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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프] 제주도의 삶과 문화를 배우다 - 제주올레길 21코스 ①

[라이프] 제주도의 삶과 문화를 배우다 - 제주올레길 21코스 ①
Quo vadis (쿠오 바디스 - 어디로 가시나이까?)

가야 할 길도, 걷고 싶은 길도 너무나 많은지라, 가끔은 지도를 펴들고 스스로에게 묻는다. 어디를 걸을 것인가?

우유부단, 결정 장애를 앓는 내게 마눌님께서 한 마디 하신다.

"제주 올레길 걸으면 되겠네~"

수도권을 벗어나서 걷는 것도 좋을 거라며, 그러면 답사기도 더 풍성해지지 않겠냐는 조언까지 덤으로 준다. 가라면 가야지…무슨 더 군말이 필요할 것인가.
따라비오름 정상 부근. 산으로 가는 길의 끝은 가없는 억새들의 군무가 펼쳐지는 축제의 현장이었다.
제주도에 내리자마자 달려간 곳은, 425km에 이르는 제주 올레길 중 21코스가 시작되는 제주해녀박물관. 흐린 날씨 탓에 박물관은 잿빛 하늘 아래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제주 해녀박물관의 해녀상. 21코스는 이곳에서 시작된다.
급하게 일정을 잡느라 남아있는 비행기 좌석은 오후에 도착하는 것뿐. 짧은 일정인지라 한정된 시간 안에 걸을 수 있는 길을 택해야 했고, 찾아낸 길이 제주 올레길 21코스이다.

제주 올레 21코스는 제주 올레길 여정의 마지막 길로, 제주시 구좌읍 해녀박물관에서 종달바당까지 약 12km 남짓한 길이다. 
제주올레 21코스 지도
길은 해녀 박물관 옆, 해신당(*해녀들의 물질작업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하는 의례장소)이 있는 연대동산을 넘어 시작한다.

얼마 가지 않아 만난, 어느 게스트하우스의 돌담 위에서 인사를 건네는 수줍은 속삭임들. 마음에 품었으나 시원스레 토해내지 못했던 고마운 말들이 벽돌 안에 담긴 채로 여행자에게 말을 건넨다.

'사랑해', '행복해'
마음에 품었으나 시원스레 토해내지 못했던 고마운 말들이 벽돌 안에 담겨 있다.
머금었던 미소가 엷어질 즈음, 길은 마을을 지나고, 이내 밭둑길로 들어선다. '낯물밭길'이다. 낯물의 밭길이란 의미다. 낯물이란 면수동(面水洞)의 옛 이름으로, '낯(面=얼굴)물(水)'이니 면수동이 맞다. 밭에는 주로 당근과 무를 심는다고 한다.
낯물밭길이 돌담 사이로 이어져 있다.
유채꽃이 밭을 에둘러 피어있고, 밭의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길게 늘어서 있다.

사실 제주도를 조금만 걷거나 둘러본다면 제주도는 돌의 섬이라는 사실을 금방 깨닫게 된다. 그것이 어디든 경계를 이루는 것은 거의 돌담이기 때문이다. 종류도 많다.

밭의 경계를 이루는 돌담이 길게 늘어서 있다.
낯물밭길처럼 밭과 밭 사이를 경계 짓는 돌담은 '밭담'이라고 한다. 집을 둘러싼 외벽 역할은 하는 담은 '축담', 초가집으로 가는 골목길에 쌓은 담은 '올렛담', 밀물에 들어온 물고기를 가두기 위한 '원담', 해녀들의 탈의실이었던 '불턱', 가축을 방목하기 위한 '잣담', 무덤을 지키기 위한 '산담', 해안의 환해장성이나 진성에 쌓았던 '성담', 울타리용으로 쌓은 '울담' 등이 있으니, 제주도에서의 돌담은 그야말로 경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제주도에서의 돌담은 그야말로 경계,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어찌 보면 엉성하게 쌓아 쉬이 무너질 것 같은데 삼다도(三多島)의 그 거센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텨내는 강인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그런데 그 강인함의 비밀에는 엉성함이 있다고 한다.
밭을 벗어난 유채꽃이 길을 밝히고 있다.
바람에 돌담이 무너지지 않는 이유는 바로 돌을 얼기설기 쌓아놓았기 때문이란다. 벽돌과 달리 생긴 대로 돌을 쌓으니 돌들 사이로 빈틈이 많아지고, 이 비어 있는 돌담 구멍이 바람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텅 빈 충만'이라더니, 비어 있어 도리어 강했던 것이다. 약하디 약한 갈대가 바람에 쉬이 꺾이지 않는 이유와도 흡사 닮아 있다. 그리고 모난 돌의 모양도 평평한 돌에 비해 바람 분산 효과가 크다고 한다. 
돌담 틈 사이로 유채꽃이 아는 체를 한다.
자! 그건 그렇다고 치자! 그렇다면 이 어마어마한 양의 돌들은 다 어디에서 왔단 말인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가졌던 의문 역시, 성당이나 기타 건축물을 지은 그 많은 대리석을 도대체 어디서, 또 어떻게 가져왔느냐는 것이었다. 그것도 운송수단도 변변찮은 중세 시대에…. 대리석 광산이 있는 이탈리아 북부 지역에서 로마가 있는 남부 지역까지 수백km에 이르는 그 이동로와 그 운반 주체들의 노동의 강도는 쉽사리 가늠조차 어려웠던 것이다.
제주도의 그 수많은 돌담에는 제주도만의 고달픈 경작의 역사가 숨어 있다.
제주도의 그 수많은 돌담에는 제주도에서 고단한 삶을 살아내야 했던 제주도만의 고달픈 경작의 역사가 숨어 있다.

제주도의 땅은 돌 반 흙 반이다. 그러니 농지를 개간하는 고통이 오죽 했을 것인가. 그 땅을 일구면서 나온 수많은 돌들이 바로 돌담의 원천이 되었다. 그 옛날, 어떤 이는 제주도에서 밭을 일구는 모습을 보며, "고기 창자를 긁어내듯이 밭을 일구더라."고 표현했다고 한다. 그렇게 그들은 창자를 긁어내듯이 돌을 치워가며 밭을 일구었던 것이다.
땅을 일구면서 나온 수많은 돌들이 바로 돌담의 원천이 되었다.
지금도 제주도의 밭 한 가운데에는 농지 개간의 흔적인 돌무더기들이 쌓여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그 돌무더기를 '머들'이라고 한다.
머들. 농지를 개간하면서 나온 돌들을 쌓아놓은 것이다.
제주도에서 삶을 살아낸 선인들의 애환이 녹아있는 돌담이지만, 오늘날 제주에서의 돌담은 그 자체로 뛰어난 관광 상품이고 예술이 되었다.

2009년 고성보 제주대 교수의 조사 결과를 보면, 제주도 돌담의 길이는 2만 2000여㎞에 이른다고 한다. 4km가 10리(里)인걸 감안하면, 제주도 돌담의 길이는 만리장성 5.5배의 길이로, 그 규모가 어마어마함을 알 수 있다. 그 자체로 위대한 문화유산인 것이다. 그런 이유로 제주밭담은 2014년 4월 유엔식량농업기구에 의해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지정되기에 이른다.
 제주도 돌담의 길이는 2만 2000여㎞에 이른다고 한다.
하지만 걱정스러운 것은 같은 연구팀이 "연간 훼손율이 11%에 이르고 있어 계속 진행될 경우 돌담이 사라질 것"(*한겨레 2015. 11. 1)이라고 지적한 점이다. 제주도의 도시화로 돌담은 허물어지고 있고, 또 허물어진 돌담은 농촌의 고령화로 다시 쌓을 수 없는 한계로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의 돌담의 길이가 2만여km에 이르니, 제주도를 걷는다는 것은 끊임없이 이어진 돌담길을 걷는 것이나 마찬가지라 할 수 있다. 
별방진 성담. 별방진은 조선시대 제주도 동부 지역의 최대 군사기지였다.
길은 돌로 쌓아올린 성(城)인 별방진(別防鎭)으로 이어진다. 별방진은 조선시대 제주도 동부 지역의 최대 군사기지였다고 한다. 당시 무인도였던 우도에 왜선 정박지가 있어, 왜구들의 약탈에 대비한 방어용 성이었다고 한다. 현재 남아있는 성의 둘레는 950m 정도이며, 성 안쪽에는 마을과 밭이 자리 잡고 있었다.

내가 찾은 그날의 별방진도 유채꽃을 안은 채로 굳건하게 마을과 그 마을의 사람들과 꽃들까지 바람으로부터 지켜주고 있었다. 
별방진과 유채꽃. 오른쪽에 길게 늘어서 있는 성담이 별방진이다.
다시 길은 밭담을 돌고 돌아 검은 돌과 검은 흙의 조화의 경계를 지나, 이윽고 바다로 이어진다.
길은 바다로 향하고 있다.
아쉬운 것은 날도 흐리고, 시간도 늦은 터라 제주도 바다의 그 맑음과 탁 트인 상쾌함이 회색빛 그물 속에 갇혀 있다는 점이었다. 아쉬웠지만, 그마저도 투정인지도 모른다.

그래도 길은 가야한다. 바다와 나란히 이어진 길 위에는 많은 염원들이 돌로 쌓여 있었다.
길 위에는 많은 염원들이 돌로 쌓여 있었다.
지난 겨울의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바다를 지키고 있는 갈대들은 바람이 아직도 부담스러운 걸까? 다가가 안기기보다는 슬쩍 몸을 비껴서며 영화 <매트릭스>의 네오(키아누 리브스) 못지않은 유연함으로 바람을 비껴낸다. 움직임을 흐르게 한다는 영화 촬영 기법인 '플로우모션' 그 자체인 것이다.
갈대는 바람과 맞서지 않는다. 스쳐 지나가게 내버려 둘 뿐이다.
짙어져 가는 갈색의 하늘을 닮은 잿빛 바다를 따라 가노라니, 얼마 가지 않아 '신동 코지 불턱'이 나온다.
 잿빛 바다를 따라 가노라니, 얼마 가지 않아 ‘신동 코지 불턱’이 나온다.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을 나가기 전 옷을 갈아입거나 준비하는 공간이면서, 물질 중 휴식을 취하기도 하는 공간을 말한다. 구조는 보통 돌을 쌓아 내부에 공간을 만들고, 가운데에는 장작불을 피워 몸을 녹이기도 했다고 한다. 요즘으로 치면 직원 휴게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신동코지붙턱. 요즘으로 치면 직원 휴게실 쯤 되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신동 코지 불턱를 지나면 머지않은 곳에 검은 구조물이 보인다. 각시당이다. '각시당'은 바람의 여신인 영등할망에게 제를 올리던 곳이다. 해녀들과 어부, 그리고 마을 주민들의 안녕과 풍요로운 해산물 채취를 기원하는 의례를 치르는 곳이라는 설명이다.
각시당. ‘제주엔 당도 오백, 절도 오백’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다양한 믿음을 갖고 있는 지역이다.
뭍에 성황당이 있는 것처럼 제주에는 마을 곳곳에 여러 신들을 모신 당이 있다. 사실 제주도에는 각시당, 할망당, 본향당 등 많은 종류의 당들이 있어, '제주엔 당도 오백, 절도 오백'이라는 있을 정도로 다양한 신에 대한 믿음이 강한 곳이라고 한다. 아직도 제주도에서는 장례를 치를 때조차도 좋은 날(기일)을 받아서 하는 풍습이 남아 있다고 하니 그 믿음의 정도를 가늠해 볼 수 있을 것이다.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 바다로 가는 길일까? 길은 바다에 빠져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길은 제주의 동쪽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은 제주의 동쪽 끝으로 달려가고 있었다. 그 동쪽 끝에는 성산봉이 자리 잡고 있다. 성산봉에 이르는 동쪽 바다의 끝은 용눈이오름, 다랑쉬오름으로 이어지는 제주의 동부 오름 군락을 지나야 만날 수 있다.
길은 바다를 에둘러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길은 바다를 에둘러 끝없이 이어지고 있었다. 제주도의 올레길이며 둘레길은 바다와 마을과 들과 오름으로 이어진 길의 파노라마를 경험하게 한다.

저 멀리 빨간 등대가 바다 가운데에서 육지의 품 안으로 귀환하는 배들을 안내한다.


* 제주올레 21코스 가는 길 *

- 대중교통(버스)

• 제주시외버스터미널에서 701번(시외), 910번(순환) 약 1시간 20분 소요 → 해녀박물관입구 정류장 하차, 북쪽방향 제주해녀박물관까지 약 300m 도보이동

• 서귀포시에서 701번(시외) 약 2시간 소요 → 해녀박물관입구 정류장 하차

- 택시

• 성산호출개인택시 064-784-3030
• 성산 콜택시  064-784-8585
• 구좌 콜택시 064-782-2106

** 제주의 택시는 콜을 했을 경우, 보통 협상요금으로 가는 경우가 많은데, 이때 목적지의 콜택시를 부르는 게 유리. 일례로, 공항에서 콜택시를 불러 제주해녀박물관을 가면, 미터요금은 3만 원 남짓, 목적지 콜을 부르면 2.2만~2.5만 원이면 갈 수 있음. 

(2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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