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

SBS 뉴스 상단 메뉴

[라이프] 제주도의 삶과 문화를 배우다 - 제주올레길 21코스 ②

[라이프] 제주도의 삶과 문화를 배우다 - 제주올레길 21코스 ②
길은 바다를 에둘러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올레길이며 둘레길은 바다와 마을과 들과 오름으로 이어진 길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저 멀리 빨간 등대가 바다 가운데에서 육지의 품 안으로 귀환하는 배들을 안내한다.
갈림길에 서면 올레의 나무 화살표는 행인에게 가야 할 곳을 알려준다.
갈림길에 서면 올레의 나무 화살표는 행인에게 가야 할 곳을 알려준다. 파란색 화살표는 정방향, 주황색 화살표는 역방향을 의미한다. 그리고 올레 리본들은 길을 걷는 이에게 제대로 걷고 있다고, 또 자신을 따라오라고 분주히 흔들리며 자신을 드러내느라 여념이 없다. 
길을 걸을 때는 리본이 법이다.
어디서건 길을 걷는 도보 여행자에게 리본은 유일한 길 안내자이다. 길을 걷다가 리본이 보이지 않으면 리본을 찾아 돌아서는 게 기본이다. 운전할 때는 네비게이션이, 길을 걸을 때는 리본이다.
길에서 동행을 얻는 것은 걷는 자의 몫이다.
밭을 벗어난 보라색 유채꽃이 길을 밝히고 있다. 고마운 일이다. 길 위에서는 누군가 동행이 있어야 한다. 그렇다고 동행이 반드시 사람일 필요는 없다. 나무 하나, 풀 한 포기, 저 널다란 바다조차도 훌륭한 동행이다. 동행은 누군가가 곁에 있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누군가와 함께 하고 있음을 인식하고 깨닫는 것이다.
문주란 섬이 보인다.
하도 방면으로 길을 접어들자, 아득하게 보이던 문주란 섬이 지척이다.

즐거운 표정의 해녀상 뒤로 문주란 섬이 늦은 오후의 지친 몸을 쉬게 할 양으로 길게 드러누워 있다. 문주란 섬은 일명 토끼섬으로 불리기도 하는데, 여름에 하얀 문주란 꽃이 섬을 뒤덮어 하얀 토끼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란다.
해녀상 뒤로 문주란 섬이 길게 드러누워 있다.
문주란 섬은 천연기념물이다. 그래서 썰물 때 드러나는 검은 돌다리 길로 일부 탐방객에게만 방문이 허용된다고 한다.
문주란 섬 초입에 ‘멜튼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그 문주란 섬 초입에 '멜튼개'라는 표지판이 보인다. 멜튼개라…. 도무지 짐작조차 안 되는 지명이다. 처음에는 영어의 멜트(melt)와 관련이 있으리라 짐작을 했다. 녹인다는 뜻처럼 용암과 관련한 그 무엇이 아닐까 하는…. 하지만 얼토당토않은 상상이었음을 표지판이 일깨워준다.
멜(멸치)이 잘 뜨는(잡히는) 갯담이라서 멜튼개다.
사면이 바다인 제주에 가장 원시적이면서도 최근까지 남아 있는 어로 수단이 바로 '원'이라 불리는 돌 그물이다. 그 돌 그물은 갯가의 생김새가 살짝 만(灣)을 이루는 '개'에 돌담을 쌓아 밀물 때 몰려드는 고기떼를 가두어 잡는데, 그렇게 돌로 쌓은 어로용 돌담을 ‘원담‘이나 ’갯담‘이라고 한단다.

'멜튼개'는 문주란섬의 초입인 하도리 궁동에 위치한 갯담(또는 원담)으로, 멜(멸치)이 잘 뜨는(잡히는) 갯담이라서 멜튼개라는 설명이다. 또 하나, 멜튼개는 유적지이면서, 현재까지도 생산 활동을 하는 어업시설이란다.
길은 하도해수욕장으로 접어든다.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걷는 길이다.
길은 하도해수욕장으로 접어든다. 해수욕장의 백사장을 걷는 길이다. 저 멀리 지미봉이 보인다. 지미봉은 올레길의 대미를 장식하는 오름이다. 올레길은 시흥에서 1코스를 시작해, 21코스의 마지막 지점인 지미봉을 지나 종달바당에서 막을 내린다. 21코스 다음이 1코스이고, 길은 그렇게 연결되어 있다. 끝이 시작인 것이다.
저 멀리 지미봉이 보인다.
하지만 나는 아쉽게도 지미봉을 오르진 못했다. 지미봉에 다다랐을 때에는 거뭇거뭇 어둠이 내리기 시작하던 때라, 대신 해안도로를 따라 종달바당으로 가는 길을 택해야 했다.

백사장에는 파도에 떠밀려온 우뭇가사리를 비롯한 해초류들이 한 가득이다.
줄지어 늘어서 있는 카누들 너머로 우도가 보인다.
하도해수욕장을 벗어나자, 카누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다. 저 앞에 보이는 우도까지 저어 갈 수 있다고 하니, 다음에 기회가 되면 카누를 타고 우도로 가 볼 일이다. 그리고 하도는 철새도래지로도 유명한데, 저어새, 도요새, 청둥오리 등 수만 마리가 날아와 겨울을 난다고 한다.
길이 편안해지면 눈은 더 멀리 볼 수 있다.
바닷가를 에둘러 나무 데크로 된 길을 걷는다. 길이 부드러워지고, 걷는 이도 편안해진다. 길이 편안해지면 눈은 더 멀리 볼 수 있다. 바다 건너 손에 닿을 듯 우도가 보인다.
바다 위에는 점점이 불빛을 밝힌 고기잡이배들이 수평선을 지키고 있다.
바다 위에는 점점이 불빛을 밝힌 고기잡이배들이 수평선을 지키고 있다. 발걸음을 서둘러야 할 것만 같다. 어둠이 길을 다 삼켜버리기 전에 종달바당으로 가야 한다.
나무 데크로 이어진 길이 성산봉을 향하고 있다.
또 다시 나무 데크로 이어진 길이 성산봉을 향하고 있다. 이 길을 계속 걸어가면 성산봉이 나타난다. 길은 항상 길의 끝에서 다시 시작하는 법이기 때문이다. 제주 올레의 마지막 코스인 21코스 역시 1코스와 만나, 다시 길은 이어진다. 성산봉은 1코스 위에서 도보 여행자들을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성산봉이 손에 닿을 듯 가까워진다.
걸을수록 성산봉은 자꾸만 내게로 다가온다. 내일이면 성산봉은 몇 년 만에 나와 해후할 것이다.
 언덕 위에 작은 배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다.
작은 언덕 위에 배 하나가 불을 밝히고 있다. 이 배가 바다가 아닌 언덕 위로 올라온 이유를 알지는 못하지만, 멀리서 보면 또 하나의 등대처럼 보인다. 배가 배를 인도하는 것인지, 아니면 배가 행인을 인도하는 것인지는 불분명하지만, 배는 누군가에게 분명 손짓하고 있었다.
다양한 색상의 빛들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배는 자신에게 오는 길도 내준 터라, 올라가 보지 않을 도리가 없다. 올망졸망한 유리 시험관 안에 빛을 넣은 듯 다양한 색상의 빛들이 어둠 속으로 퍼져나가고 있었다. 굳이 어둠을 자극하지 않으면서도 빛은 빛대로 제 역할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꽃들이 언덕 위의 배를 헹가래 치고 있다.
바쁜 마음에 길을 다시 재촉하다, 무심코 돌아본 언덕 위에는 꽃들이 헹가래 치는 가운데 배가 저 혼자 빛 속에서 정박하고 있었다.
잠시나마 꽃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것이 인생길이기라도 하는 양 위안이 된다.
길은 다시 꽃길로 이어진다. 길게 뻗은 꽃길은 아닐지라도 잠시나마 꽃길을 걷는다는 것은 그것이 나의 인생길이기라도 하는 양 위안이 된다. 굳이 꽃길을 가려 걷고자 하지 않고, 그것이 가능하지도 않다는 것을 알지만, 그래도 인생에서 한 번쯤은 꽃길을 걸어도 괜찮지 않겠는가. 그 로망의 일단을 경험한 날이다. 그것도 어스름 달밤에…. 
 길에는 너도, 나도, 그리고 우리가 있다.
꽃길은 나만 걷고 있었던 아니었다. 어느 연인들도 꽃길을 걸어 바다로 나간 뒤였던 것이다.

해초가 뒤덮인 해변 너머로 성산봉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해초가 뒤덮인 해변 너머로 성산봉이 어둠 속으로 스며들고 있다.
드디어 종달포구에 다다랐다. '종달'이라는 이름에 걸맞은 여정이 아닐 수 없다. 21코스가 끝나는 지점인 종달리의 '종달(終達)'은 맨 끝에 있는 땅이자, 제주목의 동쪽 끝 마을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제주목사가 부임해 제주도 순시를 마치는 마지막 고을이어서 종달이라고도 한다는데, 어느 것이든 끝이라는 경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마음이 담겨있는 마을 이름이 아닐까 싶다. 

그 제주의 땅끝인 종달에서 오늘의 여정을 마무리한다.
종달 포구에서 여정을 마무리한다.
종달 포구에 서서 먹빛으로 변해가는 바다를 바라보며, 알랭 드 보통의 <여행의 기술>에서 읽은 구절을 떠올린다.

"행복을 찾는 일이 우리 삶을 지배한다면, 여행은 그 일의 역동성을 그 열의에서부터 역설에 이르기까지 그 어떤 활동보다 풍부하게 드러내 준다. 여행은 비록 모호한 방식이기는 하지만,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준다."
여유 있는 삶이란 조그만 틈에서 꽃을 발견하려는 노력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일과 생존 투쟁의 제약을 받지 않는 삶이란, 생존 투쟁에서 한 발짝쯤 벗어나 있는 '여유로운' 시간을 의미할 것이다. 그리고 그 여유로운 시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는 이유'이기도 할 것이다.

행복이라는 거창한 주제가 아니래도, 잠시라도 일상에서 벗어나 길 위에서의 만나는 사람들과 풍경, 그리고 평소와는 조금 다른 '나'와 대면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여유와 동행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여유로운 시간은 세상을 살아가는 모든 사람에게 반드시 필요한 ‘사는 이유’이다.
나는 그 일을, 오늘 또 한 것이다.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다.

그렇게 제주의 길 위에서 제주의 사람들을 만나고, 제주의 풍경에 취한 채로, 제주의 삶과 문화을 보고 듣고 배움으로써 나의 삶은 조금씩 더 여유로워지고 있음을 깨닫게 된다.
바다와 바다의 경계 사이에도 돌담이 있었다.
내일은 내일의 여정이 있다. 아마도 긴 여정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이제는 등대의 아득한 불빛이 누군가를 부르는 손짓이 되는 이곳에서 나 역시 지친 몸을 뉘어야 할 것이다. 



* 제주올레 21코스 가는 길 *

- 대중교통(버스)

•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701번(시외), 910번(순환) 약 1시간 20분 소요 → 해녀박물관입구 정류장 하차북쪽방향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약 300m 도보이동

• 서귀포시에서 701번(시외) 약 2시간 소요 → 해녀박물관입구 정류장 하차

- 택시

• 성산호출개인택시 064-784-3030
• 성산 콜택시  064-784-8585
• 구좌 콜택시 064-782-2106

** 제주의 택시는 콜을 했을 경우, 보통 협상요금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목적지의 콜택시를 부르는 게 유리. 일례로, 공항에서 콜택시를 불러 제주해녀박물관을 가면, 미터요금은 3만원 남짓, 목적지 콜을 부르면 2.2만~2.5만 원이면 갈 수 있음. 
   
Copyright Ⓒ SBS. All rights reserved. 무단 전재, 재배포 및 AI학습 이용 금지

스브스프리미엄

스브스프리미엄이란?

    많이 본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