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재파일] 사람은 모두, '언어의 지문'을 남긴다 - 책 '단어의 사생활'

류란 기자 peacemaker@sbs.co.kr

작성 2016.12.28 08:00 수정 2016.12.28 09:22 조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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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 달 전쯤, 지금은 국정조사 청문회 증인으로 유명해진 A씨와 B씨를 상대로 몇 차례 전화 취재했다.

A씨는 줄곧 세상 억울하다는 입장이었다. 때론 공격적으로, 때론 침울하게 답변했다.
"최순실이라는 이름을 이번 일로 처음 들었다."
"누가 난데없이 나 같은 일반인까지 끌어들였는지 모르겠다."
"의심받는 날짜에 대해선 택시비, 생수 한 병까지 영수증으로 가지고 있으니 제출하겠다."
"출입국관리소에 증명서를 끊어줄 테니 직접 확인해라."
"기사 쓴 언론사들에 대해선 언론중재위원회고 민사 소송이고 끝까지 쫓아가 법적 대응하겠다."

B씨는 그에 비해 느긋했다. “네~ 기자님”으로 시작해 “아니 글쎄, 이게 무슨 일이래.”, “최순실? 일면식도 없어. 네버, 네버. 사실무근!” 어느 때엔 '내가 정말 생사람을 잡나?' 싶게 여유로웠다.

최근 청문회에서 두 사람 모두 ‘최 씨와 일주일에 몇 번씩 만났던(혹은 통화했던) 사이’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제3자에 의해 ‘최 씨의 최측근’이라 불렸다는 사실도 증언됐다. TV로 지켜보던 내 얼굴은 새빨개졌다. (표현하지 않았지만) 한때나마 "이 사람들 정말 무고하면 어쩌지?" "말하는 내용이 사실이라면 지금 얼마나 힘들까?" 걱정했던 내 자신이 한심하고 부끄러웠다. 자려고 누울 때마다 억울해하던 그들의 목소리가 떠올라 하이킥을 100번쯤 날렸다. "어째서, 왜! 부끄러움은 나의 몫인가?!"

텍사스 대학교 심리학과 교수이자 학과장으로 재직 중인 제임스 W.페니베이커는 사람들은 모두 자신만의 ‘언어의 지문’을 남긴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단어'라는 단서가 있으면 그 사람의 성격, 심리상태, 지금껏 살아온 배경, 미래의 행동도 파악할 수 있음을 과학적으로 밝혀냈다. 그의 저서 ‘단어의 사생활(What our words say about us, 2016/출판사: 사이)’엔 다음과 같은 대목이 나온다.

“거짓을 탐지하려고 할 때 ‘나’라는 단어는 정직함을 가장 잘 나타내는 표현이다. ‘나’라는 단어는 그 의미상 일종의 ‘신원 확인’ 역할을 한다......반면 유죄였던 사람들은 법정에서 3인칭 대명사를 많이 사용했다. 이들은 비난을 자신에게서 다른 곳으로 떠넘기려고 하고 있었다. 거짓말을 할 때에는 자기 자신과 말하는 내용을 멀리 떨어뜨려 놓는다. ‘그 여자와’ 성관계를 하지 않았다는 빌 클린턴의 주장은 이에 해당되는 예다.” 책 '단어의 사생활(What our words say about us)'"사람들은 진실을 말할 때 더 많은 단어를 사용할 뿐만 아니라 더 길고 복잡한 문장을 구사한다. 더 어려운 단어를 사용한다는 사실은 진실한 진술이 더 정밀하고 미묘한 차이를 잘 표현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진실한 진술을 하는 사람들은 시간(~전에, 10시 정각, 아침), 장소(~위에, ~옆에, ~주변에), 움직임(가다, 높다, 뛰다) 등을 떠올리게 하는 단어들을 사용할 가능성이 훨씬 높다. 같은 차원 안에서도 ‘더 많이’, ‘더 적게’, ‘적은’, ‘ 더 큰’과 같이 숫자와 수량을 나타내는 단어를 사용하여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 
  
“상식과 달리, 거짓스러운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더 많이 언급하고 긍정적 감정을 나타내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한다. 거짓말쟁이라고 하면 흔히 외롭고, 교활하고, 간사하고 자기혐오에 빠져있고, 믿을 수 없고, 필사적으로 들키지 않으려고 하는 불안한 사람을 떠올리겠지만 그런 거짓말쟁이는 아주 드물 것이다.”


다음 문장들은 ‘거짓말임을 알아볼 수 있는 흔한 표현’들이다.

* “실수가 저질러졌어.” 같은 수동 표현을 사용한다
- 역사학자들은 헨리 키신저 국무장관이 1970년대에 베트남 전쟁의 범위와 방향에 관해 미국 국민들을 속였다는 증거로 훗날 인터뷰에서 “내가 일한 정부들에 의해 실수가 저질러졌을지도 모르겠습니다.”라고 말한 문장을 언급한다.

* 질문에 대한 대답을 회피한다
- 학생들이 책 속에 넣어둔 1달러를 훔쳐야 하는 ‘모의 범죄’ 실험. "당신이 가져갔나요?"라는 질문에 대해 실제로 돈을 가져간 학생들은 이렇게 말한다.

“전 훔치는 게 좋지 않다고 생각해요. 절도에 반대하거든요. 아주 옛날에 한번 그런 적이 있어요. 더 어렸을 때요. 사람들이 절 잡을 거라고 생각했던 그 기분이 정말 싫었어요. 아시겠지만 저는, 그냥, 특히 1달러라고 하면 그걸 가져가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왜요? 전 책을 펴볼 생각도 안 했고 거기서 1달러를 찾으려는 생각도 전혀 안 했어요. 전 그냥 세미나 준비하느라고 글을 쓰고 있었거든요.”


이에 반해, 돈을 훔쳐가지 않은 학생들의 가장 흔한 답은 무엇이었을까?“아뇨, 전 가져가지 않았어요” 였다.


* “맹세컨대”같은 수행적 표현을 사용한다.
- 수행적 표현(performative)이란 ‘약속하건대(혹은 맹세컨대)’같은, ‘진술에 대한 진술’이다. 1998년 1월 26일 기자회견에서 클린턴은 이렇게 발표했다.

다시 이렇게 말하는데, 저는 그 여자, 르윈스키 양과 성관계를 하지 않았습니다.(I'm going to say this again: I did not have sexual relations with that woman, Miss Lewinsky.)"

역대 최고의 투수 중 한 명인 로저 클레멘스는 예전 팀 동료들에게서 선수생활 중 경기력을 향상시키는 약물을 복용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나중에 약물 복용을 인정하기 몇 달 전 기자회견에서 클레멘스는 이렇게 말했다.


아무런 조건 붙이지 않고 확실하게 진술하고 싶은데요, 저는 선수생활 중 그 어느 때도 스테로이드나 성장 호르몬, 다른 금지된 약물을 복용하지 않았고, 사실 제 평생......”
(작가는 이에 대해 ‘그가 조건없이 확실히 말하고 싶어 했다는 것'만은 사실이었을 것이라고 꼬집는다)


책을 읽는 동안엔 "오, 정말 그럴 수 있겠다!" 싶었지만… 최 씨를 모른다고 말했던 A씨는 '진실함'의 증거라던 길고 복잡한 정교한 문장을 사용했다. 구체적으로 묘사했고, 수치에 밝았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고, 대답을 회피하지 않았던 B씨도 결국… 거짓말이었다. 나와 통화했던 사람들은 유독 일반화된 규칙으로 설명할 수 없는 이른바 '꾼'들, '선수'였던 걸까?

책엔 이 밖에도 재미있는 사례와 지식들이 등장한다. 시기가 시기인만큼 특히 ‘대통령의 단어’에 대한 부분이 흥미롭다. 작가에 의하면 대통령은 자신만만한 상황이거나 강하게 어필하고 싶을 땐 '높은 지위'를 의미하는 '우리'를, 위축되거나 겸손해 보일 필요가 있을 땐 '낮은 지위'를 뜻하는 '나'라는 단어를 더 빈번하게 사용한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반대로, 지위가 높은 사람들은 [우리]라는 단어를 많이 사용하고 [나]라는 단어를 훨씬 적게 사용한다. [우리]라는 단어는 사람들이 거만하고, 감정적으로 거리가 있고, 지위가 높을 때 자주 사용된다."

"1972년 6월에서 대략 11월까지 보좌관들과의 대화에서 닉슨의 [나]라는 단어의 사용 비율은 2-4퍼센트였다. 하지만 일이 계속 커지고 닉슨의 지위가 손상됨에 따라 [나]라는 단어의 사용은 나날이 늘어갔다. 1973년 7월, 마지막 테이프가 녹음될 무렵에는 전체 사용 단어에서 [나]라는 단어의 평균 사용 비율이 7-8퍼센트 근처까지 올라갔다. 요컨대 닉슨은 자신의 정치 세계가 무너지기 시작함에 따라 다른 사람들을 대할 때 덜 지배적이고 덜 강력한 태도로 대하게 되었다."

"부시의 [나]라는 단어 사용이 처음으로 급격히 떨어진 것은 9/11 테러 직후였다. 이때는 대다수의 미국인들과 마찬가지로 부시 역시 [나]라는 단어의 사용을 줄이고 [우리]라는 단어를 더 많이 사용했다. 테러 사건이 부시에게 미친 영향은 대단했고 이후 몇 달에 걸쳐 그의 신경은 아프가니스탄 침공, 탄저균 테러, 테러에 대처하기 위한 정부 방향 재설정 등 산적한 긴급 사태로 온통 집중되었다."

* 작가에 따르면, 이후 부시 대통령의 [나]라는 단어의 사용 비율이 현저히 낮아진 시기는 이라크 침공이 결정된 2002년 10월과 실제 침공이 이뤄진 2003년 3월, 그리고 재선이 결정된 2004년 11월이었다.

'I'와 'We'를 우리 말로 직역하기엔, 한글과 영어는 상이하다. 하지만, 주어를 무엇으로 설정하느냐에 따라 대통령의 심리, 국정 방향을 예상할 수 있다니 재미있는 시도이다. 

앞으로 국정조사 청문회와 대통령의 담화를 지켜볼 때 그들의 언어가 남긴 흔적이 무엇인지, 이면엔 어떤 복잡한 심경과 계산이 담겨 있는지, 책을 기반으로 추리해 보는게 가능하지 않을까? 물론 가장 이상적인 상황은 그들이 사실만을 말해 이런 저런 골치 아픈 진실게임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일 테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