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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선량한 옴니버스 프로젝트'가 소개하는 소월길, 그리고 신종훈 감독

“영화감독이 되려면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까요?” 이런 질문을 받은 적 있다. 뭐라 대답해야 하지... “이름 있는 영화제에서 수상하면 되지 않을까? 그러려면 영화 아카데미에 지원하는 것도 방법이고. 필름 스쿨에 유학 가는 것도 괜찮다던데..." 말이야 이렇게 한다만  '그렇다고 모두가 감독이 되는 건 아니더라’.

영화 연출은 사실 어느 학교를 나오면 된다, 무슨 자격증을 취득하면 된다, 어떤 교육과정을 수료하면 된다, 식으로 딱히 정해진 루트가 없다. 자기 돈으로 예술하는 사람 아니고서야 그저 관객의 선택을 받을 가능성이 높아 보이는 사람일수록 기회가 생기는 원리이다.

최근 자신이 쓴 시나리오로 데뷔한 신종훈 감독을 만났다. 신 감독은 세 편의 퀴어 단편을 엮은 옴니버스 영화 ‘걱정말아요 (제작·배급:레인보우팩토리)’ 가운데 세 번째 작품인 ‘소월길’을 연출했다. '소월길'은 제35회 청룡영화상 단편영화상 후보에 지명된 후로 부산국제영화제와 팜스프링스 국제단편영화제 등에 초청됐다.

특이하게도 신 감독은 오랜 시간 상업 영화와 독립 영화를 오가며 조감독으로 활동한, 업계의 잔뼈 굵은 베테랑이다. 조감독 시절 필모그래피를 찾아보니 이름만 대면 알만한 좋은 영화들(혜화, 동/ 부러진 화살/ 도희야)이 가득하다. 남들과는 조금 다른 속도로, 다른 경로로 데뷔한 신 감독을 통해 이제 막 시작된 영화 감독으로서 삶에 대해 물었다. 
영화 '걱정말아요' 포스터
Q. ‘걱정말아요’가 지난주 극장에 개봉했어요. 이번이 첫 연출인가요?
대학생 때 첫 영화 만들고 12년 만이에요. 오랜만에 하려니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자기최면 걸었던 게 ‘다 필요 없고 말만 되게 만들자’

Q. 근데 그게 제일 어려운 거잖아요. 앞뒤 이어지도록 '말이 되도록' 만든다는 게
그렇죠, 그게 어떻게 보면 영화 만드는 일의 가장 큰 부분이죠.

Q. 조감독으로서 경력이 꽤 있는 편인데 직접 연출해 보니 어떤가요. 차이가 있던가요?
현장에서 하는 일로만 보면 한 40% 정도 겹치는 것 같아요. 하는 일은 대개 비슷해요. 연출로서 하는 일은 모니터를 체크하는 거고, 조감독은 한 발 떨어져서 감독님을 서포트, 조언하는 거거든요. 현장에선 그런데, 촬영 들어가기 전 준비하는 과정에서 가장 다른 건 아무래도 글(시나리오) 쓰는 부분인 것 같아요. 영화라는 게 결국 감독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관객에게 전달하는 과정인 거잖아요. 

전 스텝으로 참여하는 것도 영화를 만드는 중요한 부분이라 생각하거든요. 그 동안 상업 영화, 독립 영화 가리지 않고 많이 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고요. 지금 뭘 쓰고 있는데 어디에서 좋은 시나리오를 보여주며 조감독 제안이 와. 그러면 눈앞에 이 좋은 시나리오를 영화로 만드는 데 동참하고 싶은 거예요.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합류하는 거죠. 그런데 이제 제가 쓴 시나리오로 제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영화를 만들려 하니, 생각보다 어렵더라고요.
신종훈 감독/ 영화 '소월길' 연출
작품도 작품이지만 신 감독의 데뷔를 주목하는 건, 기존과는 조금 다른 경로였기 때문이다. 신 감독의 연출작은 신인감독 소개를 목적으로 하는 제작·배급사(레인보우팩토리)의 '선량한 옴니버스 프로젝트' 차원에서 진행됐다. 옴니버스영화인 만큼 '걱정말아요'는 세 편의 단편 ‘애타는 마음’(소준문 감독), ‘새끼손가락’(김현, 김대견 감독), ‘소월길’(신종훈 감독)로 이뤄졌는데 신 감독을 포함해 모두 신인 감독의 연출작이다.

'선량한 옴니버스 프로젝트'가 진행된 건 이번이 두 번째이다. 앞서 첫 번째 프로젝트에서 단편 ‘밤벌레(2012)’를 연출한 김태용 감독은 이후 장편 ‘거인(2014)’을 통해 평단의 호평을 받았다. 현재 상영 중인 ‘여교사(2016)'가 바로 김태용 감독의 영화이다. 그가 상업 영화계에 안착해 활발히 활동할 수 있는 데에는 옴니버스 프로젝트가 등용문이자 계기가 된 셈이다.

프로젝트의 기획자인 김승환 레인보우팩토리 대표는 “예전처럼 영화계에서 알음알음 실력 있는 감독들을 소개하고 소개받는 그런 문화가 사라졌다. 개인적으로도 실력 있는 감독들을 친한 제작자들에게 소개하는 일을 해 봤지만, 생각보다 잘 이어지지 않더라. 결국 이들의 영화를 극장에 걸어 관객에게 직접 보여주는 것만큼 확실한 방법이 없다는 걸 깨달았다"라며 "감독 각자의 색을 살린 옴니버스 영화인 만큼 손해가 예상되는 프로젝트인 건 맞다. 하지만 영화계 선순환을 위해서라도 이들을 발굴하고 소개하는 일을 계속 이어가고 싶다”고 말했다.

신 감독의 영화 제목 '소월길'은 실제 이태원에 가면 볼 수 있는 길의 이름이다. 식당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주인공 점순은 아들에겐 투잡으로 짬을 내 대리운전을 한다고 말했지만 실은 밤의 소월길에서 몸을 파는 일을 하고 있다.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길 맞은편에서 자신과 같은 일을 하는 트렌스젠더 아가씨 은지와 연대하지만, 둘 사이엔 끝내 해결할 수 없는 일이 발생한다.

- 다수의 이성애자들이 은연중에 가지고 있는 성소수자에 대한 차별의식을 날카롭게 포착한다. (오마이뉴스)
- 우연한 혹은 필연적인 만남에서 뜨거운 열정 혹은 따뜻한 온기를 나누는 순간에 집중한다. 사소한 환대와 공감의 순간을 섬세하게 따라가며 퀴어영화의 저변을 한층 넓혔다. (씨네21)

영화 '걱정말아요' 中 '소월길'
Q. 시나리오의 아이디어는 어디에서 얻으신 거예요?
처음엔 박카스 아줌마에 대한 장편을 쓰려고 했어요. 박카스 아줌마가 노인 자살을 돕고, 이런 포맷이 최근에 개봉했던 윤여정 배우 주연의 ‘죽여주는 여자’와 거의 비슷했죠. 굉장히 오랫동안 구상했던 스토리였어요. 그런데 계속 쓰다 보니 잘 안 풀리더라고요. 내가 잘 쓰고 있는 게 맞나, 이분들의 삶을 제대로 들여다보고 있는 게 맞나, 이런 고민이 길어지면서 단편으로라도 먼저 내보는 게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주인공 박카스 아줌마의 아들에 대한 이야기를 새로 붙이고, 제가 이태원 살거든요. 소월길로 출퇴근하며 트렌스젠더에 대한 이야기를 여러 번 들었어요. 그래서 영화적 허구이긴 하지만 소월길을 사이에 두고 박카스 아줌마와 트렌스젠더,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서있으면 어떨까 상상한 것에서 시작된 영화예요.

Q. 오래 구상한 영화였으니 완성되고 처음 보던 날 기분이 어땠을지 궁금해요
첫 프리미어 날(=기술 시사) 큰 화면으로 봤더니 설레기도 하고 정말 긴장이 많이 되더라고요. 전 제대로 못 봤어요. 계속 눈 이렇게 가리고 고개 자꾸 숙이고. 영화 끝나자 앞에 편집기사가 같이 앉아있었거든요. 나보고 "종훈아, 편집다시 하자"(웃음) 곁에서 듣고 있던 김승환 대표가 부연했다. “원래 큰 화면에서 보면 장면 장면 사이 호흡들이 있잖아요. 여유를 줄 때와 긴장을 줄 때의 호흡이 다른데 그게 큰 화면으로 봐야 보여요. 사실 그걸 보려 기술 시사를 하는 건데 감독님이 그 때 잘 캐치해서 고치셨어요.”  네, 기본적으로 제가 하는 일의 단점을 많이 보는 편이라서 더 그랬던 것 같아요. 솔직히 처음 보고 ‘아, 좋다!' 한 건 없었어요. (웃음)

Q. 요즘 감독들이 상업영화 데뷔하는 경로는 대부분 어떻게 되나요?  
제가 처음 이 쪽에 들어왔던 게 25살, 26살쯤이었는데 사실 그때부터 이미 자기 시나리오로 제작사와 계약을 맺고 데뷔하는 감독님들이 대부분이었어요. 조감독 하다가 회사에 픽업되는 경우는 정말 드물었던 것 같아요. 그게 벌써 십 수 년 전인데, 그때부터 이미 자기가 쓴 시나리오가 좋아야 그 시나리오로 데뷔를 할 수 있다, 그렇게 됐죠.
영화 '걱정말아요' 中 '소월길'
Q. 시나리오를 쓰는 능력이 연출력까지 보장해주지는 않잖아요. 이런 구조라면 연출 쪽으로 특화된 신인감독이 나오는 건 힘들 것 같아요
그런데 지금 우리 영화계가 신인 감독에게 과연 연출력이라는 걸 필요로 하는지 잘 모르겠어요. 사실 아주 독특한 소수의 영화를 제외하고는 상업적으로 되는 영화와 안 되는 영화의 기준이나 공감대가 어떤 범주를 벗어나지 않거든요. 연출하는 감독의 색깔이 진한 게 좋게 받아들여지는 분위기가 아니에요. 제작자 입장에선 이야기의 소재나 구조, 캐릭터가 독특하기를 원하지.

데이빗 린치처럼 개성 있고 실력있는 감독이 나온다고 해도 지금 우리 시장으로는...... 그 감독에게 연출 기회가 가긴 어려울 거예요. 핀처 정도면 모를까. 그런데 핀처는 천재적이면서도 상업적인 부분도 갖춘 드문 경우의 감독이고. 보통은 자기만의 색을 가진 감독이라도 이 일을 하면 할수록 색이 옅어지더라고요. 제작하는 분들 마인드로는 그런 독특함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건 어려운 일 같아요.

저는 그런데 어떤 면에선 긍정적으로 볼 수도 있다고 봐요. 결국 관객들에게 '전달'이 돼야 하거든요. 그런 의미에서 소통, 친절함은 필요하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실제 영화 만들어 보면 결국 시나리오가 '51'이라는 생각이 들거든요. 아무리 연출력이 좋아도 시나리오가 이상하면 잘 나오기 어려운 게 영화 같아요. 그런 영화는 그냥 ‘와, 때깔 좋다’ 그 뿐이죠. 그런데 시나리오가 정말 좋으면 ‘발로 찍어도’ 그 영화는 분명 남는 게 있거든요. 그걸 잘 표현해 주는 배우가 있다면 더 좋은 거고. 어쨌든 시나리오가 51인 거예요. 그런 맥락에서 신인 감독이 시나리오를 쓸 줄 안다는 것은 어렵지만 동시에 굉장한 강점이거든요. 그래서 그걸 쓴 감독에게 연출 기회를 주는 것 같고요.


Q. 마찬가지로 직접 쓴 시나리오로 데뷔하셨잖아요. 전하고 싶었던 메시지가 스크린을 통해 잘 전달된 것 같으세요?
처음 시나리오를 돌려서 리뷰를 받는데 ‘말하고자 하는 게 많다’ ‘ 핵심적인 주제 하나에 포커스를 줬으면 좋겠다’ 이런 얘기를 하시더라고요. 제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들을 다 넣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그렇다고 한 컷 한 컷에 모두 힘을 줄 수는 없는 거고.

그래서 인상적으로 생각했던, 시나리오 쓸 때부터 내가 스크린으로 보고 싶었던 것들, 그리고 감정적인 흐름 상 가장 중요한 장면들 위주로 찍었어요. 두 주인공이 소월길을 사이에 두고 서 있는 모습, 손을 잡고 함께 하는 모습 이런 건 중요한 장면이었고요. 스쳐가도 되는 장면은 스쳐가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예를 들면 여주인공이 폭행당하는 장면. 전 그 장면을 사실적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래서 마치 스케치인 것처럼 이런 말 어떻게 들으실 지 모르겠지만 공들여 찍지 않았어요. 그리고 동료 주방장이 "운전 조심해요, 걱정되니까." 이렇게 얘기할 때에도. 사실 얼굴 한번 따줘도(=클로즈업해도) 되거든요. 그런데 그 장면은 흐름 상 '슥' 그냥 가는 게 낫겠다 싶어서 목소리만 들려줬어요. 그런 식으로 집중할 것은 집중하고 버릴 건 버려가며 찍은 것들이 많아요.


Q. 이제 어떻게 보면 첫걸음을 디딘 셈인데, 앞으로의 계획은 어떤가요
독립 영화와 상업 영화 경계를 구분해서 일할 필요는 없다고 생각해요. 상업 영화 쪽 스텝 일도 재미있게 하다가, 생각해 둔 아이템들 만들 수 있으면 연출도 하고. 이번 ‘소월길’도 장편으로 보고 싶다는 분들이 계시더라고요. 이런 음지에서 살아가는 가족의 이야기 같은 것을 담담하고 구체적으로 보여줘는 것도 의미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사람 사는 게 별반 다르지 않다는 것, 그리고 서로가 서로와 연대하는 게 중요하다는 것, 이런 이야기를 계속 써나가고 싶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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