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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장맛비 속, 도로 경계석을 숙소로 잡은 사람들

<斷想> 관보다도 작은 공간에서 양극화의 단면을 보다

[취재파일] 장맛비 속, 도로 경계석을 숙소로 잡은 사람들
친구랑 약속이 있어서 종로구 낙원상가 주변을 오랜만에 찾았다. 노후화되고 칙칙한 주변 풍경은 장맛비와 어우러져 평소보다 더 스산한 느낌이 들었다. 저녁 10시 반쯤 얼큰하게 취한 채로 식당에서 나와 서로 작별을 고했다.

길이 낯설어서 택시를 탈 요량으로 터벅터벅 걷고 있는데, 낙원상가 1층을 관통하는 수표로 구간에서 특이한 광경을 목격했다. 거기엔 도로 한쪽으로만 인도가 나 있었고, 그 위에 콘크리트로 만든 도로 경계석이 다섯 개 나란히 설치돼 있었다.
  
벤치로도 쓰일 수 있도록 만든 경계석의 크기는 성인 세 명 정도가 엉덩이를 맞대고 앉을 만했다. 성인이 거기서 누우면 어깨 폭은 적당하고, 길이는 짧아 무릎 아래쪽 발이 공중에 뜰 법한 크기였다.
도로 경계석을 숙소로 잡은 사람들
늦은 시간인데다 비까지 많이 내려 인적이 뜸할 것 같은데 인근에 맛집이 많아서 그런지 사람들이 제법 왕래했다. 그 와중에 다섯 개의 경계석은 각기 한 사람씩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첫 번째 경계석엔 허름한 차림새를 한 작은 몸집의 중년 여성, 그다음에는 몸에 맞지 않는 정장에다 중절모를 쓴 채 보따리에서 무언가를 꺼내고 있는 중년 남성이 보였다. 그리고 또 다른 경계석엔 누가 봐도 노숙자 행색의 할아버지가 보였다.

조금 지켜보니까 할아버지는 경계석 길이 쪽으로 다 두 다리를 올려놓고는 비스듬히 앉아 시계를 봤다. 그 옆의 중년 여성은 불안한 모습으로 계속 주변을 살피고 있었다. 보따리에서 뭔가를 꺼내던 남성은 이윽고 꺼낸 물건들을 옆에다 늘어놓기 시작했다. 아마도 누가 옆에 앉을까 경계하는 듯했다.

처음엔 뭔가 했는데, 이내 알아차렸다. 그 경계석이 오늘 그들이 누울 잠자리였다. 이전엔 그들이 어디서 휴식을 취했는지 모르겠지만, 비가 오는 그 날은 상가 관통도로 내 경계석이 물기를 피해 쾌적하게 잘 수 있는 좋은 공간이었던 거다.

죽어서 들어가는 관보다도 작은 도로 경계석을 차지한 채 장맛비가 쏟아지는 밤을 지새우려는 그들의 모습을 한동안 멍하게 쳐다봤다.

그들이 행복할 리는 없어 보였다. "당신이 뭘 안다고. 우리는 이대로도 그냥 행복해!"라고 말하면 반전일 테지만, 그래도 상식적인 판단에 그들은 불행의 끝자락에 있는 사람들일 테다. 
 
그들에 비하면 지금 우산을 쓴 채 귀가를 서두르고 있는 우리들, 자택이든, 전세든, 월세든, 하숙집이든 돌아가서 안전하게 머무를 공간이 있는 사람들은 얼마나 많이 가진 행복한 사람들인가.

1인당 국민소득이 3만 달러를 앞두고 있고, 각종 규제에도 집값은 또 오른다고 하고, 삼성전자는 애플을 제쳤다고 하며, 한국은행은 올해 경제성장률을 상향 조정했다고 한다.

하지만, 미래를 책임져야 할 우리 청년은 네 명 중 한 명이 실업자이고, 퇴직한 중년층은 창업실패로 노인 빈곤에 다가서고 있고, 이처럼 무덤보다 작고 차가운 돌 위에서 밤을 지새우는 사람은 늘어가고 있다.

양극화는 상대적 박탈감을 키운다. 박탈감을 느끼는 국민이 많은 나라는 행복한 나라가 될 수가 없다. 갈등이 커지면 모두가 불행해진다. 성장과 복지를 모두 충족시켜야 하는 현실, 우리는 과연 어떻게 극복해 나가야 할까.

잠시 그쳤던 비가 다시 세차게 내렸다. 비가 들이치는지 맨 바깥쪽 경계석에 누웠던 할아버지가 한쪽이 찌그러진 우산을 곁에다 펼쳤다. 스마트폰 시계가 11시를 가리켰다. 비가 새지 않은 집으로 돌아오는 중에 착잡한 생각들이 가슴을 적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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