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병원성 조류인플루엔자(AI) 사태로 사육 닭을 도살해야 하는 제주시 오라동의 한 농가에는 적막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방역복을 뒤집어쓴 축산 공무원 10여 명만 부산하게 움직였다.
제주도 자치경찰이 농장 입구를 철저히 차단한 사이 닭들이 비닐에 담긴 뒤 '죽음의 가스'가 주입됐다.
이 농가의 기장오골계(백봉오골계) 175마리와 토종닭 525마리 등 700마리가 차례차례 도살 처분돼 포대에 담겼다.
불과 1시간 남짓한 시간에 이 같은 작업이 이뤄졌다.
가축 질병에 있어서 국내 그 어느 곳보다 청정함을 자랑하던 제주가 AI에 무방비로 노출되자 예방적 차원에서 강력한 대책이 진행되고 있다.
이 농장의 가금류가 살처분 된 것은 AI 양성이 의심되는 오골계 몇 마리가 반경 3㎞ 이내에 있기 때문이다.
풀썩 주저앉은 채 이 작업을 지켜보던 농장 주인 홍모(57)씨는 불과 어제저녁 제주시로부터 농장 가금류 살처분 계획에 대해 연락을 받았다.
홍씨는 "이럴 수가 있나. '허탈하다'라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다"며 망연자실해 했다.
지난 12월부터 기장오골계와 토종닭을 애지중지 키어왔고, 이제 여름 대목을 앞두고 곧 출하를 기대하고 있었다.
홍씨는 "한 달에 든 사료비만 80만∼90만원"이라며 "토종닭 등을 판 돈으로 생활비도 쓰고 저축도 하려고 부푼 계획을 세우며 출하 시기만을 손꼽아 기다려 왔다"고 말했다.
그는 기장오골계는 한 마리당 3만원이나 하고 토종닭도 마리당 2만원인데 보상을 제대로 받을 수나 있을지도 걱정했다.
제주에서 이날부터 7일까지 진행되는 살처분 대상 가금류는 12만 마리나 된다.
홍씨와 같은 가금류 사육 농가도 있으나 판매나 식용 등의 목적이 아닌 개인 소유 관상용 조류 200여 마리도 살처분 대상에 포함됐다.
토종 혈통보전을 위해 제주도 축산진흥원에서 사육하는 제주전통의 재래닭 600여 마리도 곧 도살 처분될 처지에 놓였다.
이같이 살처분이 대대적으로 이뤄지면서 여름철 보신을 위한 전통 복날을 앞두고 서서히 매출이 오르던 가금육 업계에도 찬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도내 유일의 토종닭 유통특구인 제주시 조천읍 교래리의 가금육 음식점들은 신선한 닭고기를 팔려고 살아있는 닭을 직접 키운 뒤 직접 도축하는 이른바 '가든형'으로 운영되고 있어 걱정이 크다.
AI 사태로 살아있는 가금류의 거래가 금지돼 앞으로 소비자들이 외면하지나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이다.
오모(61)씨는 "벌써 매출에 영향을 받고 있다"며 "가공육으로 조리한 음식 맛에 익숙하지 않거나 AI에 '닭요리를 피하자'는 분위기로 음식점을 찾던 손님들이 발길을 돌리는 일이 많아질 것 같다"고 걱정했다.
닭·오리 등 가금류 사육 농가들도 걱정이 많다.
도내 가금류 도축물량은 하루 평균 1만5천 마리며 이 중 30%는 다른 지방으로 팔려나갔다.
AI로 인해 제주산 가금육의 다른 지방 판매가 전면 금지되자 손실이 커지고 있다.
김종호 제주한라육계영농조합 대표는 "복날 여름 성수기에는 소비가 3배 이상 늘어왔기 때문에 올여름에는 그만큼 피해를 보게 될 것"이라며 "다른 지역은 방역지대 외에는 가금육 판매가 가능한데 제주는 모두 금지돼 형평성에 맞지 않는다"고 하소연했다.
(연합뉴스/사진=연합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