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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문재인-이재명 지지자의 훈훈한(?) 크로스

3월 29일, 더불어민주당 충청 경선 현장에서

[취재파일] 문재인-이재명 지지자의 훈훈한(?) 크로스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후보의 ‘2연승’으로 끝난 29일 충청 순회 경선 종료 직후, 경선장인 대전 충무체육관에선 상당히 이색적인 장면이 연출됐습니다. 1위를 차지한 문재인 후보가 답례 인사차 장내를 한 바퀴 돌 때였습니다. 무대를 기준으로 오른편, 동선상 가장 가까이 위치한 이재명 후보 측 응원석 앞으로 문 후보가 다가갔습니다. 그 광경을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지켜봤습니다. 이틀 전 치러진 호남 경선 때 문 후보를 향해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이 격한 반응을 쏟아냈던 장면이 떠올랐기 때문입니다.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
그러나 이날은 달랐습니다. 주황색 옷을 입은 이재명 후보 지지자들 다수는 입으로는 ‘이재명’을 연호하면서도 펜스 앞으로 다가가 문 후보에게 박수를 보냈습니다. 몇몇 지지자들의 표정을 유심히 지켜봤습니다. 속마음은 어땠을지 몰라도, 분명히 승자에게 보내는 축하의 박수에 가까워 보였습니다.
문재인 후보 지지자들
더 인상적인 장면은 이재명 후보가 장내를 돌 때 나왔습니다. 우레와 같은 지지자들의 함성과 박수를 들은 이 후보가 뒤 무대 맞은편 가운데 위치한 문재인 후보측 응원석에 다가가자, 파란색 옷을 입은 문 후보 지지자들이 ‘문재인’ 대신 ‘이재명’을 외치며 박수를 보냈습니다. 이재명 후보는 한참을 그 앞에 머무르며 사람들의 박수와 환호에 답했습니다. 기자의 입장에서는 보기 드문 훈훈한 장면이었습니다. (정치권에서 훈훈한 장면을 보기는 생각보다 정말 쉽지 않습니다 ㅠ)

어찌 보면 별 것 아닐 수 있는 이 장면이 색다르게 다가온 건 지난 27일 호남 순회 경선의 기억 때문입니다. 더불어민주당 대선 경선의 전체 판세를 좌우할 수 있는 첫 경선인만큼, 전체적으로 긴장감이 감돌았습니다. 각 진영 지지자들도 결과가 나오기까지 상당히 날이 서 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앞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결과가 발표되자 장내가 꽤 시끄러워졌습니다. 특히 이재명 후보 지지자 쪽에서는 “부정선거”라는 구호와 “문재인 사퇴하라”는 격한 반응이 쏟아졌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응원석 가까이 다가갔을 때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일부 지지자들은 체육관 출구 쪽까지 따라와 퇴장하는 문 후보를 향해 거친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 오늘의 적, 내일의 동지?
더불어민주당 충청 경선 현장
두 경선장의 분위기가 사뭇 달랐던 데는 장소가 바뀐 탓도 있겠지만, 경선 결과가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입니다. 호남 경선에서 60.2% 득표율로 압승을 거뒀던 문재인 후보는 과반 달성에는 실패했지만 47.8%의 지지를 얻어 사실상 본선행 티켓을 예약했습니다. 이재명 후보 역시 15.3%의 득표율로 선방했습니다. 한때 일각에선 이 후보의 지지율이 한 자릿수에 그치지 않겠나 하는 관측도 있었습니다. 문재인 후보가 ‘대세론’을, 안희정 후보가 ‘홈 그라운드’임을 외치는 충청에서, 내세울 게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10% 중반대 득표율이면, 목표를 넉넉히 달성한 셈입니다. 현장에서도 개표 결과가 발표되자 이재명 후보 측에서 커다란 환호가 쏟아졌습니다. 마치 환호성만 들으면 이재명 후보가 1위를 차지한 것 같은, 그런 함성이었습니다. 두 잔칫집 사이에 여유와 배려가 오간 겁니다.

각 캠프 쪽 관계자들에게 조금 더 정치적인 해석을 들어봤습니다. 문재인 캠프 쪽에서는 첫 무대였던 호남 경선이 압승으로 끝난 뒤부터는 ‘포용과 화합’ 모드로 가겠다는 분위기가 강합니다. 경선 승리가 확정적이라는 전제로, 그 이후인 본선에 대비하겠다는 겁니다. 어제(30일) 있었던 SBS 토론에서도 문 후보는 “안희정, 이재명, 최성 후보 뿐 아니라 박원순 서울시장, 김부겸 의원까지 함께 하는 더불어민주당 정부를 만들겠다”고 말했습니다. 그동안 서로 비판도 하고 설전도 벌여가며 치열하게 경선을 치렀지만, 이제 ‘큰 형’이자 ‘1등 후보’로서 면모를 갖추겠다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한편으로 문 후보 측에선 “(문 후보를) 돕는다면 차라리 이재명 시장이 화끈하게 도와줄 것”이라는 말도 심심찮게 나옵니다. 만약 문 후보가 경선에서 승리해 더불어민주당 대선 후보가 되고 나면, 누구보다 이재명 후보가 든든한 우군이 되어줄 가능성이 높다는 겁니다. 문재인 캠프의 한 의원은 “이번 대선판의 화두가 된 ‘적폐 청산’의 일익을 이재명 후보가 확실히 맡아주고 함께 뛰는 그림을 그려 볼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지난 탄핵 정국에서 문 후보가 자신과 이 후보를 빗대 ‘고구마엔 사이다가 제격’이라고 했던 발언을 떠올릴 수 있는 대목입니다.

오히려 정치권 안팎에선 ‘노무현의 사람’으로 함께 분류됐던 문 후보와 안 후보가 이번 경선 과정을 거치며 서먹해졌다는 평가도 많습니다. ‘대연정 논란’과 ‘네거티브 공방’이 결정적이었습니다. 대연정 논란만 해도 정치적 견해 차이에서 출발했지만 ‘전두환 표창 발언’을 거치며 네거티브 책임 공방이 전개되면서부터는 감정 싸움으로 치달았습니다. 안희정 후보가 새벽 2시에 페이스북에 글을 올리고 억울함을 토로했던 장면은 절정이었습니다. 안 후보는 ‘금강팀’이었고, 문 후보는 ‘부산팀’이었기 때문에 원래 결이 다르다는 ‘족보 이야기’까지 나왔습니다. 안 후보 주변에 비문 의원들이 대거 모여들면서, 경선 이후 두 캠프 간 화학적 결합이 과연 이뤄질 수 있을지도 의문입니다.

그러니까 문재인 캠프와 지지자들 입장에선, 어차피 1위를 내다보는 마당에 안희정 후보보다 덜 위협적이고, 또 경선 이후에 화끈하게 도와줄 것 같은 이재명 후보 쪽에 마음이 더 쏠릴 수 있다는 겁니다.

이재명 후보 쪽 역시 나름의 계산이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남은 경선에서 중요한 건 어차피 ‘2위 싸움’이라는 겁니다. 1차적으로는 남은 영남과 수도권 경선에서 문재인 후보의 과반을 저지하고, 결선 투표로 가서 승부를 본다는 게 이재명 후보 측의 전략입니다. 문 후보를 앞지르기보다는 독주를 견제하면서 역전의 기회를 엿보겠다는 것이고, 이를 위해선 먼저 안희정 후보와의 싸움에서 밀리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는 게 정설입니다. 실제로 이 후보는 호남에서 2위를 차지한 안 후보와의 표 대결에서 불과 0.4%P 밖에 뒤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추세대로라면, 이 후보의 전략이 맞아떨어지고 있는 셈입니다.

문 후보의 독주가 계속될 경우 가장 많은 표가 몰려 있는 수도권에서 문 후보 쪽 표를 상당 부분 끌어올 수 있다는 계산도 있습니다. 특히 문 후보와 이 후보는 ‘적폐 청산’이라는 화두에선 겹치는 부분이 많습니다. 지지층 또한 ‘진보적 성향의 상대적으로 젊은 유권자’ 층에서 꽤 겹치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이재명 후보와 지지자들 입장에서도, 이른바 ‘문팬’들을 가까이 하면 가까이 했지, 멀리 할 까닭이 없다는 얘깁니다.

무엇보다 이재명 후보는 이번 대선 국면에서 “어떻게 하더라도 이미 이득”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탄핵 정국에서 급속히 치솟았던 지지율이 빠지긴 했지만, 이미 ‘트러블메이커’에서 ‘전국구 정치인’으로 거듭난 지 오랩니다. 이재명 후보에게는 선택지가 많습니다. 하루빨리 ‘이재명 대통령’을 보고 싶은 지지자들에게는 조금 기분 나쁜 얘기가 될 수 있겠지만, 어떤 결과가 나오더라도 손해 보는 경기는 아닙니다. 멋있게 싸우고, 이기든 지든 의미 있는 그림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 정치는 감동…‘No Side' 정신 볼 수 있을까

물론 이런 정치공학적인 해석과 접근만이 전부는 아닐 겁니다. 현장에서 만난 각 후보 측 지지자들에게 의미 있는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었습니다. 주황색 상의에 두건까지 쓴 한 이재명 지지자는 기자에게 “다른 당도 아니고, 같은 당인데 원래 이래야 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습니다. “우리 후보가 이기면 좋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다 같은 민주당 지지자들”이라는 겁니다. 또 다른 한 분은 “극성 지지자들도 있긴 하지만, 서로 배려하고 응원하는 그런 정치 문화로 가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다소 원론적이긴 하지만, 틀린 구석 하나 없는 말입니다.

프로레슬러이자 열성 문재인 후보 지지자로 이번 경선에서 ‘더문캠TV'의 패널로 활약하고 있는 김남훈 씨는 경선 현장에서 겪은 경험담을 들려줬습니다. 충청 경선에서 현장 상황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더문캠TV' 방송 세트를 안희정 후보 응원석 쪽에 설치하게 됐답니다. 자칫 예민할 수도 있는 상황인데 어떤 핀잔이나 방해도 없이 사람들이 음식을 가져다주고, 격려도 많이 해주었답니다. 물론 그의 범상치 않은 외모(?) 덕도 있겠지만, 정권을 교체할 대선 후보를 선출하는 판에서 ‘우리는 한 팀’이라는 느낌을 더 많이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럭비에서 언급되는 ‘노 사이드(No Side) 정신’을 예로 들었습니다. 럭비 선수들이 경기장 안에서는 양 편으로 나뉘어 격전을 치르지만, 경기가 끝나면 진영을 구분하지 않고 서로를 격려한다는 겁니다.  
민주당 경선 현장에서 '우리는 한팀!' 피켓을 든 안희정 지지자. (프로레슬러 김남훈 님 제공)
‘문팬’ 프로레슬러 김남훈, 안희정 지지자님과 함께. (김남훈 님 제공)
정치적 해석도, 지지자들이 느끼는 ‘노 사이드 정신’도 모두 맞는 말일 겁니다. 다만 정치부 기자로서 짧게 나마 일하면서 느낀 것은 의외로 사람들이 정치에 ‘감동’을 바란다는 점입니다. 겉으로는 정치 혐오가 만연한 것 같아도 대중은 결정적인 순간에 정치가 주는 감동에 주목하고 환호합니다. 반대로, 감동을 주지 못하고 오히려 실망을 안기는 정치에도 대중은 분명히 반응하고 기회가 오면 반드시 응징해 왔습니다. 

이번 대선 정국도 마찬가지입니다. 관심을 모았던 민주당 경선이 궤도에 오르고 분위기가 달아오르면서 어디서 많이 보던 장면들이 어김없이 나왔습니다. ‘아름다운 경쟁’이 아닌, 한때 이전투구로 흐르려는 조짐도 보였습니다. 경선에서 나온 두 진영 지지자들의 '크로스‘가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그래서 였습니다.

조기 대선까지 앞으로 40여 일도 채 남지 않았습니다. 대선 후보 확정에 이어 후보 단일화, 주자간의 합종연횡 등 많은 이벤트가 있을 것으로 예상됩니다. 정치 뉴스의 홍수 속에서, 국민의 관심을 끝까지 붙들어 매는 것도 정치권에 주어진 중요한 과제입니다. 남은 기간 정치적 유불리를 넘어선 정치권의 '노 사이드 정신’을 볼 수 있을지, 우선 남은 민주당 경선부터 지켜봐야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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