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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년 악몽 '축사노예' 생활 접고 행복 되찾은 만득 씨

19년 악몽 '축사노예' 생활 접고 행복 되찾은 만득 씨
▲ 장애인직업재활시설 보호작업장에서 인테리어 용품을 조립 중인 고 모 씨 (만득 씨) (사진=연합뉴스)

"고향에서 가족과 함께 살아서 너무 좋아요"

지난 6일 청주의 한 장애인 직업 재활시설 내 공동 작업장에서 만난 고모(47·지적 장애 2급)씨는 액자 등 인테리어 용품을 만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기관의 소개로 전날부터 일을 배우기 시작했다는데 겨우 이틀째를 맞은 '초보'치고는 손놀림이 꽤 능숙했다.

요령을 피거나 딴짓을 하지도 않고 작업에 몰두했다.

그의 얼굴에는 시종일관 진지함이 묻어났다.

쉬는 시간에는 동료들과 아직 서먹하지만 미소를 띠며 담소를 나눴다.

너무나 평범한 이런 풍경은 사실 6개월 전만 해도 고씨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결코, 비범할 것 없는 평범한 일상이 그에게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행복 자체로 보였다.

고씨는 지난 7월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킨 '축사노예' 사건의 피해자다.

당시 자신의 이름조차 몰라 가해자 부부가 불렀다는 '만득이'로 언론에 소개됐다.

1997년 여름 천안의 한 양돈농장에서 일하던 고씨는 영문도 모른 채 소 중개인의 손에 이끌려 청주시 청원구 오창읍에 있는 김모(68)씨와 오모(62)씨 부부의 농장으로 오게 됐다.

이곳에서 그는 2평 남짓한 축사 창고 옆 허름한 쪽방에서 생활하며 소똥을 치우고, 여물을 챙겨주는 강제노역에 시달렸다.

살인적인 노동 강도에도 품삯은 고사하고 일을 못 하면 끼니를 거르기 일쑤였다.

심지어 매질도 당했다.

그가 생활한 쪽방은 축사와 불과 3m도 안 떨어져 소똥 냄새가 진동했고, 바닥에 깔린 전기 패널의 온기만으로 겨울을 나야 했다.

이런 악몽 같은 시간은 지난 7월 1일 밤 축사를 뛰쳐나온 고씨가 경찰에 발견되면서 비로소 끝이 났다.

김씨 부부의 농장으로 끌려온 지 꼭 19년 만이다.

그리운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고씨는 처음엔 극도의 대인 기피 증세를 보이며 불안해했지만, 주변의 도움을 받아 빠른 속도로 안정을 되찾아 갔다.

물론 가혹 행위를 당하며 강제노역에 내몰렸던 축사 생활의 악몽을 뇌리에서 깨끗이 지울 수는 없었다.

하지만 어머니(77)·누나(51)와 함께 생활하는 지금의 그는 19년 전 행복했던 청년 시절의 모습 그대로다.

일을 시작하기 전 고씨는 어김없이 교회를 찾는다.

일과 중 가장 많은 시간을 교회에 할애한다.

오전 5시에 열리는 새벽 예배에도 빠짐없이 참가하는 독실한 신자다.

고씨가 다니는 교회의 조재웅(44) 목사는 "고씨가 처음 돌아왔을 때는 고개를 푹 숙이고 다녔는데, 요즘은 자전거를 타고 마을 곳곳을 누비거나 동네 사람들과도 잘 어울린다"며 "교회 소일거리나 청소도 스스로 돕는 등 적극적인 모습"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오는 성탄절에는 고씨가 남자 성도들과 함께 율동 공연도 선보일 예정"이라고 귀띔했다.

얼마 전부터는 교회 사람들로부터 한글을 배우기 시작했다.

지금은 글씨를 쓴다기보다는 그림을 그리는 수준이지만 습득력이 빨라 내년부터는 정식 특수교육을 받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청주시 장애인 가족 지원센터 관계자는 "고씨는 한 번 배운 것을 절대로 까먹지 않아 특수교육 과정을 밟으면 짧은 시간에 많은 발전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했다.

고씨는 물론 그의 가족은 이런 하루하루가 감사하고 행복하다.

말이 서툰 그에게서 직접 들을 수는 없었지만 마을 이장은 "고향에서 가족과 살아서 너무 좋다"는 말을 자주 한다고 전했다.

19년 만에 잃어버린 아들을 되찾은 고씨의 노모는 "든든한 아들이 곁에 있으니 얼마나 마음이 편안하고 행복하냐"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고씨 가족에게 씻지 못할 아픔을 준 농장주 김씨 부부는 법원의 단죄를 기다리고 있다.

김씨 부부는 현재 형법상 노동력 착취 유인, 상습 준사기, 상해, 근로기준법 위반, 장애인복지법 위반 등 총 5가지 혐의로 기소돼 재판이 진행 중이다.

이중 노동력 착취 유인죄는 징역 2년 이상 15년 이하의 징역에 처하도록 하는 중대 범죄다 특히 부인 오씨는 폭행 혐의가 중한 것으로 조사돼 구속 상태로 재판을 받고 있다.

김씨 부부 측은 "고씨에게 임금과 퇴직급을 미지급한 사실은 인정하지만 검찰이 지적하는 노동력 착취 유인에 의도성은 없었다"며 "또한 범행의 상습성과 피해자에게 상해를 입힌 사실도 없다"고 일부 혐의를 여전히 부인하고 있다.

하지만 재판 과정에서 직접 증인으로 출석한 고씨는 악몽 같은 축사 생활을 또렷이 기억했고, 재판부 역시 증언의 신빙성을 인정해 김씨 부부가 자신들의 잘못에 상응하는 처벌을 받게 될 것이라는 관측이 지배적이다.

고씨가 김씨 부부로부터 받지 못한 임금을 되찾기 위한 소송도 진행되고 있다.

고씨는 대한법률구조공단의 도움을 받아 김씨 부부를 상대로 5년 치 임금과 퇴직금에 해당하는 8천여만원 상당의 임금 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또 물리적·정신적 피해에 대한 위자료 등 1억3천여만원 상당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도 함께 냈다.

법원 관계자는 "현재 고씨가 낸 2건의 민사소송은 병합돼 법원 조정 절차를 밟고 있다"며 "조정 성립 여부는 2주 후에 결정 날 것"이라고 설명했다.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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