박은정 씨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오면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텐데, 은정 씨는 책을 꺼내 듭니다. 은정 씨가 보는 책은 그냥 책이 아닙니다. 교과서입니다. 고등학교를 졸업하지 못한 은정 씨는 뒤늦게 고등학교에 편입해 학생이 됐습니다. 은정 씨가 다니는 학교는 '방송통신고등학교'입니다.
방송통신고등학교 심벌 (출처 : 방송통신고등학교 홈페이지)
방송통신대학교는 들어봤어도 방송통신고등학교는 못 들어봤다는 분을 위해 간단히 설명하겠습니다. 방통고(방송통신고등학교)는 정규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청소년이나 성인에게 교육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지난 1974년 설립된 학교입니다. 현재 전국 16개 시, 도 42개 공립 고등학교에 부설 형태로 설치돼 있습니다.

● 들리지 않는 수업에 절망하다

부푼 꿈을 안고 진학한 고등학교였습니다. 그런데 은정 씨는 진도를 따라가는 게 벅차다고 울먹입니다. 은정 씨가 공부를 열심히 안 한 탓일까요?
방송통신고등학교 설립 목적 (출처 : 방송통신고등학교 홈페이지)
방통고 수업은 주로 온라인 동영상 강의로 이뤄집니다. 하지만, 동영상 강의만 들으면 끝나는 게 아닙니다. 한 달에 두 번은 교실에서 이뤄지는 오프라인 수업에 출석해야 합니다. 시간표는 꽤 빡빡한 편입니다. 출석수업에서는 인터넷 수업으로는 불가능한 실습이나 실험, 토론, 특별활동 등도 이뤄집니다. 압축적으로 강의가 진행되다 보니 학생들은 보통 온종일 수업을 듣습니다.

그런데 은정 씨는 오프라인 수업이 있는 날이면 극심한 스트레스에 시달린다고 합니다. 선생님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 알아들을 길이 전혀 없기 때문입니다. 수화통역사가 있는데 뭐가 문제냐고요? 안타깝게도 교실에서 수화통역사를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들리지 않는 수업을 들으려고 장시간 교실에 앉아 끙끙거릴 수밖에 없는 겁니다. 선생님의 목소리가 들려도 지루하고 쉽지 않은 수업일 텐데, 멀뚱멀뚱 칠판만 바라봐야 한다면 얼마나 답답할까요.

● "동영상 강의도 이해하기 어려워요"

온라인 동영상 강의는 다행히 자막이 지원됩니다. 자막을 보면서 수업을 들을 수 있는 거죠. 그런데도 은정 씨는 여전히 수업을 이해하는 게 어렵다고 토로합니다.
집에서 동영상 강의를 듣는 은정 씨
비장애인이라면 분명히 이런 의문이 들 겁니다. '자막이 나오면 그대로 읽고 이해하면 될 텐데 뭐가 문제라는 거지?' 그런데 말입니다. 문제가 맞습니다. 쉽게 얘기하면 이렇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가 있는 사람은 한국어가 모국어가 아닙니다.

그럼 청각장애인의 모국어는 뭐냐고요? 바로 '수화(수어)'입니다. 한국에서만 산 사람이 다른 나라 언어에 서툰 것처럼, 수화가 모국어인 청각장애인은 한글에 서툴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자막보다도 수화 지원이 더 중요합니다. 특히 내용이 어렵고 복잡할수록 수화의 필요성은 더 커집니다.


● 왜 수화통역 지원이 안 되는 걸까?

방통고는 장애인만을 위한 학교는 아닙니다. 1만 명이 넘는 재학생 가운데 청각장애인은 십수 명에 불과합니다. 하지만, 배움의 기회는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제공돼야 하지 않을까요. 장애인차별금지법을 살펴보겠습니다.

장애인차별금지 및 권리구제 등에 관한 법률
제14조(정당한 편의제공 의무)
① 교육책임자는 당해 교육기관에 재학 중인 장애인의 교육활동에 불이익이 없도록 다음 각 호의 수단을 적극적으로 강구하고 제공하여야 한다.
-장애인이 필요로 하는 경우 교육보조인력의 배치
-청각장애인의 교육에 필요한 한국수어 통역 등 의사소통 수단


상식의 문제는 접어두고 법적으로만 따져봐도 교육책임자는 청각장애인에게 수화통역 편의를 제공할 의무가 있습니다. 더구나 방통고를 운영하는 주체는 국무총리실 산하 정부출연 연구기관인 '한국교육개발원'입니다.

● 청각장애인 현황도 제대로 파악 못 하는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개발원에 공문을 보내 현재 방통고에 재학 중인 청각장애인 학생이 몇 명인지, 이들에게 수화통역이 제대로 지원되고 있는지 물었습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SBS에 보내온 내용을 그대로 싣습니다.
방송통신고등학교 청각장애 학생 현황 (자료 : 한국교육개발원)
한국교육개발원에 따르면 재학 중인 청각장애인은 모두 12명인데 지원 내용에 대한 설명은 모호합니다. 지원을 받고 있다는 건지 아니면 지원은 안 되고 있는데 요청하면 받을 수 있다는 건지 또 누가 지원을 해준다는 건지 선뜻 이해가 가질 않습니다. 심지어 저와 만난 은정 씨는 이 표에 포함돼 있지도 않았습니다.

그래서 직접 취재를 해봤습니다. 기자가 파악한 청각장애인은 모두 14명입니다. 한국교육개발원이 말한 12명 보다 2명이 더 많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은 수화통역 지원을 받고 있었을까요. 14명 가운데 학교에서 지원해주는 수화통역사와 함께 수업을 받고 있는 학생은 5명뿐이었습니다.

은정 씨를 포함한 다른 5명은 전혀 지원을 못 받고 있었고, 나머지 4명은 청각장애인 본인의 요청으로 자원봉사자가 수화통역을 도와주고 있었습니다. 자원봉사자는 무급으로 일하는 분들입니다. 당연히 개인 사정이 있으면 수업에 빠질 수밖에 없고 청각장애인은 들리지 않는 수업을 혼자서 들어야만 합니다.

3주 전 기자와의 통화에서 한국교육개발원은 청각장애인이 불편함 없이 수업을 들을 수 있도록 미흡한 부분이 있다면 해결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그런데 최근에 다시 확인해본 결과 은정 씨는 여전히 수화통역사 없이 수업을 듣고 있었습니다. 은정 씨는 끝까지 수화통역을 지원해주지 않으면 1인 시위라도 할 것이라며 입술을 깨물었습니다.

● 은정 씨의 꿈은 요양보호사

은정 씨의 꿈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대학에 진학해 요양보호사 자격증을 따는 것입니다. 왜 자격증을 따고 싶냐고 묻자 치매를 앓고 있는 노모를 직접 돌보고 싶다고 답했습니다. 아픈 사람들을 돌보는 삶을 살고 싶다고도 했습니다.

은정 씨는 과연 무사히 고교 과정을 이수하고 빛나는 졸업장을 받을 수 있을까요. 은정 씨가 자신의 소중한 꿈을 이룰 수 있기를 간절히 응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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