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올레 2코스는 이 곳 광치기 해변에서 시작된다. 눈을 부릅뜨고 다시는 길을 잃고 헤매지 않겠노라 다짐에 다짐을 한다. 하지만 문득, 또 어떻게 생각해 보면 길 위에서 길을 잃고 헤맨다는 것이 꼭 실패만은 아니라는 생각도 든다. 어딘가를 헤맨다는 것은, 그 어딘가를 가봤다는 의미도 있는 것이고, 원래 과정이란 시행착오의 연속이 아니던가.
가고자 한다면, 길은 시간의 문제일 뿐 언젠가는 열릴 것이라는 긍정의 마인드로 무장을 해 본다.
광치기 해변을 벗어난 길은 서귀포시 고성 마을로 여행자를 이끈다. 고성 시내를 지나는 길이다.
대수산봉이라는 이름의 유래는 원래 ‘물뫼(물미)’라 했던 것이 동쪽에 이웃한 ‘족은물뫼(小水山峰)’와 구별하여 ‘큰물뫼(큰물미)’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니 한자로는 대수산봉(大水山峰)이 맞다. 다만 대수산이면 대수산이고, 대수봉이면 대수봉이지, 산(山)과 봉(峰)을 동시에 사용하는 지명이 조금은 낯설다.
길은 나무숲 사이로 이어져 있다. 숲에는 삼나무, 해송들이 저마다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라, 그 봉우리의 크기에 비해 꽤나 짙은 색깔을 드러낸다. 여성들의 경우 둘 이상 짝을 지어 오르는 게 필요할 듯싶다. 성차별(^^)이 아니라, ‘만사불여튼튼‘이라지 않는가.
정상에 놓인 순백의 의자 하나, 20여 분 남짓한 산행이었지만 그 수고로움을 위로라도 하는 듯 너른 품으로 도보 여행자를 맞는다.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돌리면 섭지코지가 있다. 섭지코지는 긴 팔을 뻗어 한 아름의 바다를 안고 있다. 품 안에 든 바다가 더없이 편안해 보인다.
대수산봉은 탁 트인 전망 덕분에 제주의 숨겨진 일출 명소라는데, 언제 볼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지리산 천왕봉 일출을 보는 것이 그렇듯, 아마도 삼대(三代)가 덕을 쌓아야 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겨울의 꽁꽁 언 땅 속에서 보낸 보리들은 그 인고의 시간을 대변하듯 자신만의 푸르름을 떨치고, 또 휘몰아친다. 푸르름이 차고 넘치고, 또 싱그럽다.
하지만 이때 보리를 꼭꼭 밟아주어야 한다. 보리밟기가 필요한 것이다. 날이 풀리면 얼었던 흙이 들뜨게 되고, 그러면 보리 싹이 뿌리를 제대로 내리지 못할 뿐만 아니라 수분공급이 원활하지 못해 말라죽기 때문이다.
그 시절 어린 마음에 이제 막 싹이 나오기 시작하는 놈을 매정하게 밟으면 짓뭉개진 보리들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을까 싶어, 제대로 밟지도 못하고 걱정을 했던 것이 벌써 아득한 옛일이 되고 말았다.
길 위에는 과문한 탓에 이름을 알지 못하는 들꽃들이 도보 여행자에게 아는 체를 한다. 봄의 생동하는 기운은 꽃들의 휘황한 아름다움에서 시작되고 있음을 새삼 깨닫게 된다.
물론 길의 법칙과 요구는 스스로의 필요와 인식의 크기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간혹 길을 떠날 때, 우리는 그곳에 얼마나 빨리 도달할 것인가에만 매몰되어 있을 때가 많다. 그런 이유로 과정은 불필요한 절차로 인식되고, 더러는 고문이 되기도 한다.
하지만 인생이 그렇듯, 여행 역시 과정의 예술이 아니던가. 과정을 인식하고 즐길 수 있어야만 여행도 인생도 즐거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인생이든 여행이든 탐색과 모험이 주는 기쁨을 발견하는 일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생각을 해 본다.
얼마간의 아스팔트길을 걷다가 짧지만 아늑한 길을 만났다. 가던 길을 돌려 그 길을 걷는데, 경운기를 몰고 가시던 팔순은 됨직한 할아버지가 말을 건다. 그런데 말투가 화가 난 느낌이다 . 내가 길을 잘못 들었나? 가면 안 되는 길이었나? 여러 생각을 하면서 할아버지 말에 귀를 기울였지만 도통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그야말로 외국어였다. 간간이 ‘~~합수꽈’ 류의 제주말을 듣기는 했지만, 그건 표준어 바탕 위에 쓰는 제주도 말이었고, 할아버지의 말은 순수 제주도 말이었다. 그런데 말투까지 센 발음에 표정도 무표정한지라 그냥 ‘예예’하면서 대꾸는 했지만 대략 난감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는 원래 제주도 말이 경상도 말보다도 훨씬 센 발음이라고 한다. 그래서 외지인들은 제주도 사람들하고 대화할 때 오해를 하는 경우가 많단다. 할아버지 역시 별 뜻 없이 밭일 가시다가 혼자 걷는 외지인에게 무언가 정보를 주고픈 마음에, 또는 관심에 말을 붙인 것이었는데...... 나의 무지가 관심과 배려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게 한 이유였다.
‘혼인지’는 제주 탐라국의 시조인 ‘고, 양, 부’ 삼신인(三神人)이 벽랑국에서 온 세 공주를 배필로 맞아 혼인을 올린 곳이라는 신화가 서려 있는 곳이다. 이후 세 공주가 가져온 송아지, 망아지를 기르고 오곡의 씨앗을 뿌리면서 제주도에 농경과 목축 생활이 시작되었다고 하니, 국제결혼의 덕을 톡톡히 본 셈이다.
세 쌍의 부부는 땅 속 바위동굴에서 잠시 동안 신접살림을 차렸다는데, 그 동굴은 아직도 보존되고 있다.
(다음 편으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