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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아주 긴 변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 by 니시카와 미와

[취재파일] '아주 긴 변명'을 통해 말하고 싶은 것 by 니시카와 미와
국내에서 개봉하는 많은 일본 영화들이 그러하듯, ‘아주 긴 변명’ 또한 소소한 이야기를 통해 개인의 성장과 성찰을 그립니다. 새로운 소재도 아니고 놀랄 만한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고, 눈길을 사로잡는 영상이 있는 것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작은 일본 영화 특유의 정서를 담고 있어, 이런 영화를 좋아하는 관객이라면 잔잔한 감동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이야기는 대충 이렇게 전개됩니다. 소설가 사치오는 아내가 친구와 여행을 떠났다 버스 추락 사고를 당하면서 홀로 남겨지게 됩니다. 아내가 숨진 날 밤 젊은 애인과 불륜 중이었던 그는 아내의 사망 소식에도 눈물조차 흘리지 않습니다. 그러던 그가 함께 사고를 당한 아내 친구의 유족, 즉 고인의 남편과 두 자녀를 만나면서 생각지 못했던 감정의 변화를 겪게 되는 이야기가 담겼습니다.

이 작품의 감독이자 원작 소설의 작가인 니시카와 미와 씨가 지난주 내한해 기자간담회를 열었습니다. 여성이면서 여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보다는 남성이 주인공인 이야기를 쓰는 게 더 편하다고 말하는 니시카와 감독. ‘뒤늦게 시작된 사랑 이야기’라는 설명 문구가 붙은 이 영화를 통해 무슨 얘기를 하고 싶었던 걸까요? 기자간담회 속 그녀의 대답을 여기 담았습니다.
니시카와 미와 '아주 긴 변명'
●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었건 건가요?

“사람은 그렇게 쉽게 성장을 하고 간단히 변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그리고 싶었습니다. 부인을 최악의 타이밍에서 가장 안 좋은 관계 중에서 잃고 그것을 계기로 새로운 관계를 만나고 그러면서 잃었던 인간성을 찾아가는 이야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관객분들은 그런 이야기를 통해서 재미를 느꼈을 수도 있겠지만, 저는 사실 그런 과정 속에서, 즉 주인공이 자신의 인간성을 회복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에 그게 끝이 아니라 또 다른 벽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그 벽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그 절망을 딛고 일어서서 앞을 향해 나아가야 한다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습니다.”

니시카와 감독은 '안 좋은 관계 속에서 갑자기 하게 된 이별‘에 대해 여러 차례 언급했는데, 사실 드문 경우는 아닐 겁니다. 생사를 가르는 이별은 계획대로 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요. 부모 마음에 상처를 주는 말과 행동을 한 뒤 부모를 떠나보내는 자식도 많고, 배우자나 형제자매, 친구 등 가까운 이들과 좋지 않은 관계 속에서 뜻밖의 이별을 하는 사람들도 적지 않을 겁니다.

변명을 할 기회도, 용서를 청할 시간도 주어지지 않으니, 남겨진 사람들은 무력감을 피하기 어려울 겁니다. 감독은 말합니다. 그러니 살아있을 때 그들과 제대로 의사소통을 하라고. 물론 그게 말처럼 쉬운 거라면, 사무치는 후회를 할 일도, 이런 영화가 만들어질 일도 없겠지만 말이죠. 
니시카와 미와 '아주 긴 변명'
● 이런 이야기가 하고 싶어진 계기는 무엇인가요?

“이 작품에 대해 처음 생각하게 된 건 2011년 말 쯤이었습니다. 아시는 것처럼 2011년 일본에선 3.11 대지진이 일어났습니다. 당시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창작 활동을 하는 많은 이들이 굉장한 무력감을 느꼈습니다. 이 세상을 다시 일으켜 세우는 데 어떤 보탬이 될 수 있을지에 대해 무력감도 느끼고 고민도 깊었습니다. 저도 대지진을 직접 경험한 것은 아니지만, 과연 내가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당시에 뉴스나 다큐멘터리 같은 프로그램에서 이런 이야기를 굉장히 자주 다뤘는데, 그 속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아파하는 사람들을 많이 볼 수 있었습니다. 그들을 보며, 이런 식의 이별을 맞을 때 다른 사람한테 말하지 못하는 굉장히 나쁜 관계에 있던 사람들도 분명히 있었을 거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렇다면 그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자신의 아픔을 얘기하지 못한 채 남은 인생을 살아가겠구나 생각을 했습니다. 제가 만약 그 재난의 당사자였다면 나한테도 그런 경험이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런 식으로 비극적인 순간을 맞을 수도 있겠구나 생각했습니다.”

“3.11 대지진을 영화에서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지는 않지는 않습니다만, 여러 가지 형태의 재난과 여러 가지 형태의 이별, 또 아픔이 있기 때문에, 그런 것들을 좀 더 보편적인 형식으로 그리고 싶었습니다. 일본에선 3.11 대지진 이후에도 지진도 자주 일어나고 다른 재난도 있었습니다. 한국에서도 세월호 참사가 있었고 그밖에도 다른 재난들이 있었습니다. 저는 재난 자체가 클라이맥스가 아닌, 그 재난 이후에 삶이 어떻게 진행될 것인지, 어떻게 살아가야 할 것인 지를 다루고 싶었습니다.“

지난달 국내 개봉한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 ‘너의 이름은.’도 그렇지만, 근래 나온 일본 영화들에선 2011년 발생한 3.11 대지진의 흔적을 드물지 않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깊은 상실감과 무력감에 빠진 사회 속에서 남겨진 이들을 위로하고 일으켜 세우는 것을 많은 창작자들이 책무처럼 느끼는 것 같았습니다. 아니 어쩌면 창작자들 자신이 그런 위로와 의지를 필요로 했는지도 모르겠네요. 우리 사회도 지난 경험에서 그러했듯이.

이런 재난은 사회나 국가 차원의 다양한 시사점과 개선점을 던져주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개개인에게는 사실 단 하나의 교훈 만을 남기는 것 같습니다. 지금 이 시간을 소중히 여기고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진심을 다하라.
기자간담회 현장의 니시카와 미와 감독
● 주인공 사치오는 어떤 사람인가요?

작가들은 대부분의 경우 동성의 주인공을 상정합니다. 내면의 더 깊은 곳까지 잘 알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겁니다. 하지만 니시카와 감독은 남성 주인공 사치오를 주인공으로 내세웁니다. 여성 주인공일 경우 자신의 모습이 너무 많이 반영되는 게 부담스럽다고 감독이 말했다는 글을 어디선가 본 기억이 있습니다.

하지만 성별을 바꾸고 성격을 바꿔도, 주인공에게는 작가의 모습이 어떤 식으로든 투영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이 밉상인 인물, 사치오에 대한 작가의 설명이 듣고 싶어졌던 건지도 모릅니다. 사치오 자신의 표현처럼 ‘자존감이 낮은 사람’인 동시에 애인의 핀잔처럼 ‘자의식 과잉’이기도 한 주인공에 대해 작가는 어떤 설명을 해줬을까요?

“사치오는 낮은 자존감과 자의식 과잉이 굉장히 복잡하게 섞여 있는 캐릭터입니다. 극 중 소설가라는 설정을 갖고 있기도 하지만, 저의 개인적인 성품도 굉장히 많이 투영돼 있는 인물입니다.…혼자서 무언가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보통 회사를 다닌다거나 사회생활을 하는 사람들과는 다른 굉장히 유치한 면도 동시에 가지고 있습니다. 밖에 나가서 굉장히 멋진 말을 해야 할 것 같은 압박감도 갖고 있고요. 그래서 이런 자존심, 유치함, 동시에 자의식 이런 것들이 오히려 균형 나쁘게 섞여 있는 그런 캐릭터입니다.”

본인이 유명 작가여서 창작자들에 대해 이렇게 가혹하게 얘기했겠지만, 비단 창작자들만의 문제이겠습니까? 많은 현대인들이 정도가 다를 뿐 유사한 문제를 안고 살아갑니다. 밉상인 주인공을 보며 마냥 손가락질할 수 없는 건 그 안에 영화를 보는 우리의 비겁함과 졸렬함도 담겨있기 때문일 겁니다.    

(사진=영화 '아주 긴 변명'/영화사 진진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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