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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일본, 정치인 선발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

[취재파일] 일본, 정치인 선발 시험에 나오는 문제들
▲ 11일 일본 아침 신문

어제(11일) 아침 일본 신문들입니다. 남수단에 파견된 자위대의 파병기간을 오는 5월 말로 종료한다는 뉴스가 톱뉴스입니다. 하지만, 박근혜 전 대통령의 파면 소식도 1면 주요 뉴스로 다루고 있습니다. 전체적인 톤은 역시 한일 관계가 걱정된다는 겁니다. 재작년 말 한일 위안부 합의에 이어 지난해 말 한일 군사정보 보호협정 체결까지 박 전 대통령이 추진했던 대일 정책들이 자칫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입니다.

한일 관계도 중요하지만, 우리에게 더 크고 중요한 것이 남아 있습니다. 이제 58일 안에 치러질 대통령 선거입니다. 이미 대선 후보들 사이에 치열한 경쟁이 시작됐죠. 탄핵 사태를 거치며 우리 유권자들은 올바른 정치인을 뽑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절감했습니다. 하지만, 올바른 정치인을 가려내는 일은 생각만큼 쉽지 않습니다. 일본 유권자들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글은 '우리보다 일본이 낫다'는 말을 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일본은 '이렇구나' 정도로 이해해두실 만한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걸그룹 출신 이마이 에리코 의원 참의원 선거 포스터
일본 정치인들을 보면 유난히 유력 정치 가문 출신, 작가, 아나운서, 배우, 개그맨, 스포츠 스타들이 많습니다. 위 사진은 지난해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 비례대표로 당선된 이마이 에리코 의원의 선거 포스터입니다. 이마이 의원은 1990년대 후반 인기 걸그룹 '스피드(SPEED)'의 멤버였습니다. 이런 사람들의 공통점은 모두 TV 출연 등으로 유권자에게 이름이 널리 알려져 있다는 겁니다. 우리나라에서도 지명도가 높은 후보들이 유리하죠. 그런데, 일본에선 후보들의 이름과 지명도가 훨씬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일본의 투표용지에 있습니다.
일본 2016년 참의원 선거 투표용지
일본 유권자들은 투표용지에 후보의 '이름', 혹은 정당명을 직접 적어야 합니다. 우리처럼 동그라미를 찍는 것이 아닙니다. 유권자들의 고령화까지 생각하면 이름이 익숙한 후보, 즉 지명도가 높은 후보가 확실히 유리합니다. 후보들의 포스터에도 이름이 강조됩니다. 상대적으로 정책 홍보는 적습니다.  일본 언론들도 'A 후보가 출마했다', 'A 후보가 B 정책을 강조했다' 정도만 보도합니다. 해당 정책에 대한 분석이나 검증 보도, 후보 간 정책 비교 등을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일본 정치가 정책보다 인물 이미지에만 좌우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입니다.

물론 모든 정치인들이 이름만 내세워 표를 받는 것은 아닙니다. 유권자들의 마음을 얻으려면 역시 괜찮은 스펙과 뛰어난 언변, 확고한 정책 방향, 그리고 개인적 매력도 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당연히 정당 공천을 받아야겠죠. 그런데, 일본에는 우리나라에 없는 또 다른 공천 루트가 있습니다. 바로 정치학교 입학입니다. 정치학교를 졸업해 그 스펙으로 정당 공천을 받는 겁니다.
마쓰시타 회장이 세운 '마쓰시타 정경숙'
대표적인 정치학교가 1979년 마쓰시타 전기(현 파나소닉)의 마쓰시타 고노스케 회장이 세운 '마쓰시타 정경숙'( www.mskj.or.jp)입니다. 매년 10명 미만의 신입생을 선발해 4년간 기숙사 생활을 시킵니다. 그리고, 매달 21만-23만 엔의 연수자금(용돈)과 연간 110만 엔 상당의 활동자금(연구비 등)을 지원하죠. 2016년 4월 현재 누적 졸업생은 263명. 2011년 민주당 소속의 노다 요시히코 총리가 이 학교 출신으로 처음 총리에 오르기도 했습니다. 2017년 2월 현재도 졸업생 65명이 참의원, 중의원과 각 지방의원, 시장과 도지사 등으로 활동 중입니다.
자민당 설립 정치학교 '도쿄자민당정경숙'
마쓰시타 정경숙만큼 인기 있는 정치학교는 2006년 제1여당 자민당이 설립한 '도쿄 자민당 정경숙'( www.tokyo-jimin.jp/seikei)입니다. 일반 리더코스 50명, 전문 정치 코스 50명씩을 뽑아 1년간 교육시킵니다. 마쓰시타 정경숙과 달리 사비로 수강료도 내야 합니다. (리더 코스 5만엔, 정치가 코스 10만엔) 최근 자민당이 졸업생들을 속속 공천하면서 인기가 날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고이케 도쿄도지사의 정치학교 '키보우노쥬쿠'
일본 언론들이 주목하는 또 다른 정치학교는 고이케 유리코 도쿄도지사가 설립한 '키보우노쥬쿠(희망의 학원/ koikejyuku.tokyo)'입니다. 고이케 도지사는 지난해 도쿄도지사 선거에서 자민당 공천을 못 받자 무소속 출마를 강행해 당선된 인물입니다. 이후 이 학교를 설립했습니다. 수강생은 수강료를 내고 6개월간 6회의 강의를 들으면 됩니다. 학교 운영단체인 '도민 최우선 회'는 오는 7월 도쿄도의회 선거에서 지역 정당으로서 자민당 후보와 경쟁하겠다고 밝혔습니다. 고이케 도지사는 아직도 자민당 소속이지만, 탈당이 초읽기에 들어갔다는 분석입니다.

하여튼 키보우노주큐의 최우선 목표는 오는 7월 도쿄도의회 선거에 나갈 후보 발굴입니다. 그런데, 이 학교가 지난 1월 쥬쿠생들을 대상으로 '선거대책강좌'와 '정책입안부회'라는 두 코스의 선발 시험을 실시했습니다. 일본 언론들은 사실상 입후보자 선발 시험이라고 보도했습니다. 이 시험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나왔습니다.
A. 의원의 '의원 제안 조례'란 무엇입니까? 그 실태와 제안 방식에 대해 설명하십시오. 그리고, 각지의 현황을 총괄하고 향후 바람직한 모습을 기술해주십시오.

B-1. 행정 개혁에는 '정보 공개'가 반드시 필요합니다. 왜일까요? 행정조직과 민간기업의 차이를 사례와 함께 이유를 세 가지 이상 설명하십시오.

B-2. 아베 노믹스는 무엇인가? 이전 정권의 정책과 차이를 설명하고, 현황을 평가해 주세요. 그리고, 당신은 찬성인지, 반대인지 그 이유와 향후 방향에 대한 의견도 적어주세요.

B-3. '베이비 박스'라는 것이 있습니다. 아기를 키울 수 없는 부모가 자녀를 방치하거나 학대하지 않도록 대신 맡아주는 상자입니다. 그런데, 이 제도에 대해 찬반 양론이 있습니다. 찬반 각각의 주장을 쓰고, 당신의 생각도 덧붙여주세요.

선거대책강좌 지원자는 A 문제, 정책입안부회 지원자는 B 문제 세 개 가운데 하나에 답해야 합니다. (800-1200자) 개인적으론 B-1 정보 공개의 중요성을 강조한 문제가 마음에 드는군요. 정보를 투명하게 공개할수록 부정을 저지르기 쉽지 않죠.

이밖에 GAB 테스트라는 일종의 적성 아이큐 검사도 있었습니다. 일본의 인사컨설팅업체 'SHL재팬'이 개발한 테스트로 언어(25분간 52개 문제)와 수리(35분간 40개 문제), 성격(68개 문제) 등 세 가지 영역으로 치러집니다. 정확한 기출 문제는 공개되지 않았지만, GAB 문제들은 대략 아래와 같습니다.
http://jyosiki.com 내 GAB 수리 예제
1) 위 그래프는 어느 나라의 각급 학교별 스포츠클럽 활동 인원수를 나타내고 있다. (왼쪽부터 축구-야구-테니스-배구-농구) 중학생 농구부 인원을 1이라고 할 때 전체 학교의 농구부 총인원은 몇일까? [정답: 3.81]
http://jyosiki.com 내 GAB 시험 예제
2) 위 [?]에 들어갈 도형 배치는 A-E 가운데 어느 것인가? [정답: B]

지원자는 1,000여 명. 이 가운데 324명이 합격했습니다. 선거 입후보 희망자들은 필기시험으로 뽑다니 대단합니다. 하지만, 일본에서도 뭐 저런 것으로 정치인을 뽑느냐는 비판이 있습니다. 또, 합격자 가운데 앞으로 60여 명의 후보를 다시 추릴 계획인데, 이 과정은 결국 기존 공천 방식(인지도와 당선 가능성 등 기준)과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지적도 있습니다. 우리 정당들이 공천 신청자들에게 저런 주관식 필기시험이나 아이큐 테스트 등을 본다면 어떨까요? 상상만 해도 웃음이 나옵니다.

정당이 훌륭한 정치인을 공천하고 유권자가 좋은 정치인에 투표하는 일, 정말 쉽지 않습니다. 미국은 오바마 전 대통령을 선택하고, 8년 뒤 트럼프 대통령을 선택했습니다. 독일 유권자들은 메르켈 총리를 계속 지지하고 있고요, 캐나다 유권자들은 1971년생의 트뤼도 총리를 선택했죠. 훌륭한 정치인을 골라내기 위해 각국의 유권자들이 모두 고민 중인 겁니다. 그런데, 가장 기본이 되고 확실한 방법이 하나 있습니다. 바로 '관심'입니다. 내 한 표가 국가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생각으로 후보들을 조사하고, 정책을 분석하는 관심. 그게 필요합니다. 뽑고 나서 후회하면 너무 늦다는 것, 이번에 잘 확인하지 않았습니까? 저희 언론도 반성하겠습니다. 오는 대통령 선거에서 우리 유권자 모두가 차세대 한국을 이끌어갈 훌륭한 지도자를 선택하길 간절히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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