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판 '니키타'가 탄생했다. 정병길 감독이 연출하고 김옥빈이 주연한 영화 '악녀'다. 김옥빈은 영화의 타이틀롤을 맡아 악녀이지만 악녀가 아닌 '숙희'를 연기했다.
충무로 상업영화 사상 유례가 없는 여성 원톱 액션 영화다. 여배우가 중심인 멜로물조차 기획되지 않는 상황에서 남성배우의 전유물처럼 여겨진 액션 영화에 김옥빈이 중심을 잡았다.
김옥빈은 행운아였다. 그러나 그 운을 받아먹고만 있지 않았다. 여자 액션 영화도 재미있게 잘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을 준비된 액션 연기와 감정 연기로 보여줬다.
"감독님이 절 믿어주신 거잖아요. 부응하고 싶었어요. 예쁜 인형이 칼 들고 액션하는 느낌을 주긴 싫었죠. 제가 잘해야 다음에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것이라는 책임감도 컸고요."
숙희는 국가 비밀 조직에 의해 살인 병기로 키워진 인물이다. 어느 날 자신을 둘러싼 비밀과 음모를 알고 복수에 나서게 된다. 김옥빈은 최정예 킬러라는 캐릭터를 잘 살리기 위해 몸을 만들어야 했고, 다양한 액션 동작을 습득해야만 했다. 지난해 7월부터 10월까지 서울 액션 스쿨에서 구슬땀을 흘렸다.
당시 액션 스쿨에는 '불한당' 팀과 '대립군'팀도 훈련을 받고 있었다. 김옥빈은 "액션스쿨에는 에어컨이 없어요. 그때가 한여름이라 엄청 더웠는데 그팀의 남자 배우들은 웃통 벗고 연습하는데 저는 혼자 땀 뻘뻘 흘리며 연습했어요. 그런데 공교롭게도 비슷한 시기에 세 영화가 개봉을 하게 됐네요"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악녀'는 기승전 '액션'의 구조를 띤 영화다. 총 123분의 상영 시간 중에서 액션 장면만 90여 분 가까이 된다. 완성된 영화는 단연 액션이 돋보인다.
"대본에는 '어떤 옷을 입고 어떻게 한다' 정도로 간략하게 표기돼있었어요. 액션합은 물론이고 카메라 앵글은 알 수가 없었죠. 촬영에 들어가보니 액션은 장면마다 각기 다르게 디자인 돼 있었어요. 1인칭 슛팅 액션, 장검 액션, 오토바이 체이싱, 속옷 비녀 액션 등 다채로웠어요. 카메라 앵글 역시 액션을 빛낼 수 있는 최선의 방향으로 짜여져 있었고요. 완성된 영화를 보며 '이 정도일 줄이야'라고 우리 모두 감탄했어요."
영화의 오프닝은 숙희의 1:70의 액션신이 연다. 주인공의 얼굴이 등장하지 않고 숨소리만 들리는 상태에서 남자들을 거침없이 제압해나간다. 약 10여 분에 이르는 이 롱테이크 장면은 '악녀'의 백미로 꼽힌다.
김옥빈은 대부분의 액션을 직접 소화했다. 이런 액션 영화에선 최대한 진짜만을 보여줘야 한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스스로 가장 좋아하는 액션신으로는 후반부 등장하는 마을버스 액션을 꼽았다.
"가장 고생을 많이 한 신이라 애착이 더 가요. 좁은 공간인데 움직여야 하는 인원수가 많았어요. 그 장면에서 날아다니는 사람들은 더미가 아니라 실제 사람이에요. 스턴트맨 오빠들과 좁은 공간에서 구르면서 서로 치고 받고 찌르고 때리고 그야말로 치열하게 싸웠어요."
위험부담이 큼에도 불구하고 리허설부터 직접 액션 장면을 소화한 이유에 대해서는 "연기를 해야 하는 건 배우인데 실제 공간 안에서 연습을 함께 해놔야 슛이 들어갔을 때 느낌이 생생히 살아요. 실제 촬영에서 배우들끼리 붙으면 그건 그냥 액션합이 아니라 감정 연기까지 더해지기 때문에 부상의 위험이 훨씬 켜요. 그래서 많은 리허설을 통해 연기를 미리 맞춰보고 조절해 나간거죠"
이 영화의 약점으로 거론되는 서사의 빈약함, 드라마의 아쉬움에 대해서 질문했다. 김옥빈은 숙희의 정체성과 캐릭터 확립에서 본인이 가졌던 의문과 그 의문을 풀어간 방식에 관해 설명했다.
숙희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에 자신과 분리해 인물의 감정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는 것을 강조했다.
"숙희에게 삭제된 감정이 많다고 생각했어요. 감독님과 처음 만나서 한 질문도 숙희와 중상(신하균)의 감정, 현수(성준)의 비밀을 알고 난 뒤 숙희의 반응 등에 관해 물었거든요. 숙희는 제가 이제껏 맡은 인물 중 가장 수동적인 인물이에요. 만약 제가 숙희라면 중상을 캘것 같은데 그녀는 계속해서 미온적인 태도를 취하잖아요. 저와는 많이 다르다 보니 나와 분리해 생각하고 연기하려고 노력했어요."
감정 연기에 있어 가장 많이 신경을 썼던 것은 모성애를 표현하는 부분이었을 터. 김옥빈은 "우리 영화에 뷰티(Beauty), 비스트(Beast), 베이비(Baby)까지 3B가 나오는데 아기 부분, 즉 모성애 표현이 저로서도 조금 아쉬워요"라고 말했다.
"아이와 함께 첫 신을 찍는데 저 역시 아기에 대한 것을 많이 놓쳤더라고요. 막막했죠. 저는 아이를 낳아본 적이 없으니까 그 마음을 정확히는 모르잖아요. 그래서 주변에 친구나 언니들에게 모성애에 관해 물어보고 참고하려고 했어요."
"그땐 제가 너무 어렸고, 그 자리가 어떤 자리인지를 잘 몰랐던 것 같아요. 이렇게 다시 오기 힘든 곳인 줄도요. 프리미어 상영 후 생각보다 많은 매체의 인터뷰 요청을 받았어요. 외신과 인터뷰를 하는데 '박쥐'의 태주를 기억해주시는 기자들이 많았어요. '태주가 여전사가 돼 돌아왔네'라고 하실 때 뿌듯하면서도 묘한 감정이 들더라고요."
국내에서의 홍보 활동 때문에 일찍 돌아와야 했지만, 칸에서 받았던 칭찬과 격려는 큰 비타민이 됐다. 특히 한국의 액션 영화의 진일보라는 칭찬과 그 중심에 있는 김옥빈에게 '니키타', '킬 빌'에 버금가는 캐릭터였다는 평가는 잊지 못할 보너스였다.
생각해보면 김옥빈도 처음에는 여성 액션 영화에 대해 반신반의 했다. 그러나 스스로 불가능을 가능으로 만드는데 일조하며 "여자 중심의 장르물은 안 된다"는 충무로 편견에 멋지게 한 방 날렸다.
(사진 = 김현철 기자)
(SBS funE 김지혜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