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다시 보는 1994년 북폭 위기…미국은 독자 북폭할 수 있나

안정식 북한전문기자 cs7922@sbs.co.kr

작성 2017.04.11 11:52 조회수
프린트기사본문프린트하기 글자 크기
기사 대표 이미지:[취재파일] 다시 보는 1994년 북폭 위기…미국은 독자 북폭할 수 있나
미국이 항공모함 칼빈슨 호를 다시 한반도 주변에 전개하는 등 예사롭지 않은 행보를 보이면서 미국이 북한을 폭격할 것이라는 '북폭설'이 확산되고 있다. 이전 대통령들과는 다른 트럼프 미 대통령의 성격상 우리 정부와 협의 없이 북한을 폭격할 수 있으리라는 추측이다.
 
여기서는 실제 미국이 북폭을 고려했던 1994년 상황을 다시 한번 되짚어보며 미국의 독자 북폭이 가능한 지를 살펴보려 한다.

 
● 1994년 북폭 위기 되돌아보면….
 
제1차 북핵위기의 정점이었던 1994년 6월 한반도는 점차 전쟁 위기로 빠져들고 있었다. 북미간에 어렵게 합의됐던 '수퍼 화요일'이라는 합의가 1994년 3월 남북 접촉에서의 북한의 '불바다' 발언으로 무산됐고, 북한은 미국이 레드라인(금지선)으로 설정한 영변 핵연료봉 교체를 강행함으로써 과거 핵활동 자료를 검증할 수 없게 만들었다. 이 당시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은 전쟁 위험을 무릅쓰고라도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막겠다는 결심을 하고 있었다고 이후 출간된 회고록 'My Life'에서 기술했다.
 
미국은 1994년 5월 18일 미군의 전 4성장군들을 펜타곤의 비밀회의실로 소집해 제2의 한국전쟁 가능성을 논의한데 이어, 6월 14일 장관급 회의에서 영변에 대한 폭격 방안을 논의했다. 1981년 이스라엘이 이라크의 원전 시설을 공중 폭격한 데서 이름을 따 온 '오시라크 옵션', 즉 북폭 방안은 세 가지 방향으로 고려되고 있었다.

첫째, 영변의 재처리 시설만 공격하는 방안, 둘째, 재처리 시설과 함께 5메가와트 원자로 등 영변의 다른 핵시설도 공격하는 방안, 셋째, 영변의 모든 핵시설과 북한의 주요 군사시설을 함께 파괴하는 방안. 북폭 방안은 아직 클린턴에게 정책 대안으로 제시될 정도의 수준은 아니었지만, 이날 회의에서 논의가 시작됨으로써 사태 진전에 따라 충분히 현실화될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방북이 이 시기 북한에게 퇴로를 열어줄 수 있는 마지막 방안으로 추진되고 있었지만, 그 가능성은 높아 보이지 않았다. 카터 전 대통령은 미국 정부를 대표하는 것이 아닌 개인 자격으로 6월 15일 판문점을 통해 북한 방문 길에 올랐다. 이 무렵 전쟁의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있는 서울에서는 급박한 움직임이 시작됐다.


● 주한 미 대사, '미국인 소개 계획' 언급
 
한국 시각으로 1994년 6월 16일 오전, 레이니 주한 미 대사는 정종욱 청와대 외교안보수석을 만나 미국의 민간인들을 철수시키겠다는 뜻을 밝혔다. 북핵 문제에 관해 외교적 노력이 소진되고 이제 제재 쪽으로 수순을 옮긴 만큼, 한국에 있는 '전투와 관계없는' 미국 민간인들을 철수시키는 것이 SOP(Standard Operating Procedure), 즉 통상적인 절차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사항을 발표하려고 한다는 것이었다.
 
정종욱 수석은 이 사실을 곧바로 김영삼 대통령에게 보고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경악했다. 미국 민간인의 철수는 미국이 전쟁 일보 직전에 취하는 조치였기 때문이다. 김 대통령은 곧 레이니 대사를 청와대로 불러 강력히 항의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회고록에서 '미국이 우리 땅을 빌려서 전쟁을 할 수는 없으며, 한국군의 통수권자로서 군인 60만 중에 절대 한 사람도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는 강력한 뜻을 전달했다고 적었다.
 
레이니 대사는 김영삼 대통령을 만난 뒤 대화 내용을 워싱턴에 보고했다. 레이니 대사와 김 대통령이 만난 시각이 16일 오후(워싱턴 시각 16일 새벽)였으므로, 레이니 대사의 보고가 워싱턴에 도착한 시각도 현지 시각 16일 새벽이었을 것이고, 국무부나 백악관의 NSC 담당자들을 거쳐 레이니 대사의 보고가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전달된 시각은 워싱턴 시각 16일 아침이었을 것이다.
 
워싱턴에서는 6월 16일 아침에 한반도 문제와 관련한 중요한 회의가 예정돼 있었다. 백악관에서 외교, 국방 관련 고위 관리들이 모인 가운데, 한반도 유사시에 대비한 대처방안이 논의됐던 것이다. 이날 회의에서 페리 국방장관과 샐리카쉬빌리 합참의장은 클린턴 미 대통령에게 한반도 미군 증파에 관한 세 가지 대안을 보고했다. 첫 번째 방안은 2,000명의 비전투부대 파견 방안으로, 이들은 혹시 있을 지 모르는 대규모 미군 증원을 위한 정지 작업을 담당하는 임무를 갖고 있었다. 두 번째 방안은 1만 명의 지상군과 수 개의 전투기 대대, 한 척의 항공모함 전단을 파견하는 방안이었고, 세 번째 방안은 5만 명의 지상군과 400대의 항공기, 다수의 로켓 발사대와 패트리어트 미사일 등을 추가 배치하는 대규모 무력 증강 방안이었다. 이들은 또 한시적이나마 미국 내 예비군들을 소집할 필요성이 있다고 보고했다.
 
최종 결정권자는 클린턴 대통령이었지만 페리 장관과 샐리카쉬발리 합참의장은 세 번째 대안을 대통령에게 권고했다. 따라서, 특별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았다면 클린턴 대통령은 세 번째 대안을 선택했을 가능성이 높은 상황이었다.
 
그런데, 특별한 상황이 발생했다. 평양을 방문한 카터 전 미국 대통령으로부터 백악관으로 전화가 걸려 온 것이다. 카터는 김일성이 핵개발 동결에 동의했으며 IAEA 사찰단이 북한에 계속 체류하도록 허용했다면서, 북한과 대화를 재개하고 제재를 철회하는 것이 어떠냐고 물었다. 또, 대통령의 결정을 기다리겠다면서 곧 CNN에 출연할 것이라고 말했다. 백악관 회의실에 모여있던 사람들은 북한이 사찰단의 체류를 허용한 것을 빼면 카터가 거둔 성과가 별 것 없다는 반응이었지만, 카터가 CNN에 출연해 자신의 성과를 선전하고 북미 회담 재개를 촉구하면서 상황은 반전됐다. 결국 백악관 측은 북한이 5MW 원자로에 연료봉 재장전을 하지 않고 사용후 연료봉도 재처리하지 않는다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북미 회담 재개 의사를 밝혔다. 정점을 향해 치닫던 위기가 수그러들게 된 것이다.
미군 폭격기● 1994년 당시 한국의 동의 없는 미국의 독자 군사행동이 가능했을까?
 
만약, 이 시기 카터에 의해 위기가 진정되지 않았을 경우 현실화됐을 전쟁 위기에서 미국은 한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할 수 있었을까? 다음과 같은 점들을 고려해 볼 때, 한국의 동의 없는 미국의 독자 군사행동은 어려웠을 것으로 보인다.
 
첫째, 영변 지역에 대한 폭격은 한반도에서의 전면전쟁으로 확대될 가능성이 있었다. 이 경우 당시 3만 7천명의 미군을 한국에 주둔시키고 있는 미국으로서는 주한미군에 대한 대비책을 세워놓아야 한다. 북한의 전면 공격에 대응할 정도의 무기와 병력 증강이 사전에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1994년 2월 미국의 패트리어트 미사일 배치 시도가 한국 정부의 반대에 의해 무산됐듯이, 한국에 주요 무기나 병력을 보강하는 것은 한국 정부와의 협의가 필요한 것이었다. 또, 당시 김영삼 대통령이 한국군 한 사람도 전쟁에 동원하지 않을 것이라고 공언하는 상황에서 미군만으로 한반도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었다.
 
둘째, 미국이 전쟁을 각오하려면 자국민 철수가 이루어져야 하는데 한국 정부의 도움 없이는 이것이 쉽지 않다. 1990년대초 한국에 거주하고 있는 미국인은 10만명에 달했고, 대부분은 북한의 장사정포 사정거리에 있는 서울에 살고 있었다. 미국은 이들을 소개하는 방법으로 한국 정부가 제공한 열차 편을 이용해 부산과 같은 남쪽 집결지로 미국민들을 이동시킨 다음, 해상이나 항공편을 이용해 미국민들을 일본으로 대피시킨다는 계획을 세워놓고 있었다. 따라서, 이 계획이 순조롭게 진행되기 위해서는 한국 정부의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상황이었다.
 
셋째, 한국의 동의 없는 미국의 독자 북폭은 한미동맹의 파열을 가져올 가능성이 높다. 한미동맹이 파열 지경에 이른 상태에서, 아무리 미국이라도 한반도를 전장으로 하는 전쟁을 치르기는 쉽지 않다. 또, 이런 전례는 미국의 다른 동맹국들에게 미국이 동맹국의 의사를 묻지 않고 언제라도 독자적인 행동에 나설 수 있다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키면서 미국의 전세계적인 동맹전략에 파열음을 가져올 것이다.

 
● 북폭설에 휘둘릴 필요 없지만, 위기 돌파할 외교력 필요
 
다시 북폭설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미국이 한국 정부의 동의 없이 독자 전쟁을 치르기 어렵다는 사실은 1994년의 경우와 크게 다르지 않다. 미국이 전쟁을 치르기 위해서는 한반도에 충분한 무기와 병력을 증파해야 하는데 사드 배치가 한국 정부와의 협의에 의해 이뤄지는 것처럼 주요 무기의 전개는 한국 정부와의 협의 없이 이뤄지기 어렵다. 한국 대통령이 한국군 동원에 동의하지 않는 상황에서 미군만으로 한반도 전쟁을 치르기 어렵다는 조건도 동일하다.
 
한국 체류 미국인도 지금은 30만 명 수준으로 늘었는데, 미국이 자국민 대피를 시키지 앟은 상태에서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북한의 공격으로 대피시키지 않은 미국인이 사망할 경우 어떤 미국 정부라도 미국 국내정치에서 버텨내기 어렵기 때문이다.
 
현 단계에서 과장된 북폭설에 휘둘릴 필요는 없다. 다만, 북한이 미국까지 날아가는 ICBM을 개발하겠다며 핵개발을 가속화하면서 불거지고 있는 이러한 긴장 고조 상태는 앞으로도 상당기간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 우리로서는 미국의 대북 군사압력을 적절히 활용하면서 북한이 비핵화 협상에 나오도록 중국을 움직이게 하는 외교력을 발휘해야 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