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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연극 '파운틴헤드', 저만 불편한가요?

[취재파일] 연극 '파운틴헤드', 저만 불편한가요?
해외 공연계에서 각광받는 예술가들의 작품을 한발 앞서 국내에 소개하곤 해온 LG아트센터가 이번엔 이보 반 호브(Ivo van Hove)의 연출작 ‘파운틴헤드(The Fountainhead)’를 무대에 올렸습니다. 이보 반 호브의 작품이 국내 무대에 올려진 건 지난 2012년 역시 LG아트센터에서 공연된 ‘오프닝 나이트(Opening Night)’에 이어 이번이 두 번째입니다.

그 사이 그의 작품은 영국국립극장이 화제작을 촬영해 해외에서 상영하는 프로그램인 NT라이브를 통해 국내 관객과 만나기도 했습니다. 아서 밀러의 희곡을 바탕으로 한 연극 ‘다리에서 바라본 풍경(A View from the Bridge)’은 이보 반 호브에게 토니상과 올리비에상을 동시에 안겨준 대표작 중 하나로, 국내에서도 관객들의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런 이보 반 호브의 새 작품이 올려진 공연장은 지난 주말 관객들의 열기로 뜨거웠습니다. 그 객석에 저도 있었습니다.
연극 '파운틴헤드'
공간감이 느껴지는 현대적인 무대는 극의 내용을 효율적으로 뒷받침하고, 무대 위에서 라이브로 연주되는 음악과 효과음은 분위기를 기민하게 고조시키고 또 전환했습니다. 카메라를 활용한 영상 연출도 흥미로웠습니다. 공연 예술에서 라이브 카메라를 사용하는 건 사실 더는 새롭게 회자될 만한 것은 아니지만, 이보 반 호브의 영상 활용은 서사의 구체성을 강화하고 극에 활력을 불어넣으며 제 역할을 톡톡히 해냈습니다.

세련되고 개성 있는 연출에 배우들의 정교하고 집요한 연기가 더해진 멋스러운 무대였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연극에 불만이 있음을 고백해야겠습니다. 문제는 극의 내용이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전반적으로 공감하기 어려웠으며, 특정 대사와 설정은 시민으로서 여성으로서 결코 익숙해질 수 없는 불편함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원죄는 원작에 있습니다.
연극 '파운틴헤드'
구 소련 출신의 미국 작가 아인 랜드(Ayn Rand)가 1943년 발표한 동명의 스테디셀러 소설을 원작으로 한 극의 주인공은 젊은 건축가 하워드 로크입니다. 천재적인 재능을 가졌지만 대중의 요구나 유행을 따르지 않고 자신의 신념을 쫓는 그는 아인 랜드가 그려낸 이상적인 인물상입니다.

“인간의 첫 의무는 자신이 되는 겁니다. 누구도 타인을 위해 대신 살 수 없습니다. 인간은 독자성과 의존성 사이에서 선택해야 합니다.” 관습에 순응하지 않고 대중에 영합하지 않겠다는 생각은 예술가로서는 물론 한 명의 시민으로서도 매우 가치 있는 신념입니다. 역사는 이런 신념을 가진 예술가와 시민들에 의해 진보해왔으니까요.

저를 불편하게 만든 건 하워드 로크의 신념이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는 데 있습니다. ‘독자성’은 21세기 최고의 가치 중 하나이지만 유일무이한 가치는 아닙니다. 자유, 평등, 박애, 정의 등의 가치는 모두 포기할 수 없는 것이어서 사회는 언제나 치열하게 균형점을 찾아야 하지만, 그는 이런 가치들을 자의적으로 재단하고 쉽게 줄 세웁니다. 그는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임대주택의 건설과정에서 자신의 당초 설계가 훼손되자 이를 폭파하고 다음과 같이 스스로를 변호합니다.

“제가 가난한 이들의 보금자리를 파괴했다고들 말합니다. 그러나 제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그런 집을 가질 수 없었을 것입니다. 사람들은 그들의 가난이 그들에게 제 작품에 대한 권리를 줬다 믿었습니다. 허나 누구도 제 삶의 권리를 단 1분도 대신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세상은 지금 자기희생이라는 진흙탕 속에서 망해가고 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궤변이란 말입니까? 자신이 설계를 했다고 해서 시민의 세금으로 정부가 건설 중인 건물을 폭파하고도 이토록 당당하다니. 공동주택에 대한 하워드의 인식은 오바마 케어에 대한 트럼프의 인식과 상당히 닮아있는데, 이런 식의 궤변은 극이 진행되는 동안 거듭 반복됩니다. 우월주의에 빠진 등장인물들의 극단적인 언행은 작가가 말하고자 하는 바에 미처 가 닿기도 전에 독자를 먼저 질리게 할 정도입니다.

하워드 로크는 무능한 이들을 공공연히 증오하고, 타인을 위하는 인간의 마음을 위선으로 간단히 폄하합니다. 주인공의 연인 도미니크 프랭콘을 통해 드러나는 아인 랜드의 여성관은 말할 필요도 없이 더 끔찍합니다. ‘미국 극우 보수세력의 바이블’이라 불리는 이 작품은 그들이 가진 자만과 독선, 우월의식도 고스란히 노정하고 있습니다.
연출가 이보 반 호브
이쯤 되면 연출가의 의도가 궁금해집니다. 작품이 무대에 처음 올려진 곳이 미국이 아닌 유럽이었던 만큼 논쟁은 더 뜨거웠을 겁니다. “도대체 왜 이 작품을 선택한 겁니까?” 익숙한 질문인 듯 이보 반 호브는 제작 의도에 대해 여러 차례 해명했습니다.

“이 소설을 연극으로 만들겠다고 했을 때 많은 우려와 비판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나는 이 소설에 (미국의 극단적인 보수 세력이 가진 사상 이상의) 더 복합적인 것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시민으로서 하워드 로크의 신념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지만) 예술가로서는 하워드 로크처럼 되고 싶습니다.”

예술가로서 그가 가진 갈증과 열망이 제작의 동기가 됐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제작 의도는 충분히 이해할만하지만, 안타깝게도 80여 년 전의 이 극단적인 원작을 이보 반 호브가 보다 설득력있고 공감할만하게 현대화해주기를, 그래서 원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에 동의하지 않는 저 같은 사람들에게도 의미 있는 화두를 던져주기를 기대했던 관객에게는 결과적으로 아쉬움이 남는 작품입니다.

(사진제공: LG아트센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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