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마도 ‘위안(慰安)’이란 단어가 갖고 있는 뜻 때문일 겁니다. 일본군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실제로 사용한 용어의 역사성 때문에 ‘위안부’란 표현을 쓴다지만, ‘위로하여 마음을 편하게 함 또는 그렇게 하여 주는 대상’이란 ‘위안’의 사전적 의미를 떠올리면, 그 악랄한 기만의 표현을 따라 쓰는 게 적잖이 불편한 것입니다.
동시에 일말의 의심도 생깁니다. 영어 표현상의 공식용어인 ‘일본군 성노예(military sexual slavery by Japan)’가 한국사회에서 널리 받아들여지지 않은 이면엔 성폭행 또는 성적 학대 피해에 대해 여전히 ‘수치스러운 일’ 혹은 ‘쉬쉬해야 할 일’이란 인식이 자리 잡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 말이죠. 이 글에서 ‘위안부’보다 ‘성노예’란 표현을 자주 사용하는 건 이런 이유 때문입니다.
실제로 영화에는 3명의 피해 할머니들이 중심인물로 등장합니다. 한국의 길원옥 할머니와 필리핀의 아델라 할머니, 그리고 중국의 차오 할머니입니다. 세 분은 각각 13살, 14살, 그리고 18살(혹은 19살)에 일본군에 납치돼 위안소로 끌려갔다고 합니다. 그리고 짧게는 3개월, 길게는 6년 동안 성노예로 참혹한 시간을 보냈습니다.
차오 할머니는 말을 이어갔습니다. “몸은 만신창이가 됐어. 더는 임신할 수 없었지.” 53살에 입양해 키운 하나밖에 없는 딸에게조차 한 번도 자세히 해본 적 없다는 이야기를 할머니는 감독에게 덤덤하게 털어놓습니다. 그 긴 세월 동안 눈물조차 말라버린 걸까요?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이런 이야기를 하는 할머니의 모습은 충격적이면서도 안타까웠습니다.
“위안부 피해자라는 것 자체가 치욕이야. 필리핀이나 이곳에선 일반적인 태도지, 밝힌다고 해서 뭐가 되겠어? 영웅대접? 매장이나 안 당하면 다행이지.” 할머니를 겁탈하고 성노예로 삼은 것은 일본군이지만, 전쟁이 끝난 뒤 2차 피해를 가한 건 할머니의 나라 사람들입니다. 할머니의 나라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가해자의 처벌과 사과를 받아내기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 대신, 떠들어봤자 당신만 손해라며 사실상 피해자들에게 침묵을 강요해왔습니다. 중국도 한국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위안부 피해 사실을 증언하기 위해 일본을 찾은 할머니에게 일본의 극우 시위대는 확성기를 들고 소리칩니다. 꺼져라, 한국의 매춘부들! 물러가라, 창녀들! 수치스러운 줄 알아라, 창피한 줄도 모르느냐, 거짓말로 구걸을 하고 있다는 걸 알고 있다...
화가 나서 눈물이 핑 돌았습니다. 죄지은 사람이 되려 큰 소리를 치고 가해자가 피해자를 공공연하게 모욕하는 세상이라니, 잘못돼도 뭔가 크게 잘못됐습니다. 그들에게 ‘국가’란 무엇이길래 이토록 ‘인간’을 짓밟고 모욕하도록 만든단 말입니까? ‘역사’가 무엇이길래 ‘진실’과 ‘반성’의 기록이 아닌 ‘합리화’와 ‘가짜 자긍심’의 도구로 난도질 된단 말입니까?
이토록 끔찍하고 명백한 반인륜 전쟁범죄의 피해자들이 왜 70년 넘도록 제대로 된 사과 한마디 들을 수 없는 것인지, 일본의 그리고 우리 내부의 가해자들에게 묻고 싶어집니다. 당신들에게 ‘국가’는, ‘역사’는 무엇입니까? ‘국민’은 대체 무엇입니까? "이제 그만 하라."는 말은 가해자나 방관자가 피해자를 모욕하기 위해 하는 말이 아니라, 피해자가 속죄하는 가해자를 용서하기 위해 건네는 말이어야 합니다.
* 사진: 영화 '어폴로지'/ 제공: 영화사 그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