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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우전(烏鎭) 야경 속에서 알파고를 생각합니다.

[취재파일] 우전(烏鎭) 야경 속에서 알파고를 생각합니다.
"구이린(桂林)이 첫 번째라면 우전(烏鎭)이 두 번째입니다"

SBS 베이징 지국 중국인 직원이 다시 가보고 싶은 중국 내 명소로 저장성(浙江省) 우전(烏鎭)을 구이린 다음으로 꼽을 정도로 우전은 중국에서도 손꼽히는 명소입니다. 물이 풍부한 중국 화동 지역엔 많은 수향 마을이 있지만 우전이 그 중 으뜸이란 얘기를 자주 듣습니다.

근무지인 베이징에서 우전까진 중국 안이라고 해도 1,300km가 넘는 거리입니다. 차라리 서울에서 우전가는 길이 더 가까울 수 있는 거리죠. 그럼에도 우전 자체가 풍기는 기대감과 거기에 딱 맞는 바둑, 그것도 인간과 인공지능의 마지막 승부를 위해선 1,300km쯤은 한걸음일 뿐입니다.

바둑계에선 '알사범'으로 불리는 알파고와 대국에 나선 세계 랭킹 1위 커제 9단은 1997년생입니다. 생각해보니 만 스무 살도 안 된 앳된 얼굴입니다. 어린 나이에 대한 선입견 때문인지 대국 내내 제 눈에 커제 9단은 산만해 보였습니다. 입술을 깨물고, 몸을 비틀고, 갑자기 대국장을 나가버리고….

인간계 최후의 대표 선수인데, 왠지 무게감이 아쉬웠습니다. 하지만 현장에 동석해서 한국 기자들에게 대국 한 장면도 놓치지 않고 설명해준 김성룡 9단의 평가는 전혀 달랐습니다. "커제는 겉만 보고 얕볼 수 없는 진짜 천재"라며 "20살 청년에겐 상상할 수 없는 집중력과 멘탈을 가졌습니다"라고 평했습니다. 바둑 고수들끼리는 충분히 느낄 수 있는 비범함을 커제 9단은 평범인인 나에게 감춘 채(?) 대국 내내 발산했던 모양입니다.

승부는 알파고로 기울었습니다. 예상과 크게 빗나가지 않은 결과였습니다. 인간은 알파고가 사람인 양 실수를 기대했지만, 매 착점마다 51% 이상의 승률을 이어가는 알파고를 인간이 이기긴 어려웠습니다. 이세돌 9단과의 지난해 대국 때 커제 9단의 얄미웠던 언행을 기억하는 한국 기자들의 마음엔 어쩌면 알파고에게 더 쏠려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어쨌든 68승 1패…. 알파고는 인간을 상대로 무지막지한 성적을 남기고 은퇴했습니다. 유일한 패배는 이세돌 9단에게 당한 것이니, 역설적으로 알파고는 이세돌 9단에겐 진정한 인간계 최고수의 영광을 남겨준 셈입니다.
알파고와 대국 중인 이세돌 9단
알파고는 얼마나 진화한 걸까요? 김성룡 9단은 이번 알파고는 이세돌 9단 때와 완전히 달라진 알파고라고 단언했습니다. 알파고는 이세돌 9단과의 대국 이후에도 온라인 바둑 고수들과의 60번 대국에서 전승을 한 기록이 있습니다, 그중 커제는 3번이나 무릎을 꿇었는데, 난데없이 나타난 무명의 고수에게 세 번 내리 진 커제가 충격으로 몸살을 앓았다는 얘기도 들려줬습니다.

하지만 김 9단의 평가는 생각보다 냉정했습니다. 이렇게 진화를 거듭한 알파고라도 해도 인간이 도저히 상상할 수 없는 수를 두는 정도까진 아니라고 했습니다. 온라인상에서 이름을 감춘 채 60번 대국을 이어갈 때 그런 정도의 실력(물론 이 실력도 최강이지만), 뭔가 그 이상을 기대한 듯한 김성룡 9단의 얼굴에선 아쉬움과 다행스러움을 동시에 느낄 수 있었습니다.

알파고의 바둑은 입신(입신)의 경지를 꿰뚫고 지나가진 못했더라도, 1년 사이 알파고를 바라보는 인간의 시선은 완전히 달라져 있었습니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인간의 정석 바둑과 다른 수를 놓으면 "알파고가 실수를 했구나"라고 평가했던 인간은 이젠 인간의 정석과 다른 알파고의 수를 "과연 어떤 묘수일까?"라며 풀이하기에 바빴습니다. 그동안의 알파고의 무지막지한 성적표에 따른 당연한 결과겠지만, 인간 바둑에선 그동안 금기시됐던 수마저 인간이 다시 한번 분석하게 했고, 심지어 따라 두는 상황으로 변했습니다.

적어도 지금의 알파고는 실수를 기대할 수 없는, 바둑에서만큼은 새로운 교과서가 돼버린 모습이었습니다. "싸움 바둑 디테일에 약하다고 평가받던 예전 알파고가 이젠 디테일과 실리를 모두 완벽하게 챙기는, 바둑의 밸런스를 완벽하게 되찾은 모습입니다. 훨씬 안정감이 있고 여유로운 승부를 즐길 줄 아는 것 같습니다." 알파고의 바둑 실력을 이렇게 평가한 김성룡 9단에게 알파고는 이미 인간과  다를 바 없어 보였습니다.

한 가지 더. 알파고는 빨라졌습니다. 커제 9단과 세 번 맞붙은 대국에서도, 중국 바둑 고수들과의 대국에서도 알파고는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에 아랑곳하지 않고 불과 1분을 넘기지 않고 착점했습니다. 그만큼 연산 속도가 빨라졌다는 얘깁니다. 이세돌 9단과의 대국에선 1900여 개의 중앙처리장치(CPU)로 구동하던 알파고가 이번엔 200개의 CPU로 줄어들었는데도 말입니다. 하드웨어에서도 엄청난 진화가 이뤄졌다는 얘깁니다. "인공지능에게 1년은 인간에게 1세기"라는 대국장 주변 여기저기서 인간의 탄식 소리가 들렸습니다.
알파고와 커제 9단
커제 9단과 알파고의 대국은 결과가 어느 정도 예상돼서 그런지, 인간과 알파고가 한 조를 이뤄서 승부를 겨루는 페어경기와 인간 고수 5명을 한꺼번에 상대하는 상담기에 관심이 갔습니다. 김성룡 9단은  "상담기야 말로 인간이 유일하게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대국"이라고 설명했습니다.

사실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가듯이 바둑도 단순히 여러 사람이 옆에서 훈수를 둔다고 해서 승률이 높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런 이유로 상담기가 인간에게 유리하다는 의미는 여러 사람이 단순히 의논해서 훈수 바둑을 둔다는 게 아니라, 바둑 대국판 옆에 또 다른 연습 대국판을 놓고 제한 시간 내에 여러 가능성을 실제로 연습해가며, 다음 수를 착점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물론 제한 시간이 있어서 여러 가능성을 많이 타진해볼 순 없지만, 그래도 혼자 머릿속으로 그리는 바둑보단 여러 고수들이 연습 바둑판을 따로 두고 여러 경우의 수를 짚어보고, 이게 아니다 싶으면 다른 수로 연습해보고 하는 게 인간이 갖고 있는 한계를 보완할 수 있는 수단이란 겁니다.

하지만 이런 상담기 결과는 이런 희망이 그저 희망에 불과하다는 걸 보여줬습니다. 중국 바둑 고수들은 상담기의 이런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했고, 알파고에게 완패하고 말았습니다. "이게 실실 웃으면서 둘 수 있는 바둑입니까? 인간 고수들에게 절박함이 없네요." 시종일관 여유 있는 임전 태도를 보인 중국 바둑 고수들에게 쓴소리를 날린 김성룡 9단은 상담기 결과가 기대 만큼이나 실망도 컸나 봅니다.
알파고와 페어 경기
페어경기는 또 다른 의미에서 관심을 둘 만한 경기였습니다. 사실 알파고와 구리 9단이 한 팀, 알파고와 롄샤오 8단이 한 팀이니까 어느 팀이 이겨도 인간이 이긴 거고, 알파고가 이긴 겁니다. 그런 면에서 보면 반대편 알파고는 진 거니까 알파고 최종 전적은 68승 1패가 아니라 69승 2패가 되야 하나요? 페어경기에서 관심 포인트는 인간과 알파고가 서로를 팀메이트로 배려할 수 있을까 였습니다.

바둑의 착점 순서는 인간과 알파고가 번갈아 두게 되는데, 마치 탁구 단체경기처럼 한 명 씩 주고받은 구조라고 이해할 수 있을 겁니다. 알파고가 인간을 상대로 공격을 하면 그걸 상대편 인간이 받아내는 과정에서 같은 편 알파고는 팀메이트인 인간의 의도를 이해하고 그에 맞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문제였습니다. 하지만 아직까지 인공지능은 거기까지는 이르지 못한 듯 싶었습니다.

알파고는 팀메이트가 있던 없던, 시종일관 승률 51% 이상의 착점을 찾아다니는 듯 보였다는 게 전문가들의 관전평이었으니까요. 그런데 페어경기 승부에선 재미있는 결과를 내놨습니다. 경기 초반을 지배하던 알파고A+구리 9단이 경기 중반 이후 역전을 허용하며 알파고B+롄샤오 8단에게 역전패를 당했습니다. 이런 결과를 놓고 인공지능과의 공존에서 이기고 지는 걸 결정하는 것도 결국 인간의 몫이라는 해석이 나왔습니다.

신선들이 노닐 듯한 우전에서 신선놀음의 승패 결과는 애초부터 관심사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알파고로 대변되는 인공지능과 인간이 함께 공존해 나갈 미래의 모습에 더 큰 관심이 쏠렸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알파고는 인간에게 큰 과제와 경각심을 남겼습니다. 내가 곧 갈 테니, 어떻게 대비할 거냐는 경고 말입니다.

어쩌면 이런 기회를 인간 스스로가 미리 만들어낼 수 있었던 점이 큰 다행인지 모릅니다. 알파고 개발사인 구글 딥마인드도 이런 점을 함께 고민해보자는 의도라는 점을 분명히 했습니다. 인간과 인공지능과 어차피 공존이 불가피한 미래가 유토피아가 될지, 디스토피아가 될지…. 결국 그마저도 인간이 만들어가야 할 일이고, 만들어갈 수 있단 자심감도 되새기며 우전의 청량한 야경 속에서 백주를 한잔 들이켜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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