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말러, 처절함 속의 아름다움" - 성시연 경기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②

류란 기자 peacemaker@sbs.co.kr

작성 2017.01.03 16:39 수정 2017.01.03 18:16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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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휘자 성시연이 이끄는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이하 경기필)가 연주한 구스타프 말러의 교향곡 5번이 지난 12일 세계적인 레이블인 데카(DECCA)를 통해 음반으로 발매됐다. 음반은 내년 창단 20주년을 맞는 경기필의 첫 번째 정규 앨범이자 성시연 경기필 예술단장 겸 상임지휘자(이하 단장)가 처음 내놓는 신보다. 지난달 22일, 개인 일정 차 독일에 머무르고 있는 성시연 단장과 이메일(E-mail) 인터뷰를 진행했다.>

▶ [취재파일] "말러, 처절함 속의 아름다움" - 성시연 경기필 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 ①

Q. 여성이 활동하기에 가장 척박한 분야 가운데 하나로 꼽히는 지휘를 업으로, 수많은 단원들과 호흡하는 오케스트라 예술단장직을 맡고 계십니다. 애로사항이 많을 것 같은데, 정작 함께 하는 이들은 단장님이 평소 이런 부분을 크게 의식하지 않는 것 같다고 하더라고요.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와 성시연 단장여성, 지휘자, 그리고 국내 오케스트라 예술단장. 이 세 정체성이 삶에서 어떻게 작용하고 있는지요

독일에서 오래 생활해서 그런지 ‘여성은 ㅇㅇ하다’처럼 틀에 박아 생각하지 않는 편입니다. 언젠가 한국에서 큰 트렁크 가방 두 개를 들어 옮기니 택시 기사님이 제가 타자마자 ”어유, 무슨 여자가 그렇게 힘이 세요“ 라고 한소리 하시더군요. 저에겐 충격적인 일이었어요. 이 사회가 여성을 어떻게 바라보는지 보여주는 단면 같았어요. 

할 수 있다면 내가 내 짐을 직접 옮기는 것과 마찬가지로, 좋아서 선택한 일은 어떤 상황에서도 해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여성, 남성을 구분하는 것은 결코 결과물의 차이를 가져오지 않아요. 여전히 지휘라는 분야가 남성 위주라는 사실은 맞습니다. 하지만 음악을 한다는 본질을 놓고 봤을 때 제게 큰 영향을 미치지 않습니다. 전 여성으로서 지휘를 한다는 것, 그리고 단체를 이끈다는 것에 한계를 두지 않고 일합니다.

가끔 뮤지션이나 함께 일하는 사람들이 저에게 한계선을 긋는 경험을 합니다. 그럴 때엔 실망스럽긴 하지만, 그들의 생각에 영향을 받아선 안 된다는 것을 경험을 통해 배웠습니다. ‘매번 나는 무엇을 위해 이 일을 하는가’라는 본질을 되새기며 살아갑니다. 타인의 편견에 영향을 받는다면 이미 진 게임이라고 생각합니다. 내 인생을 책임질 수 없는 사람에게 내 인생을 맡기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Q. 지난 간담회에서 앞으로 계획을 설명할 때나 지난날의 성과를 평가할 때, 냉철하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스스로에게 너그럽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읽혔던 것 같아요.

"(지휘자로서 부족한 점을 묻는 질문에) 저의 단점은 너무 많아서요. 아무래도 제가 좀 예민하다 보니까 집착하는 그런 게 많은 것 같아요. 큰 그림을 보면서 가는 것보다도 어느 때엔 작은, 소소한 것에 상당히 집착하는 그런 면이 있더라고요. 이 밖에도 많지만 이것 하나로만 추리겠습니다. 

... 경기필의 올해 자체 평가를 물어보셨는데요. 제가 셀프디스를 많이 하는 편이라. 올해 프로그램에 대한 점수를 매긴다면, 멘델스존의 '한여름밤의 꿈'은 그래도 약간 높은 점수를 줄 수 있을 것도 같지만, 전체적인 프로그래밍의 점수를 놓고 본다면... 중간 정도로 평가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지난달 12일, 말러 교향곡 5번 음반발매 기자간담회 당시
 


그러면서도 곡을 해석할 때 "한없이 기쁘거나 한없이 슬플 때조차 그 감정을 그대로 표현하지 않았다"며, '기쁠 때에도 슬픈 일을 생각하고, 슬플 때에도 기쁜 일을 생각하는' 본인의 성격을 언급하셨는데요. 이른바 냉정과 열정 사이라고 할까요. 한편으론 사람이기 때문에 슬프거나 약해질 때가 있다는 자기 고백처럼 들리기도 했습니다.
성시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고뇌가 찾아올 때 어떤 식으로 대응하는 편이신지요. 그리고 그런 단장님의 인생관과 성격이 음악엔 어떻게 투영되는지요

말씀하신 대로 저는 스스로에게 상당히 가혹한 편입니다. 기쁜 일과 괴로움은 순환적으로 돌아오기 때문에 제가 생각해도 어떤 일에나 상당히 쿨한 편이고요, 나락으로 떨어졌다고 하더라도 다른 길이 있음을 알고, 최선을 다하되 집착하지 않는 것을 배우고 있습니다. 그래도 요즘은 저도 나이가 들어가며 스스로에게 칭찬하는 법을 배우고 있습니다. 힘든 직업이다 보니 매번 에너지가 소진이 되는데 ‘힘들었지? 수고했다’ 이렇게 자신에게 던지는 한마디가 큰 힐링이 된다는 사실을 알았거든요.

자신의 노력과 약점을 함께 인정할 줄 아는 자존감을 가진 지휘자가 포디움에서 더 빛난다는 것도 알게 됐고요. 좋은 위치에 서면 이전에 갈망했던 것들이 어느 순간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감사함을 잊게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지 않기 위해 냉철하게 제 자신을 판단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봅니다. 

그리고 이제는 음악이 감정적으로 느껴지기보단 객관적으로 보게 되는 시기인 것 같습니다. 마치 유체이탈하는 느낌? 그 안에서 쓰고, 달고, 탄식하고, 행복해하던 시간을 지나 더 넓은 안목으로 음악을 보게 된 것 같아요. 인생도 마찬가지 아닐까요.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꿈은 크게 그리되 집착하지 않는... 앞으로 제 인생이 어떻게 진행될지 궁금합니다.

Q. 제가 누군가를 알아갈 때 자주 던지는 질문입니다. 단장님은 일상에서 무엇에 중독되어 있으세요?

저 같은 경우엔 산책에 중독돼 있는 것 같아요. 한국에서는 사실상 산책하기 쉽지 않은데요. 인적이 드물고 차 소리, 음악소리 안 들리는 곳에 가면 편안함을 느낍니다. 베를린 집 근처에 지금은 공원으로 쓰이는 템펠호프 공항이 있는데요. 비가 부슬부슬 내려도 허허벌판을 산책하러 나갑니다. 걸으면서 생각을 정리하기도 하고, 때로는 아무 생각 없이 걷는 그 순간이 정말 행복합니다. 그러한 순간들은 정지 화면처럼 기억 속에 오래 남는 것 같아요.성시연 경기필하모닉오케스트라 상임지휘자Q. 경기필과 함께 한 지 어느덧 3년이 다 되어 갑니다. 지난 시간을 추억한다면 어떤 장면이 가장 강렬하게 떠오르세요?

경기필과는 첫 만남이 가장 강렬했던 것 같아요. 첫 리허설 날 지휘봉을 휘둘렀는데, 그때 터져 나왔던 에너지를 여전히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건 제가 세계 어느 곳에 가서 지휘를 하더라도, 듣고 느낄 수 없었던 희열이었습니다. 당시 말러의 부활 교향곡을 연주했는데, 저와 경기필이 하나 되어 부활하고자 하는 열망이 담겼던 것 같아요. 공연이 끝나고 관중석에서 터져 나오던 함성 또한 잊을 수 없습니다. 격려와 응원의 메시지였던 것 같아요. 오케스트라와 지휘자와 관중이 하나가 되는 벅찬 순간이었습니다.

[* 창단 20주년을 맞이하는 경기필은 올해 독일 베를린에서 열리는 세계적 음악축제 '무지크페스트 베를린'(Musikfedt Berlin)에 초청받는 겹경사를 맞았다. 음악의 본고장 유럽에서도 손꼽히는 유명 음악축제로 1950년대부터 시작해 2005년 현재의 이름으로 출범했다. 그동안 쿠르트 마주어, 로린 마젤, 다니엘 바렌보임, 사이먼 래틀, 마리스 얀손스 등 세계적 거장들이 참여했다.

경기필은 2005년 이후 아시아 오케스트라로는 처음으로 초청받아 탄생 100주년을 맞는 윤이상의 작품을 선보인다. 성시연 단장은 "윤이상의 탄생 100주년을 맞아 그가 활동했던 베를린에서 연주할 기회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여러 기회를 타진했는데 역사도 깊고 음악가라면 누구나 초청받고 싶어 하는 축제에 초청받았다"며 "경기필이 다시 한번 도약하는 계기가 될 것 같다"고 만족해했다.

경기필은 올해 교향곡 전곡과 레퀴엠을 비롯한 브람스의 다양한 작품들과 브루크너 교향곡 7번, 말러 교향곡 9번 등 묵직한 작품들을 공연할 예정이다. 성 단장은 "솔직히 내가 하고 싶은 곡들을 골랐다. 죽기 전에 꼭 한번 해봐야지 했던 곡들을 마음껏 해보려 한다"며 "브람스는 마흔이 넘으면 좀 무르익은 연주를 할 수 있을 것 같았는데 사십 대 초반 나이인 지금 해볼 만 할 것 같아서 골랐다"고 말했다. 또, "지금까지는 경기필이 새롭게 도약하는 오케스트라로서의 이미지를 심기 위해 주력했다면 올해는 경기필만의 소리를 내는 데 집중하는 한 해가 될 것 같다"고 덧붙였다.]


Q. 마지막 질문입니다. 단장님 본인은 스스로를 어떤 사람이라고 생각하세요?
이건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네요. 솔직히 말해 제 자신을 정의하기 힘들다고 생각됩니다. 답이 나왔네요.  정의하기 힘든 사람 :)경기필하모닉 오케스트라와 성시연 단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