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인 할머니의 아침 식사 준비 탓이다. 식당 옆방을 차지하고 밤을 보낸지라, 고등어 굽는 냄새까지 단잠을 깨우는 데 일조를 한다. 그렇게 주인 할머니의 부지런함이 더해진 푸짐한 아침상을 물리고, 식사 포함 2만 5천 원을 건네는 손길이 조금은 미안하게 느껴진다.
● 성산 일출봉을 오르다
수많은 계단이 조금은 버겁기는 해도,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것이 없는 것이 산이고 봉우리인지라 아침 댓바람부터 땀 좀 흘렸더니, 어느새 정상이다.
부산에서 오셨다는 노년의 부부께서는 내가 찍어 준 사진에 고맙다며 함박웃음을 터뜨리신다. 나 역시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다. 누군가에게 의미 있는 추억의 순간을 선물해 드렸으니, 그 분들도 한 번쯤은 나를 기억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해발 180m인 성산 일출봉은 약 5,000년 전 제주도 수많은 분화구 중에서는 드물게 바다 속에서 수중 폭발한 화산체라고 한다. 오래전에는 화산섬이었지만 신양해수욕장 쪽 땅과 섬 사이에 모래와 자갈이 쌓임으로써 육지와 연결되어 현재처럼 곶이 되었다고 한다. 2000년 7월 19일 천연기념물이자 천연보호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고은 시인의 '내려 갈 때 보았네. / 올라갈 때 못 본 그 꽃'처럼, 같은 길을 걸어도 눈은 제 편한 대로 세상을 볼 뿐이다. 나 역시 올라갈 때 못 본 동쪽 끝 제주의 모습을 내려갈 때 봤던 것이다.
● 다시 4.3 사건을 생각하다
얼마 가지 않아 제주 4.3 성산읍 희생자 위령비가 보인다.
위령비에는 시 한 수가 새겨져 있다.
섬의 우수
강중훈
여기 가을 햇살이
예순 두해 전 일들을 기억하는 그 햇살이
그때 핏덩이 던 할아비의 주름진 앞이마와
죽은 자의 등에 업혀 목숨건진
수수깡 같은 노파의 잔등위로 무진장 쏟아지네
(중략)
숨비기나무 줄기 끝에
철지난 꽃잎 몇 조각
핏빛 태양 속으로 목숨 걸듯 숨어드는데
섬의 우수 들불처럼 번지는데
성산포 4.3 희생자위령제단 위로
뉘 집 혼백인양 바다갈매기 하얗게 사라지네.
길은 광치기 해변으로 나아간다.
광치기 해변은 밀물과 썰물의 차이에 따라 완전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데, 광치기 해변의 매력은 바로 썰물 때 드러나는 넓은 암반지대와 성산일출봉이 함께 어우러진 멋진 풍경이라고 할 수 있다.
이 암반지대를 '돌빌레'라고 하는데, 땅에 묻힌 넓적한 바위를 말한다고 한다.
그런데 그들보다 더 여유로운 이가 있었으니, 말이다. 낯선 방문자를 향해 입으로 두어 번 푸드득 대더니 이내 얌전하게 앉은 채로 지나는 이를 스캔한다. 그러더니 시덥지 않다는 표정을 짓고는 바로 휴식 모드로…. 귀찮게 하지 말고 빨리 지나가라는 뜻이리라.(^^)
얼마를 더 갔을까. 운 좋게도 물질을 나가는 해녀들을 만날 수 있었다.
공동 작업장에서 필요한 어구를 챙기고 물옷으로 갈아입은 해녀들이 줄지어 바다로 향하고 있었다. 테왁과 망사리를 걸머진 채로 작업장으로 걸어가는 해녀들의 행렬이 사뭇 장엄하다.
그리고 테왁에 달린 그물주머니를 '망사리'라고 하는데, 망사리는 채취한 해산물을 보관하는 도구로 테왁과 함께 사용한단다.
몸이라는 가장 순수한 도구를 활용한 신성한 노동의 현장이기도 하다. 삶이라는 지엄한 현실에 순응하며, 또 대응하기 위해 그네들은 바다와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살아왔고, 또 살고 있는 것이다.
물숨이란 해녀들이 일컫는 물속에서의 호흡이면서, 해녀들이 물속에서 '좋은 물건'을 발견했을 때 내는 마음의 숨이란다. 좋은 물건을 남보다 더 빨리, 더 많이 가지려 자신이 지닌, 또 어쩌면 타고난 '숨의 길이'를 넘어 서고자 할 때 찾아오는 마지막 숨이 물숨이고, 해녀들의 표현대로 '물숨'을 먹으면 그것은 곧 죽음을 의미한다.
결국, 물숨이란 잘라내지 못한 욕망의 상징이면서, 불행의 씨앗이었던 것이다. 그래서 오래된 해녀들은 딸에게 맨 먼저 물숨부터 피하는 방법을 가르쳐준다고 한다. 그 방법은 욕심이 가져올 파국을 경계하는 것이며, 능력만큼만 욕심내야 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치를 체득하는 일일 것이다.
그렇게 물질은 다른 해녀의 물질을 보고, 다른 해녀의 경험을 듣고, 또한 자신의 경험을 통해 배우면서 계승되고 있는 것이다. 어머니에게서 딸로, 시어머니에게서 며느리로, 나아가 제주 해녀 공동체라는 큰 틀에서도 끊임없이 세대 간에 전승되고 있는 중이다.
제주도청 자료를 보면, 제주 해녀 수는 1970년 1만 4,143명에서 2015년에는 4,377명으로 줄었고, 특히 지난해 말에는 4,005명으로 크게 줄었다고 한다. 그만큼 고령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지표라 할 것이다.
여행자에겐 아직은 차가운 바다가 온몸이 오그라드는 듯 두려움의 대상이지만, 그네들에겐 삶의 익숙한 일상이며, 거친 바다의 몸부림에도, 하얗게 부서지며 달려드는 파도마저도 극복해야 할 대상이면서 또 운명일 것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바닷속으로 걸음을 옮기며 나아가는 '삶의 전사'들의 의연한 '포스'가 바다를 압도한다.
● 섭지코지에 이르다.
눈을 들면, 저 멀리 반도처럼, 또 곶인 양, 섭지코지가 아스라이 보인다. 가야 할 곳이다.
그런데, 헐~ 이정표가 없다. 앞서도 이야기했지만, 지금까지 걸었던 길이 제주 올레 2코스인 줄만 알았던 내게 부리나케 찾아본 올레 안내 책자는 이 길이 2코스가 아니란다. 바다를 에둘러 가는 곧은 길이라, 한 치의 의심도 없이 2코스인 줄 알았는데, 아니었던 것이다.
수중 생태공원인 아쿠아 플라넷 앞에서 길을 잃은 채로 미아가 되고 말았다.
드라마 <올인>의 촬영지가 되면서 유명해진 탓이 아닐까 싶다. 그 흔적은 아직도 '올인 하우스'라는 이름으로 섭지코지의 명물 역할을 톡톡히 하고 있다.
섭지코지에는 어느 해안과는 달리 붉은 화산재 송이로 덮여 있고, 해안가에는 수많은 기암괴석들이 즐비하다. 특히 '선돌바위'는 용왕의 아들과 선녀 간의 못다 한 사랑의 전설이 깃들어 있다는 설명이다.
제주올레 2코스인 줄만 알고 걸었던 길이 2코가 아니었다니…. 광치기 해변에서 길을 틀어 마을 길로 향해야 했었는데…. 그곳에서 깜박 길을 놓친 것이다.
택시를 탔다. 택시는 광치기 해변으로 간다. 어쩔 수 없이 계획했던 올레 2코스를 걸으러 그 시작점으로 가는 것이다.
<고성~신양 구간 산책로 가는 길>
- 광치기해변 버스 : 701번, 710번, 910번 -> 광치기 하차
- 섭지코지, 아쿠아플라넷, 신양해수욕장에서 나가는 버스는 '신양리' 정류장에서는 910번, '신양리 입구' 정류장에서는 701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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