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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파일] 덕수궁 돌담길에 '폭탄'이 떨어졌다!

덕수궁 돌담길에 '폭탄'이 떨어졌다. 서울 도심에 촛불 인파, 촛불 물결이 일렁이고 있는 건 알겠는데, '폭탄'이 떨어졌다는 소식은 금시초문일 것이다. 그런데 진짜 '폭탄'도 거대한 '폭탄'이 떨어졌다. 

발 아래로 아스락아스락 밟히던 낙엽도 사라지고, 아직 뽀드득뽀드득 눈도 내리지 않은, 가장 무미건조한 시기의 덕수궁 돌담길. 차가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갑자기 떨어진 '폭탄' 덕분에 따스함마저 느껴진다.
덕수궁 돌담길
지난 10월 한 인터넷 학부모 카페 회원들이 덕수궁 돌담길 가로수에 '폭탄'을 감았다. 가로수 64그루에 털실로 짠 스웨터 '폭탄'을 입혀놓은 것이다. 이른바 '트리 허그(Tree Hug)', '나무를 따스하게 안아주자'는 의미이다. 나무들이 입은 핸드메이드 스웨터는 디자인도 색감도 다양하다. 쨍한 원색을 층층이 떠놓은 줄 무늬 문양부터, 사람이 나무를 끌어안은 모양을 그대로 옮겨놓기도 했다. 차가운 날씨이지만, 해바라기와 제비꽃이 곱게 피기도 했고, '따스함' 하면 바로 생각나는 '엄마'란 단어가 털실로 짜여있기도 하다. 털실이라는 재료가 주는 느낌은 물론이고, 디자인 자체가 내뿜는 온기에, 한 가닥 한 가닥 실을 짜내려간 사람의 마음까지 더해져 덕수궁 돌담길을 훈훈하게 만들고 있다.
덕수궁 돌담길
화사하기도 하고 의미도 있는 작업을 왜 굳이 '폭탄'이라고 일컫는 것일까. '폭탄'의 공격성, 파괴성은 전혀 없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이번 '트리 허그' 작업이 '거리 예술(street art)'의 일종인 '얀 바밍(yarn bombing, 실폭탄)'을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얀 바밍은 '얀 스토밍(yarn storming)', '게릴라 니팅(guerrrilla knittint)'이라고도 불린다. 지금은 너무나 흔해진 '그래피티(graffiti)'처럼 언제 어디서나 거리에서 만날 수 있는 '거리 예술'의 일종이다. 그래피티가 스프레이나 페인트를 사용한다면, 얀 바밍은 털실로 하는 게 다른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그래피티는 한 번 작업을 하면 그 위에 덧칠을 하지 않는 한 '영구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얀 바밍은 털실이기 때문에 언제든 잘라내거나 풀어낼 수도 있어 '반영구적'이다. 실제로 그래피트는 '반달리즘(vandalism, 문화유산이나 예술품을 파괴하는 행위)'의 성격을 띠고 있지만, 얀 바밍은 '기존 설치 대상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 '언제든 철거 가능하다'는 점에서 '파괴력'은 그래피티보다 상당히 약하다고 볼 수 있다. 단지 작가들이 '갑자기' 나타나서 '갑자기' 설치한다는 점에서만 '폭탄'스럽다고 할 수 있겠다.

얀 바밍은 2005년 미국 텍사스주의 마그다 사예그(Magda Sayeg)라는 여성이 시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물론, 털실을 이용한 미술 작품은 그 이전에도 여러 차례 등장한 적이 있다.) 뜨개질을 하다 남은 실을 어떻게 할까 고민하다 자신의 뜨개질 공방의 문고리 등을 털실로 꾸민 데서 비롯되었다는 것이다.
마그다 사예그의 첫 번째 얀 바밍, 2005
그 이후 영국에서도 '니트 더 시티(Knit the City)'라는 뜨개질 그래피티 그룹이 생겨났고, 이 때부터 얀 바밍이 거리 예술로 자리잡게 되었다. 가로수, 가로등, 소화전, 자동차, 건물 등등 도시 곳곳을 털실 작품으로 뒤덮는 움직임이 세계 각지로 퍼져나가면서, 2011년에는 '인터네셔널 얀 바밍 데이(International Yarn Bombing Day, 6월 11일)'까지 지정되었다.
마그다 사예그, 멕시코시티
국내에서도 지난 2007년 서울광장 일대에서 한 구호단체가 나무에 털실을 입히는 작업을 한 적이 있고, 2011년에는 광화문 거리에 있는 '망치질하는 사람(Hammering Man)'이 빨간 털실 모자를 쓴 적이 있다. 이 역시 구호단체가 캠페인성으로 진행한 것이었다. 이번 '트리 허그' 작업도 카페 회원들이 미리 덕수궁 돌담길 가로수 관리를 하고 있는 중구청에 승인을 받아 진행하였다. 즉흥적으로 이뤄진 건 아니지만, 아마추어들이 거리를 빛냈으니 훌륭한 스트리트 아트라고 할 수 있겠다. 
덕수궁 돌담길
애초 얀 바밍을 시작한 마그다 사예그는 자신이 거리에 설치해놓은 털실 작품을 보고 사람들이 잠깐 멈추어 서서 좋아하고 사진 찍는 모습을 보고 지금까지 작업을 이어오고 있다고 말한다. 간단한 손재주로 쉴 틈 없이 바쁘게 사는 도시인에게 잠깐의 여유와 웃음을 주는 역할을 할 수 있게 됐다는 게 자신에게도 즐거움이 되었다는 것이다. "예술이 뭐 별건가, 내가 즐겁고 남을 감동시키면 그게 예술이지..." 라는 것이다. 
뜨개질을 실로 꾸민 집
누구나 예술가로 만들고, 거리를 전시장으로 만들 수 있는 '폭탄'. 얀 바밍이 폭탄이라면, 세상에서 가장 따뜻하고 아름다운 폭탄일 것이다. 만약 당신에게 이 아름다운 폭탄을 던질 기회가 주어진다면 당신은 어디에 어떤 폭탄을 던지고 싶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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