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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너무 정치적이었다고요?

'가장 정치적인 아카데미 시상식'을 위한 변명

[취재파일] 아카데미 시상식이 너무 정치적이었다고요?
제89회 미국 아카데미 시상식이 현지시각으로 지난 주말 막을 내렸습니다. 이렇게 극적이고 황당한 아카데미 시상식이 또 있었을까요? 들으셨겠지만, 엄청난 해프닝이 있었습니다. 시상식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상 수상작이 실수로 잘못 발표된 일입니다.

작품상 수상작 발표를 위해 무대에 오른 원로배우 페이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는 ‘라라랜드’를 큰 소리로 외쳤고, 라라랜드 제작진은 무대에 올라 기쁨과 감사의 인사를 전했습니다.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은 그렇게 끝나는 듯 했습니다.

그런데 갑자기 라라랜드의 프로듀서인 조던 호로위츠가 정색을 하고 마이크를 잡았습니다. “실수가 있었습니다. ‘문라이트’, 너희가 작품상을 받았어.”라는 겁니다. 장내는 술렁였고, 그는 다시 쐐기를 박듯 “농담이 아니에요. ‘문라이트’가 작품상을 받았습니다.”라고 말했습니다.

전후사정은 이랬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주최 측이 페이 더너웨이와 워런 비티에게 잘못된 수상자 봉투를 건넨 겁니다. 워런 비티는 "우리가 받은 봉투에 여우주연상 수상자인 에마 스톤의 이름이 적혀 있었고, 영화 이름이 '라라랜드'로 되어 있었다."며 "그래서 좀 오랫동안 들여다봤다.“고 설명했습니다.

시상식을 보신 분들은 워런 비티가 작품상 수상작을 발표하기 전 봉투를 만지작거리며 멈칫하던 순간들을 기억하실 겁니다. 결국 시상식이 끝난 뒤 주최 측은 "이런 일이 발생한 데 대해 깊이 사과한다."고 발표했습니다.
‘문라이트’ 배리 젠킨스 감독과 제작진
이런 우여곡절 끝에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 작품상의 주인공은 ‘문라이트’가 됐습니다. ‘문라이트’의 팬들에겐, 황당하지만 그래도 반가운 수상입니다. ‘라라랜드’도 좋았지만, ‘문라이트’가 조금 더 좋았던 제게도 그렇습니다.

물론 ‘라라랜드’가 수상했다 해도 고개를 끄덕였을 겁니다. 작품상이 ‘라라랜드’와 ‘문라이트’의 대결이 될 거라는 전망 속에서도, 올해 가장 많은 부문 후보에 오르고 흥행성적도 더 좋은 ‘라라랜드’가 조금은 더 유리할 거란 평가가 많았으니까요.

하지만 많은 이들의 예상은 빗나갔고, 올해 아카데미 시상식의 메시지는 분명해보였습니다. 그것은 ‘다양성의 가치에 대한 존중’이었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에 대한 저항’이었습니다.
마허셜라 알리(좌)·비올라 데이비스(우)
가난한 흑인 성소수자의 성장기를 그린 ‘문라이트’의 작품상·각색상 수상은 물론 마허셜라 알리(‘문라이트’)와 비올라 데이비스(‘펜스’)의 남녀조연상 수상 소식에서도, ‘백인만의 잔치’로 비판받던 아카데미의 변화를 읽을 수 있습니다.

아카데미의 변화 바람을 타고 흑인의 이야기 혹은 흑인이라고 해서 운 좋게 상을 받은 건 아닙니다. 이들의 빼어난 작품과 연기는 그동안 아카데미가 얼마나 많은 흑인의 이야기와 흑인 연기자들의 성취에 눈감아 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할 정도였습니다.

외국어영화상은 이란의 유명 감독 아쉬가르 파르하디의 ‘세일즈맨’이 차지했는데, 파르하디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 행정명령에 반대해 시상식 불참을 선언한 바 있습니다. 글로 대신한 수상소감에서 그는 "나의 불참은 비인간적인 법에 의해 모욕을 당한 이란 국민과 다른 6개국 국민을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밝혔습니다.

단편 다큐멘터리상 수상작에도 흥미로운 뒷이야기가 있습니다. 수상작 ‘하얀 헬멧’은 시리아 민방위대의 인명구조 활동을 담은 작품인데, 카메라맨 중 한 명인 칼레드 카티브가 시상식 현장에 함께 하지 못한 사연이 화제가 됐습니다. 미국 국토안보부가 시상식 직전 카티브에 대한 부정적 정보를 확인했다며 LA행 비행기 탑승을 막은 겁니다.
아카데미 시상식 진행자 지미 키멀
트럼프(혹은 그가 대표하는 정치세력)의 극단적인 발언과 정책들이 아카데미 시상식의 모습을 바꾼 건 이뿐만이 아닙니다. 진행을 맡은 지미 키멀은 “트럼프 대통령에게 고맙습니다. 지난해 아카데미가 인종차별적이란 비판을 받았던 것 기억하시죠? 올해는 그런 비판이 싹 사라졌습니다. 대통령 덕분입니다.”라며 트럼프를 직접 겨냥했습니다.

골든글로브 시상식에서 트럼프를 비난했다 ‘과대평가된 배우’라는 비아냥을 산 메릴 스트립에 대해서는 그녀의 20번째 아카데미상 후보 지명 사실을 상기시키며 “우리는 올해도 습관적으로 그녀의 이름을 적었습니다.”라고 응수했고, 트럼프가 언론과 벌이는 전쟁을 패러디해 "CNN이나 뉴욕타임스, 로스앤젤레스타임스, 그밖에 타임스로 끝나는 매체에서 온 기자들은 나가 주세요. 우리는 가짜뉴스를 참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소리치기도 했습니다.

시상식 참석자의 일부는 반이민 행정명령에 항의해 법정 투쟁에 나선 미국시민자유연맹을 지지한다는 의미로 ‘파란 리본’을 달고 시상식에 등장했습니다. '러빙'으로 여우주연상 후보에 오른 루스 네가도, 애니메이션 '모아나'로 주제가상 후보에 오른 린 마누엘 미란다도, '문라이트'의 감독 배리 젠킨스도 ‘파란 리본’을 달았습니다.

이렇게 변한 아카데미 시상식의 모습에 일부 부정적인 시각도 있는 게 사실입니다. 지나치게 정치적이라는 거죠. 하지만 ‘백인만의 잔치’로 불리던 그 때는 아카데미가 정치적이지 않았을까요? 사회적 약자, 소수자의 이야기에 관심을 두지 않고 유색인종의 성취를 간과하는 태도는 그 자체로 정치적 편향성을 띠고 있습니다. 다만 기득권의 시각을 반영하고 있다는 게 다를 뿐입니다.

정치가 다양성의 가치를 짓밟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길 때 예술은 정치에서 소외된 사회적 약자와 소수자를 감싸 안아줄 공간이 되고는 했습니다. 정치인의 목소리가 극단적일수록 예술가들의 목소리는 절박해지기 마련입니다. 이번 아카데미 시상식이 이례적으로 정치적이었다면 그건 오늘날 미국의 정치 현실이 영화인들을 그런 상황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일 겁니다.

'문라이트'의 프로듀서인 아델 로만스키는 작품상을 받으러 나온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수상 소감을 밝혔습니다. "('문라이트'의 작품상 수상이) 흑인 소년들과 갈색 피부의 소녀들, 그리고 집에서 시상식을 지켜보며 자신이 소외됐다고 느끼는 다른 모든 이들에게 힘이 되기를 바랍니다."

다양성의 가치를 짓밟고 차별과 혐오를 부추기는 세력이 횡행할 때, 아카데미 시상식이 보여준 메시지에는 저를 안심시키는 그 무엇인가가 포함돼 있었습니다.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미국의 대통령이 이토록 조롱과 풍자의 대상이 되는 건 안타까운 일이지만, 현 시국에서 조롱과 풍자마저 사라진 침묵의 아카데미 시상식을 상상하는 건 오싹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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